나는 그날 그 전화를 받지 말았어야 했다.
차아암 볕이 따사롭고 화사한 5월 봄날이었다.
사주팔자가 꼬이는 일이 벌어지려면
원래 날씨도 좋은 법이다.
ㅇ교수가 전화를 걸어왔다.
전화가 울렸고 나는 받았다.
생각지 못한 그의 전화에
나는 저번에 제출했던 중간고사 대체 과제가
문제가 있어 전화한 줄 알고 깜짝 놀라며 물었다.
아. 네. 교수님 안녕하세요. 무슨 일로..
그는 말을 뱅뱅 돌리며
궁금하지도 않을 내 대소사를 물으며
스몰토크를 하다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에 1년 동안 3차로 진행되는
일반인 대상 교육프로그램이 있는데
ㅇㅇ쌤이랑 본인 특강을 돕는
조교를 해줄수 있으냐 물었다.
그는 어찌하야, 무슨 이유로, 어째서, 왜,
얼레벌레한 나와 내 친구를 부른것인가!
학교에서 진행하는 일반인 대상
교육과정이 있었다.
신청자는 수강비를 내고
몇달동안의 교육과정으로
전공 교수들의 지도를 받는 과정이었다.
신청자들의 기승실력은
생짜 초보에서부터
초원 꽤나 달려본 사람들까지 다양했다.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교수는
그 강의를 원할하게 진행하기 위해
조교들의 도움을 받는데
이때 교수의 지도를 받고있는
재학생들이 교수를 도왔다.
생계형 만학도인 나는
뭐라도 배우려고 눈에 불을 켜고 있었기에
순진한 나는 그와 통화를 하면서 생각했다.
이건 교수가 티칭하는걸 곁에서 지켜보면서
배울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도망쳐.바보야.인생 조지지 말고!)
나와 내 친구에게 조교를 부탁한 그 교수는
학부내에서 까탈스럽기로 유명한 교수이자
그의 실기 강습땐 모든 학생들이
초긴장모드로 수업을 받으며
학생들이 기피하는 교수로는 단연 1순위였다.
기승시에 말에 집중하지 않거나 딴짓을 하거나
교수의 티칭을 듣지 못하는 순간이 벌어지면
돌이킬수 없는 비극이 시작된다고
선배들이 말했다.
실내 마장은 꽤 크다.
운동 소음만으로도 교수 티칭 목소리는
마장 구조상 안들리기 일쑤였다.
그런 교수의 수업에
조교로서 수업 진행을 돕게 된거다.
(가로열고,나도 미쳤지.가로닫고)
내 친구와 내가 그 교수 특강에
조교로 들어간다더라.하는 소문은
학교에 삽시간에 펴졌다.
그들은 우려와 걱정과
너도 한번 당해봐라.의 분위기를 풍기며
한 목소리로 장난스럽게 그렇게 말했다.
조만간 ㅇㅇ쌤과 ㅁㅁ쌤은
지랄맞은 교수때문에 울고 불고하여
학교를 그만둘꺼다.라고.
어찌되었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교수는 나와 친구를 택했다.
뒤늦게 짐작해보건데,
내 친구와 나는 늘 미소를 지으며
누가 봐도 착해보이는 이미지라(실제 그렇다)
그는 온갖 성질을 부리며 일을 부려먹기에
우리가 아주우 적합한 이들이다.생각한듯 했다.
우린 무수한 이들의
걱정과 호기심어린 시선을 느끼며
특강을 진행했다.
결과적으로 그들의 우려와
못된 심뽀를 담은 기대와는 달리
처음 몇 번의 수업은 순조롭고 유쾌했다.
그 교수에게 수년간 다양한 버전으로
오지게 당해본 역사가 있는 학생들은
우리를 심히 걱정하며
그의 까탈스러움.히스테리. 발작적 분노를
바라옵거나
기대하거나
예상하거나
추측했었던바,
그는 그들의 예상과 다르게
아주우 젠틀하게 일반인들 앞에서
조교입장인 우릴 존중하고 챙겨주었다.
(자기 독백 시작!)
그때 친구와 나는
그의 태도에 속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게 그와 맺어진 인연은
온갖 풍파를 일으키며
내 만학도 인생에 크나큰 스크레치를 남겼다.
엠병할!
여튼 그날 그는
순진한 우리에게 그 나름 이미지 관리를 한건지,
1년 과정을 어찌되었건
우리 도움을 받아 특강을 진행해야했기에
우리가 그의 실체를 뒤늦게 깨달아
학을 띄며 도망갈껄 걱정해서인지,
아주우 말도 못하게 젠틀했다.
그것은 학부내 역사상 일대사건이자
일대변혁의 일로써
학생들과 타 교수들 사이에
대대로 회자될 엄청난 사건이었다.
ㅡ이거시.그럴만한 이유가 될 일이라고?ㅡ
그만큼 나와 내 친구는 순진했고
그만큼 그는 까탈러로 유명했다.
어리고 늙은 학생들과 나이 어린 선배들과
다른 교수들의 초미의 관심과 걱정, 우려속에
우리는 그 교수를 도와 수업을 했다.
그들의 기대,
저 둘은 교수 조교 노릇하다가
울면서 박차고 나오리라!를 져버리며
우린 우리 스스로도 매우 즐거운 수업을 했다.
우리가 배운것도 많았고.
첫날 교수는 일반인 교육생들에게 말했다.
내 수업은 여러분들을 가르치는
수업이기도 하지만
저 뒤에 계시는 조교분들을 위해
가르치는 수업이기도 합니다.
그의 첫 특강에서 순진한 나와 내 친구는
이론 강의실 맨 뒤에서 그 말을 듣다가
그의 말에 감동하여 귀에 대고 소근댔다.
에앵? 이게 왠일이다냐.
어리고 늙은 학생들과
나이 어린 선배들과 교수들이 말했던것처럼
상종못할 인간은 아니네.
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아주 처언처언히 본색을 드러냈다.
승마를 처음 경험하는
일반인 교육생 초보들을 가르치는 것은
기본지식이 있는 사람들보다
세배,네배 더 힘이 든 일이다.
승마는 안전 문제때문에 더 그렇다.
다른 교수들 강의로 이어질 때까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다 친구와 내가 미리 가르쳐야했다.
말에 안장을 얻고 준비하는 법과
통통 뛰는 발걸음으로 말을 타는 법을
익숙해지도록 말이다.
그게 나와 내 친구몫이었다.
그 교육이 잘 이뤄지지않았을 경우,
그들의 서툰 마무리와 자세는
그들을 이어 받아
다음 강의를 진행하는 교수들의 특강에도 영향을 미쳐다.
모든 책임은 그 전 타임에서
그들을 가르친 나와 내 친구 몫이 되었다.
수업에 온 일반인 초보들은
말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서
말 위에서 무섭다고 비명을 지르는가 하면,
ㅡ이럴경우 말이 더 놀라서
갑자기 로데오 칠수도 있고
함께 운동하는 옆 말이 놀라서
튀어올라 질주해 버릴수도 있다.ㅡ
내 친구와 내가 설명할 때 딴 짓을 하기 일수였다.
결국 우리는 몇번이고
같은 말을 다시 설명을 해야했다.
그들과 오전 내내
지지고 볶다보면 수업이 끝났고
그들에게 과하게 시달린 나는
내면과 육체의 모든 에너지와
그나마 남아있는 의욕이 바닥으로 나뒹굴었다.
혀가 입 밖으로 나올만큼 힘이 들었다.
우리에게 늘 생초보를 맡기는 교수는
우리가 너무 완벽하게 잘하고 있어서인지
우리가 그들사이에서 죽어나거나 말거나
먼 거리에서 레벨이 높은 팀을 지도하면서
우리쪽 초보 팀을 흘낏흘낏 지켜만 봤다.
그러다가 종종 우리 생초보 팀이
헤메고 있을적에
와서 툭툭 한 마디를 던지며
팥이야 콩이야 간섭을 했다.
나와 내 친구는 언제나 그랬듯이
최대한 공손하게 예의를 갖추어서
친절하게 그들 수업을 도왔고 최선을 다했다.
이래저래 수업이 끝나면
그들은 내 친구와 나를 초죽음으로 만들어 놓고
매우 흡족하게 집으로 돌아갔다.
수업에서는 무조건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우리는 초보들이 말 위에서 비명을 지를때
말이 그 비명소리에 놀라서 초보들을 태우고
마장을 질주해버릴까봐
늘 노심초사 목 뒤에서는 식은 땀이 났다.
그러다보면 그들에게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언제나 스트레스 만땅인 채로 수업이 끝났다.
교수 강의엔 신중하고 성실한 우리 덕분에
낙마사고 한번 일어나지 않았다.
친구와 나는 끝까지
미소를 띄며 수업을 진행했다.
그 해 여름 태풍이 절정을 달리며
강풍과 비폭탄을 뿌리며
제주 전 지역을 휘저어 놓은 날이었다.
뉴스에서는 외출을 삼가하라고
시시각각 속보를 날렸다.
그날도 역시 일반인 강의가 있던 날이었지만
이런 날씨에 강의라니.
교수도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휴강을 할테지.하면서 집에서 여유를 부렸다.
교수의 문자가 도착했다.
태풍입니다만.특강 정상 진행합니다.참고하세요.
(눼에?! 교수님 뭐라고요? 정상수업이라니요. )
나는 폰을 내려다 보면서 내 두 눈을 의심했다.
아니. 장난하나아.
태풍에 지붕이 날아갔네.
항구에 사람이 파도에 쓸려 실종됐네.
뉴스 속보가 난리법석인디.정상수업이라니!
게다가 수업이 진행되는 곳은
중산간 깊은 숲 속에 있는 실습 마장이었다.
아. 이런 엠병할! 쓰불! 씨바꺼!
이런 날 정상수업이라니. 말이 돼?
더군다나 교수 특강이 있는 시간은
태풍이 최고조로 할퀴며 지나갈꺼라
뉴스가 경고하던 시간이었다.
똑같은 내용을 담은
교수의 염병할 문자를 받은
불쌍한 내 친구와
뒤늦게 우리 팀에 합류한 친구에게서
분노 섞인 전화와 카톡이
웨앵 웨앵.까똑 까똑 날아왔다.
친구들은 작당하여 교수에게 대응해
반기를 들자고 입을 모았다.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나
그 교수 성질에 이미 오지게 당하고 있던 터라
우리가 단합하여 그에게 반기를 들었을 경우,
남은 학교 생활내내 평탄치 못하리라는
본능적인 생존 감각이 스멀스멀 살아났다.
교수님.태풍입니다.
저는 위험해서 도저히 갈수 없습니다.
내 친구 둘은 교수에게 그렇게 문자를 보냈고
나는 내 친구 둘을 등에 업고서
니들 몫까지 내가 대신 죽으마.선언하며
교수에게 딱 한문장으로 결의를 담아
문자를 날렸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마침표.
알겠습니다.
그거슨!
태풍 난리법석에도 정상수업을 하겠다는
교수의 똥고집과
이런 날,수업을 한다고 우릴 오라 해?하는,
나와의 오기 대결이었다.
나도 한 오기하는 사람인디.
어.그래!해보자.어디!
태풍이 난리도 아니구마,
당신 고집대로 하다가
제주 뉴스 속보에 한번 떠보자!
교수는 무슨 생각으로 수업을 한다 했을까.
모르긴 해도 정상수업한다. 문자를 보낼 때
알겠습니다. 하고 나에게서 문자가 올줄
예상조차 못했을게 뻔했다.
(근데 왜 수업을 하겠다고 문자를 하냐고.)
그도 내 문자에 당황을 했어야 옳았다고
난 지금도 생각한다.
나는 교수를 태우고 실습마장으로 차를 몰았다.
가는 길에 물이 콸콸거리며 도로로 넘쳐났고
강풍에 부러진 나무들이
도로를 뒹굴며 사방팔방 날아다녔다.
(교수님! 보이십니까.
저 아마존강 같은 도로들과 뒹구는 나무들이!)
그 날의 에피소드가 이제 막,
본론으로 들어가
본격적으로 판이 벌어질 조짐이 보였다.
문자를 받고 씩씩거리며 오기로 집을 나선 나는
여전히 화가 나 있어서
차안에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수도 이렇게 생각하며 침묵한게 분명했다.
(와 씨!오란다고 진짜로 오냐.
젠장! 이젠 진짜. 안갈수도 없고.)
이제 중산간 도로에서 실습마장으로 올라가는
4키로미터 남은 오르막에 진입했다.
도로 옆 진입구간은 지대가 낮은 구간이어서
당시 한라산쪽에서 흘러내린 물들이
강을 이루고 있었고
아주 거센 물살을 일으키며 흘러갔다.
가련한 내 차는
이 날씨에 정상수업을 하겠다는 교수를 태우고
그 물길 속으로 꾸역꾸역 기어들어갔다.
본네트까지 넘실거리는 물길을 헤치며
바퀴가 몇번 굴러가더니
차 어딘가에 물이 들어갔는지
스엘스엘렐렐ㄹ 거리다가
물길 한 가운데서 멈춰버렸다.
(봤지? 봤냐고. 차가 서부렀다고!
이제 어쩔꺼야? 스벌.)
나는 속으로 교수에게 욕을 내 뱉었다.
그러나 당시 내 나이 오십에 임박한 나이.
스승에 대한 윤리관념이 투철하야
육성으로 내 뱉지는 못했다.
차에서 내려보니 물살은
내 무릎위 허벅지까지 차 있었다.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태평양은
내 차 옆구리를 때리며
차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흘러서
길 가 2미터 높이로 푹 꺼진 곳으로
나이아가라 폭포를 만들며 흐르고 있었다.
여어엄병을 하고!
한라산에서 태평양이라니!
한라산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는게 말이 돼?
이제 오도가도 못하는 처지에 놓인 나는
머리가 하애졌고
그는 고집을 피우다 이러한 일을 당하고보니
짜증이 났는지 그동안 감춰둔 발톱을 드러내며
오만잡다한 성질을 부렸다.
그는 물길에서 운전을 제대로 못한 나를 탓하다가
그 다음으로는 말도 안되고
논리에도 맞지않는
여러 이유를 대며
빠르고 느리게
높고 낮게
차암 다양한 방식으로 화를 냈다.
(킁! 재밌네! 웃자. 냐하하핳. 젠장!)
나는 너무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웃음만 나왔다.
깊은 물길 가운데에서 차가 퍼져버렸기 때문에
차는 한라산에서 흘러 내려온
태평양 물에 떠내려갈듯이
물살에 떠밀리며 후떡 후떡거렸다.
렉카차를 불렀다.
(어.그래! 내가 집을 출발할 때부터
렉카차도 출동도 예상했다!자아알한다아!)
렉카차도 태풍을 뚫고 중산간까지 와야했으므로
현장까지 오려면 2시간 가까이 걸린다고 했다.
나와 교수는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피느라
온 몸이 물에 젖어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서
렉카차가 올 때까지 차안에서 달달 떨었다.
(멀쩡한 집 놔두고 이게 뭔짓이여!)
렉카차가 도착할때까지 그가 나에게 쏟아놓은
분노와 발작은 이곳에 다 표현할 길이 없다.
심난했다. 심난했고!
내가 왜 처음에 교수 전화를 받고서
그의 팀에 합류하겠다 했는지 심히 후회했다. 뉘미럴!
사람들이 하지마라. 만류를 할 적에는
다 미리 경험한 통계와 데이타라는 것에 입각하야
하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 말들을 무시하고
그래도 그에게 뭐라도 배워보겠다고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인
순진하고도 멍청한 나를 경멸하며 자책했다.
차안에서 렉카차를 기다리며
교수에게 오지게 욕을 먹고 있던 참에
남편에게 전화가 왔고
우리 아이들에게 전화가 왔다.
교수가 옆에 있었으므로
나는 끓어오르는 욕을 절제하며 점잖게 말했다.
응. 나 여기 실습목장 가는 길인데
물길에 차가 멈췄어.
(여보오!차가 물에 멈췄다고!)
다치지는 않았어.
(믿어져? 내가 안죽고 살아있는게!)
렉카차 기다리는 중이니까 걱정하지 마.
(태풍때매 차가 올수나 있을랑가 모르것다!)
교수님도 옆에 계셔.
(오오냐. 같이 있다. 지금.)
나 혼자 있는거 아니니 걱정마.
그날 내가 남편에게 이렇게 말하며
속으로 얼마나 욕을 해댔는지 상상도 못할꺼다.
나는 남편이 걱정할까봐 그렇게 말하며
집에서 걱정하는 남편을 안심시켰다.
교수에게 난생처음 반기를 들어
집에 있던 내 친구들은
교수 똥고집에 맞짱뜨러 태풍속으로 떠난 내가 걱정되어 안절부절했다.
내가 진짜 뉴스에 나올까봐
제주 뉴스 속보를 보며
내가 나오나 안나오나 걱정을 했다고 했다.
내 친구는 남편에게 상황을 물었고
결국 렉카차를 불렀다는 소식에
내가 전복사고나 대형사고를 당했거니 생각하며
교수를 욕하면서
내가 병원으로 실려갔냐고 물었다.
태풍속 그날 밤에
렉카차는 우리 차를 끌어내려 기를 쓰다가
결국 꺼내지 못하고
물길에 처박힌 차를 두고 그냥 돌아갔다.
렉카차는 가는 길에 나와 교수를
근처 버스정류장에 내려줬다.
버스를 타고보니 버스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긴,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태풍이 할퀴고 긁고 날리고 부서뜨리는
이런 날씨에
버스를 타고 비를 맞은 채
뽈뽈거리며 돌아다닐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우리들 말고는!
교수는 맨 앞자리에 앉고
나는 교수와 저머어어어 멀리 떨어진 곳에
자릴 잡고서 남편이 기다리고 있는
버스터미날까지 갔다.
중간에 교수가 버스에서 내렸고
나는 잠이 든 척
그가 버스에서 내리는 꼴도 뵈기 싫어 모른척했다.
나를 데릴러 나온 남편은
커다란 모포 담요를 가져와
젖은 나를 감싸고 근처 닭죽집으로 들어가
하루 종일 쫄쫄 굶고 비에 젖어 덜덜 떠는 나를 위해
뜨끈한 닭죽을 시켜줬다.
남편은 수천 수만 수억가지 할말을 아끼며
내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만 했다.
남편은 닭죽을 한술 떠서 한 입 삼킬때마다,
깍두기를 한번씩 씹을때마다,
종종 혼잣말로 그렇게 말했다.
아니. 이 태풍에 미쳤어? 수업이라니. 미쳤냐고.
그 사건 이후로
교수는 나와 쿠데타를 일으킨 내 친구들에게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날 내가 친구들과 함께 구테타에 합류했더라면
우리가 학교에 다니는 내내
그에게 무슨 소릴 들었어야 했을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그날 예상치 못한 나의 등판으로 인해,
그날 벌어진 일들을 탓하는 화살이
다시 그에게 되돌아 갔다.
그가 우리를 탓하며 공격할 말은
그가 아무리 뇌를 쥐어짜도 없었을 꺼다.
그거시!
그날 내가 그에게 맞장뜨러 태풍속으로 들어간
나의 큰 그림이었던 것이다.
내 차는 그 다음날 물이 빠지고 바싹 마르자
천만다행으로 엔진이 돌아갔다.
한번만 더, 한라산 태평양속으로 날 데리고 나가기만 해봐라.
욕을 하면서.
그날 에피소드는 내 친구와 내게,
매년 태풍이라는 단어만 들으면
우리 사이에 웃음 벨이 되어서
밥을 먹을 때도 차를 마실 때도
늘 반찬이 되고 디저트가 되었다.
노예계약을 당해 일년이란 세월이 족쇄가 채워진 것처럼, 그 일 이후로도
그 망할 놈의 일반인 대상 프로그램은
몇 달 더 이어졌다.
친구와 나는 교수가 우리 뒤통수를 보며 뭐라하던지
(욕을 하던지,화를 내던지, 발작을 하던지!)
세상에서 존재하는 가즈앙 착한 미소를 지으며
일반인 수강생들을 대했다.
우리가 가진 미소와 친절과 인내력을 총동원하야 우리는 완벽하게 맡은 일을 잘 해냈다.
봄에 시작된 1차 교육은
여름과 가을이 지나 초겨울에 3차까지 완료하며
아아아무 사고 없이 무난하게 잘 진행되었다.
그리고
내가 지식을 얻지못해 멍충이가 될지언정
그 교수에게 뭐라도 배워볼 양으로
다시 그 프로그램 조교를 맡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았다.
내 친구도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