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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리 꺾으러 가게.

by 시안

제주로 이사와 첫 봄을 맞이했을 때,

고사리철이 되자 친구는 나에게 말했다.

우리 고사리 꺾으러 가게!

나의 첫 고사리 필드 등판이었다.


나는 고사리를 먹기만 했었지

들판에서 고사리 순을 따 본 적이 없기에

난 고사리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라. 말했더니

친구는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무사!

너 고사리 어떵 생겼는지 몰라아?

에유. 서울 촌년.


친구는 고사리가 어떵 생겼는지

내가 가르쳐주크라.하고는

새벽 5시에 너의 집으로 가마. 했다.

잠깐만. 새벽 5시라고?

어게!(그래)

어둔 새벽에 무슨 고사리를 따?

고사리가 보이기는 해?

어게!(그래)


다음 날 친구는 정말로 새벽 4시 55분에

우리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고사리 채취 경력 수십 년 차인 내 친구는

고사리 필드에 나갈 복장으로 완전 무장을 했다.


긴 바지 양 끝은 양말에 몰아넣어

고무장화를 신었고

긴소매에는 팔 토시를 하고 장갑을 꼈다.

해를 가릴 수 있는 시골 할망 모자를 쓰고

고사리를 꺾어모아 쑤셔 넣을

주머니가 깊은, 비닐 앞치마를 두른 채

등 뒤에는 가벼운 배낭을 메었다.


제주 전 지역 할망, 아주망들 고사리 패션대로

내 친구는 머리끝에서부터 발 끝까지

완벽한 차림으로 나타났다.


나는 친구의 가르침을 따라

긴 바지는 양말에 쑤셔 넣고 등산화를 신었고

손바닥이 노란 페인트 칠이 된 면장갑을 꼈다.

동그란 등산 모자를 쓰고 검은색 에코가방을

x자로 어깨에 걸쳤다.


집 주변 초원은 고사리가 지천이므로

우리는 새벽 5시에 대문을 빠져나가

십 분 후,

고사리가 사방팔방 자라고 있는

넓은 초원에 도착했다.


초원으로 들어가자마자

가시덤불 속에서

길고 통통한 고사리 하나를 꺾더니

친구는 내게 그걸 들이밀며 말했다.

어이. 서울 촌년.

이게 고사리이.


친구가 내 얼굴에 들이밀며 흔들던 고사리는

어찌나 실했는지 길이는 30센티 정도였고

그냥 보아도 통통하게 살이 오른 것이

아주 연해 보였다.


땡볕이 쪼이는 벌판에서 자라는 고사리는

빼짝 마르고 작아 먹을 게 없으니 따지 말고,

가시덤불이나 풀숲 사이를 들여다보면

실한 고사리들이 많으니 그런 걸 꺾으라 했다.


친구는 나에게 고사리 꺾는 노하우를

짧게 일러주고는

하나 둘 똑똑 고사리를 꺾으며

초원 귀퉁이 가시덤불로 사라졌다.


새벽 5시에 고사리를 끊으러

초원으로 나온 것은 이유가 있었다.

어슴푸레하게 날이 밝아오는 새벽녁,

신기하게도 고사리들이 삐죽삐죽 아주 잘 보였다.


정신없이 고사리를 꺾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초원을 뒤지다 보면 금세 날이 밝았다.

해가 높이 뜨자

푸르스름한 새벽녘엔 잘 보이던 고사리들이

오히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어두운 새벽에는 잘 보이고

해가 쨍하면 오히려 잘 안 보이는 고사리.

신통방통했다.


친구가 말하길,

경헐 땐 이?

무릎을 꿇고 몸을 낮추고이?

고개를 삐딱하게 옆으로 쳐다보민

고사리들이 잘 보이는거어. 했다.


내 친구가 그 노하우를 전할 때

그 방법을 본인만 아는냥

어찌나 잘난 체하며 뻐기며 말하는지

나는 순진한 친구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고사리 초짜였던 나는

몇 번 고사리 필드에 나가보고서

고사리 꺾는 재미에 홀딱 빠져서

친구에게 그렇게 말했다.


고사리 따는 게 중독인가벼.

길가에 있는 가시덤불만 봐도

와. 저기 고사리 많겠다. 생각하고

풀숲만 봐도 저기도 고사리가 있겠지. 생각한다니깐.


고사리를 꺾은 날 밤에

잠자리에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면

천장에 고사리들이 왔다 갔다 했다.


뭔가에 중독된 현상은 다 비슷한 모양이다.

당구도

골프도 (둘 다 평생 한번 안 해본 것이지만)

한번 재미가 들리면

천장에서 공이 왔다 갔다 한다 말하지 않나.


고사리도 그렇다.

그건 실전 고사리 필드에 나가본 사람만이 안다.

며칠간 고사리 따느라 집중하다 보면

고사리 따고 온 그날 밤엔 고사리가 눈에 선하다.

잠자려 누운 천장에서도 고사리 밭을 보게 된다.


아이들이 다니는 중산간 시골 학교엔

고사리 따기 현장 체험 학습 일정이 있었다.

고사리 꺾으로 초원으로 나가는

현장 체험 프로그램인 거다.


아이들은 학교 버스를 타고

학교 근처 초원으로 간 다음

반나절 내내 초원을 뒤지며 고사리를 땄다.


아이들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고사리 순을 따서

미리 준비해 온 지퍼백에 가지런히 담아

집으로 가져왔다.


고사리 현장 체험 학습 가는 날은

소풍 가는 날과 비슷해서

아이들은 엄마가 준비해 준 도시락을

초원에서 친구들과 까먹었다.


매년 봄철이면

아이들 학교에서는 연례행사처럼

고사리를 따러 초원으로 나갔다.


나는 고사리 따기 현장 체험 학습날이 되면

중산간 시골 학교에

내 아이들이 다니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얼마나 시골스럽고 사랑스러운 행사인가.


고사리 철이 되면

제주 지역 8시 뉴스엔

고사리따다가 길을 잃은 실종자 뉴스가 뜬다.


고사리 따라 나간 50대 여성이,

60대 남성이, 70대 여성이, 80대 여성이

ㅇㅇ곶자왈 어디쯤에서 실종이 되었노라.


매년 한 번도 건너뛰지 않고

고사리 따러 나갔다가 실종된 사람들이 있었다.

고사리를 따다 길을 잃어 실종된 사람들.


제주에서 한 번이라도 고사리를 따 본 사람들은

그들이 왜 고사리를 따다 길을 잃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고사리를 딸 땐

초원 바닥이나 풀숲 으슥한 곳

가시덤불 속에만 시선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고사리를 찾아 발길이 닿는 대로

무념무상 따라간다.

고사리가 사람을 홀리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본인이 어느 쯤에 와 있는지

방향감각을 상실한다.

곶자왈 자락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가거나

방대한 초원 어디쯤에서 길을 잃게 되는 거다.


고사리 필드에 나갈 땐

핸드폰 충전을 가득 채워두는 게 좋다.

고사리에 정신이 팔려서

고사리 덤불을 뒤지며 다니다가

길을 잃을 때 핸드폰이 구원할 것이다.


가끔 핸드폰 신호가 안 잡히는

깊은 숲 속으로도 들어갈 수 있으니

정말 조심해야 한다.


드넓은 초원이나 깊은 숲으로 고사리를 따러갈 땐

혼자 가지 말고 꼭 일행과 동행하라고 말한다.

숲이나 초원에서 고사리를 따다 보면

어어어이. 어어!

어어이! 어이. 하는 소리를 듣는다.

그건 일행에게 자기 위치를 알리는 신호다.


풀숲에 가려 서로를 볼 수 없으니

소리를 통해 서로의 위치를 알리는 거다.

길을 잃지 않도록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여전히 고사리 따러갔다가

길을 잃은 사람들 뉴스는 어김없이 있을 줄 안다.

매년 그랬으니까.


혹시나 하여 검색을 해보니

올해도 역시나 벌써부터

고사리를 꺾으러 나갔다가 길을 잃은 사람들

뉴스가 있다.

올해도 어김없다.


3월 말부터 4월 한 달 동안

제주는 비가 많이 온다.

보슬비가 오기도 하고

안개비가 내리기도 하는데

제주 사람들은 그 시기를 고사리 장마라고 한다.


고사리는 비를 맞으면서 쑥쑥 자란다.

고사리는 신기하게도 새벽에 꺾은 자리에

오후에 다시 나가보면

이곳저곳에 고사리가 또 있다.


앞서 나간 사람이

가시덤불을 뒤지며 촘촘하게 꺾었을지라도

뒤따라간 사람이 그 자리를 뒤지면

그 자리에 또 있는 게 고사리다.


올해는 고사리 장마가 오지 않아서

고사리들이 아직 많이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 봄은 날이 좋아 비 오는 날이 드물었다.


고사리 장마가 아직 안 온 모양이다.

비가 지겹도록 내리는 제주 날씨지만

고사리 철에는 안개비나 보슬비가 와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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