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가락이 없는 외국인

서울, 夢. 1화

by 노창범
당신은 어젯밤 어떤 꿈을 꿨나요?
여기, 서울이라는 도시에서 생활하고 꿈을 꾸는 137만 명의 평범한 40대 중 한 명의, 실제 꿨던 이상한 꿈을 기록한 73개의 메모 중 하나를 들려드립니다.
그리고 그런 꿈의 씨앗이 된 현실과 함께...


어느 늦가을의 새벽, 난 꿈속에서, 잠을 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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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은 안개로 가득했고, 탁자 위에 놓인 아날로그 손목시계는 오전 4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난 ‘이 시간에 눈이 떠지는 건 이젠 일상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했다. 꿈속에서도, 꿈의 바깥에서와 같이 너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생각들을 떨치기 위해 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산책을 나섰다. 안개가 자욱한 새벽이었다. 뚜렷한 목적지는 없었다. 그저 발길이 이끄는 대로 걷다 보니 나는 오래전에 문을 닫은 마을 유원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동네에서 유일하게 아이들이 뛰어놀 수 있던 그곳, 지금은 폐허에 가까운 철제 기구들과 동전을 거부하는 자판기, 달과 별에 빛을 양보한 조명들만이 무심하게 방치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그와 ‘다시’ 마주쳤다.

키가 크고, 마치 무거운 비밀을 평생 짊어지고 삶아온 듯 어깨가 잔뜩 앞으로 기운 외국인. 예전에도 분명 몇 번 마주쳤다, 고 꿈속에선 기억했다. 그때마다 그는 내게 말을 걸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나는 매번 모른 체하고 서둘러 지나쳤다. 타인의 문제에 개입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이번엔 달랐다. 그는 내 쪽으로 다가와서 난데없이 공중에 발길질을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의 동남아인이었으니 나는 그가 무예타이 동작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와 눈을 마주치기 싫어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그의 오른발엔 발가락이 없다는 걸 발견했다. 발가락이 있어야 할 그곳은 매끄럽고 조용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태어난 것 같았다. 내 시선이 발을 향하고 있단 걸 안 그는 으르렁거리더니 억지로 균형을 잡으며 재차 내게 발길질을 했고 난 두어 대를 맞았다.


시종일관 난, 어떻게 이 위기를 현명하게 탈출할지에 대한 고민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그는 아무 말 없이 내 옆에 와 섰다. 마치 내가 자신을 알아보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이번엔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강한 느낌이 들었고 나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녹음 기능을 켰다. 이 상황을 증거로 남겨야 한다는 충동 때문이었다. 그는 한 번도 말을 하지 않았다. 혹은 못하는 건지도.



"괜찮으세요?" 오히려 내가 그에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손짓으로 유원지 안쪽의 낡은 벤치를 가리켰다. 나는 그의 손을 따르지 않고 더 멀찍이 떨어져 그가 등을 보이고, 그 벤치에 앉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익숙했다. 분명히 내가 ‘예전에 잃어버렸던 무언가(사람, 감정, 혹은 놓쳐버린 기회)’와 닮아 있었다.


나는 조용히 핸드폰 녹음을 껐다. 더 이상 기록할 필요는 없었다. 그도 나도 서로에게 더 이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 속에서, 세상이 이전과 달라졌다는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난 걸음을 멈추고 문득 유원지를 돌아봤다.

다시 자욱해진 안개 탓인지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가 그곳에 있었는지에 대한 기억도 모호했다. 핸드폰엔 녹음 파일을 재생해 봤지만 바람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그 발가락이 없는 외국인은 사라졌고, 나는 조용히 계단을 올라 집으로 들어섰다.




2024년 5월 3일.

3호선 출근길, 한 중년 남성이 동남아시아계로 보이는 젊은 남자를 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발로 툭툭 건드리고, 욕설까지 섞어가며. 차량 안 서른 명 정도 되는 승객들 중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나 역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