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夢. 27화
새 회사에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내 직속 상사는 여자 상무였다.
화가 많은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감정적으로 과한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때문에 새 회사 적응에 가장 큰 걸림돌은 그녀와 마주 않아 장시간 나누는 격렬한 대화의 시간에 적응하는 것이었다.
그 시절 난 이런 꿈을 꿨다.
[2020년 3월 27일]
편집장 H는 나를 야단치고 있었다. 목소리가 높고 날카로웠다.
"이게 뭐야? 이딴 걸 기사라고 썼어?"
어떤 기사에 대한 비난인지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또 뭔가 그녀의 기준에서 야단맞을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을.
하지만 그렇게 화를 낼 만한 일은 아니라는 반발심이 들었다.
선배 J 기자가 책상 옆에 앉아 있었다.
평소라면 편집장과 맞서거나, 편집장에게서 비롯된 소란함에 불만을 표하거나, 최소한 뭔가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는 꿈속에선 존재감이 없었다. 마치 배경처럼. 아니, 배경보다도 희미했다.
후배 한 명이 근처에 서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 시절 난 시종일관 막내였으니까. 하지만 그는 분명 내 후배였다. 그리고 그는 흥미롭게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쪽팔렸다.
혼자였다면 화를 내고 부당하다고 항의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후배가 보고 있으니 '부끄러움'이라는 감정이 먼저 찾아왔다.
이사 K는 이 상황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엄한 얼굴로 팔짱을 끼고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냥 방관자였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정말 이 정도로 화낼 일은 아닌데.'
부당하다는 느낌만 들었다.
내 발로 걸어서 나간 건지, 순간이동처럼 장면이 바뀐 건지, 그냥 밖이었다.
난 정자 위에 서 있었다.
한국식 정자. 나무로 만든. 기둥 네 개에 지붕 하나. 단청은 없었다. 그냥 나무색 그대로였다.
정자는 연못 한가운데 물 위로 기둥을 박고 서 있었다.
육지와는 연결되지 않았다.
완벽히 혼자였다.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다. 물이 경계가 되어 아무도 여기까지 올 수 없었다.
나는 정자 난간에 기대어 앉았다.
미지근한 바람이 불어오자 낮게 물결이 일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 보니 불현듯 그 생각이 떠올랐다.
'내가 만난 여자 상사들이 모두 같은 캐릭터였어.'
10년 만에 운명처럼(?) 같은 캐릭터의 여자 상사를 만났다. 혹시 한 사람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똑 닮은.
'이건 인생의 패턴과 같은 거야. 앞으로 10년 뒤 또 만나겠군'
혼자 앉아서 조용히 물을 바라보니, 비로소 그런 근거 없는 결론이 '유레카' 같은 깨달음처럼 다가왔다.
물속에서 무언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몸을 숙여 물을 들여다봤다.
악어? 큰 악어가 있었다.
길이가 3미터는 되어 보였다. 초록빛 비늘을 반짝이며 물속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반대편에서 또 다른 거대한 것이 나타났다.
하마? 악어만큼 컸다. 회색 피부를 한.
두 동물은 서로를 발견하더니 곧장 싸우기 시작했다.
물이 사방으로 튀었다.
악어가 입을 벌리고 하마가 뭉툭한 머리를 앞세워 돌진했다. 물속에서 격렬한 움직임. 악어의 꼬리가 솟구치고 물보라가 일었다.
나는 정자에 앉아 그 광경을 신기하게 봤다.
두렵지 않았다. 위험하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진귀한 장면이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걸 글로 쓸 수 있겠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기자의 본능 같은 것.
'악어와 하마의 싸움을 물 위의 정자에서 혼자 지켜본 썰'
재밌는 이야기, 아니 '기사'가 될 것 같았다.
이 이야기면 편집장도 만족하겠지?
싸움은 계속됐다. 하지만 글로 쓰겠다는 생각을 한 후부터 이상하게도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물소리도, 으르렁거리는 소리도 없었다. 마치 무성영화처럼 조용하고 격렬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냈다. 사진을 찍으려고. 하지만 화면에 담기지 않았다. 카메라를 켜면 악어와 하마가 보이지 않았다. 맨눈으로는 보이는데 화면으로는 안 보였다.
'이상하네.'
다시 시도했다. 여러 번. 하지만 소용없었다.
문득 하늘을 봤다.
어? 구름 위에 성이 있었다. 라퓨타 같은. 떠다니는 성. 하얀 돌로 만든. 탑들이 솟아 있고, 깃발이 펄럭이고,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왔다. 아름다웠다.
이 진귀한 풍경을 사진에 담기 위해 나는 다시 핸드폰을 꺼냈다.
강풍에 떠밀린 구름처럼 금세 사라질 것 같아 서둘렀다.
핸드폰의 카메라를 켰다. 화면을 성에 맞췄다.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잡히지 않았다.
성은 계속 움직였다. 구름을 타고 떠다녔다. 내가 화면을 맞추면 성은 벗어났다. 내가 다시 맞추면 또 움직였다.
나는 아등바등했다. 빨리. 빨리. 사라지기 전에. 하지만 핸드폰 화면에는 빈 하늘만 보였다.
이러는 사이 성은 점점 멀어지더니 구름 뒤로 사라졌다.
나는 핸드폰을 내리고 정자 난간에 다시 앉았다.
악어와 하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없었다.
물은 고요했고 하늘에는 빈 구름만 떠 있었다.
허탈해하며 나는 잠에서 깼다.
그날 아침, 지하철 7호선을 타고 출근하고 있었다.
지하철이 청담대교를 건너 막 강남땅에 닿았을 때 철교의 기둥 아래 낯익은 벤치 하나를 발견했다.
막내 기자 시절, 혼자 있고 싶은 시간이면 잠시 나와 앉아있던, 눈에 잘 띄지 않는 벤치였다.
'이게 정자였나?'
새 회사에서도 혼자만의 시간과 장소라는 숨 쉴 틈이 필요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출근 후 자리에서 스케줄러를 펼친 순간 한숨처럼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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