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夢. 28화
그 해 어머니 생신 자리에서 나는 선언을 했다. 어머니의 과거 이야기를 책으로 쓰겠다고.
어머니에게는 형제가 많았고 당신은 그중 첫째 딸이었다.
그 시절에는 여느 집에서나 그랬듯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사내자식들이었고, 그래서 큰 딸인 어머니의 학력은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라는 어른들의 강요로 국민학교 졸업에서 멈춰야 했다.
어머니는 그 사실이 부끄러워 우리 남매들에게도 숨기셨다.
시간이 흘러 셋 다 성인이 됐을 때, 검정고시들을 치르고 그 과정과 이유에 대한 수기를 써 큰 상을 받게 되셨다.
그리고, 그제야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으셨다.
어머니의 살아온 이야기는 아프고 묵직했다.
그래서 책으로 남기고 싶었고, 선언을 한 뒤에는 몇 차례 고향에 내려가 어머니의 이야기를 녹음해 왔다.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집필을 미뤘다.
어느새 12월이 되자 난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 그리고 불안감에 시달렸다.
그해 12월의 어느 밤, 난 이 꿈을 꾸었다.
2020년 12월 29일
그곳은 조선시대의 궁이라고, 꿈속의 나는 상식처럼 알고 있었다.
화려한 기와지붕과 회랑이 펼쳐진 곳이었다.
나는 네댓 명의 궁녀들과 함께 넓은 마당을 청소하고 있었다.
빗자루를 들고. 낙엽을 쓸었고 건물 곳곳의 먼지를 털어냈다.
궁녀들의 얼굴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그녀들은 하얀 치마저고리를 입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조용히, 말없이.
나는 특별한 신분은 아니었다. 그냥 그들 중 하나였다.
작은 연못인데 물이 탁했고 가을인지 채도가 낮은 낙엽들이 수면 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저것도 치워야 합니다."
누군가 내게 말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연못가로 가 긴 장대로 낙엽을 건져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낙엽인 줄 알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하얀 옷이 물속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장대를 더 깊이 넣어 옷에 거는 데 성공했다.
묵직했다. 장대 끝에는 사람이 걸려있었다.
천천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하얀 형체는 궁녀였다. 한때 하얀색이었을, 지금은 낙엽처럼 탁하게 변한 치맛저고리. 물에 젖은 머리카락은 힘없이 얼굴을 덮고 있었고, 그 사이로 보이는 피부는 연못물과 같은 색이었다.
나는 놀라 물러섰다. 그러자 궁녀들이 모여들었다.
"이 사람..."
누군가 말했다.
"얼마 전에 사라진 사람이에요."
그녀들 중 아무도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마치 예상했던 것처럼.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얼굴.
'어무니 같은데.'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코의 모양. 눈썹의 각도. 입술의 두께... 확실히 닮았다.
마음은 그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그 생각을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그저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시간이 앞으로 갔는지, 뒤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장면이 바뀌었다.
나는 산에 있었다.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군데군데 바위가 박힌 산중턱이었다.
크지 않은 봉분 위에 작은 돌무더기가 쌓여있었고 그 앞에는 나무 위패 하나가 서 있었다.
글자가 있었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록 희미했다.
누군가 내 옆에 서 있었다.
"여기에 묻었습니다."
그가 말했다.
"땅을 주었습니다."
"얼마나?"
내가 물었다.
"크진 않습니다."
그는 대답했다.
나는 다시 작은 봉분을 봤다. 처음 봤을 때보다 작아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형님께는..."
그가 덧붙였다.
흘낏 보니 내 옆에 선 사람은 관복을 입은 남자였다. 얼굴은 희미했지만 목소리는 또렷했다.
"다른 게 있습니다."
"뭔데요?"
"그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마치 미안하지만 규칙은 규칙이라는 듯.
나는 묘 앞에 서서 손을 모으고 절을 했다.
하지만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다인가.'
작은 땅. 작은 봉분. 작은 위패.
물속에서 끌어올린 사람. 땅속에 있는 어머니 같았던 사람.
그녀가 남긴 건 정말 이게 전부인가.
바람이 불어 소나무가 흔들리자 누런 송홧가루가 날리며 바람을 따라 사라져 갔다.
나무 위패가 삐걱거렸다.
나는 몸을 돌려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새벽이었다.
물을 한 잔 마신 뒤 거실로 나왔다.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어 있는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 그때는 정말 배우고 싶었지. 하지만 오빠들은..."
노트북의 화면을 켜고 '어머니 녹취_1' 한글파일을 찾아 마우스를 올렸다.
커서가 깜빡였다.
하지만 손가락이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문서를 닫았다.
그 무거운 이야기를 지금 열어보겠다는 마음이 선뜻 들지 않았다.
눈을 감자 꿈속에서 본 물속 궁녀의 모습이 떠올랐고 산 중턱의 작은 무덤이 보였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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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한 내용은 아래 글을 참고해 주세요.
https://brunch.co.kr/@nohchangbum/2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