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 아저씨가 꾸는 걸그룹 꿈

by 노창범

나는 문화 매거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는 매달 새 음악 앨범 발매 소식을 알렸다. 외주로 국내외 뮤지션의 CD 속지를 쓰고 인터뷰도 진행했다. 즉, 다양한 음악을 조금 깊이 접하며 살아왔다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 가장 큰 위안을 준 음악은! 40대에 접어들며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동안 구직활동을 할 때 듣게 된 한 걸그룹의 노래였다.


러블리즈라는 그룹이었다. 어느 날 썩 유쾌하지 않은 면접을 보고 아파트 관리실에 걸린 거울 속의 나를 보며 한탄하고 있을 때였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온 그 그룹의 <Ah-Choo>라는 곡을 듣다 웬일인지 힘이 난다는 기분을 느껴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몇 년 뒤 러블리즈가 해체된 뒤에는 뉴진스, 이어서 르세라핌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그리고 회사의 신규 프로젝트 영업이 녹록지 않던 2024년 어느 날, 급기야 이런 꿈을 꾸었다.



[2024년 4월 7일]


나는 팀장이었다.


꿈속의 사무실은 현실과 미묘하게 달랐다. 책상이 조금 높았고, 창밖 풍경도 어쩐지 비슷하면서 낯설었다.


그곳에서 일을 하는 우리 팀은 세 명이었다.

나, S, 그리고, 카즈하. (어?)


S는 예전 회사에서 같이 일했던 팀원이었다. 그런데 얼굴은 S가 분명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내 입에선 매번 다른 이름이 나왔다. 하지만 그건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세상에! 카즈하가 팀의 막내였다.


긴 생머리와 장난기 어린 눈, 분명 르세라핌의 그 카즈하였다. 믿기지 않아 자꾸만 그녀가 일하는 자리로 힐끔힐끔 시선이 갔다.


"팀장님."


그녀가 내 책상 앞에 있었다. 순간이동처럼 그냥 갑자기.


"저,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노래를 부르는 듯한 목소리, 그런데... 생각나는 일이 없었다.

아니, 사실 팀에 지금 해야 할, 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곧 프로젝트가 들어올 거야."


난 두 팔로 커다란 원을 그리며 말을 이었다.


"큰 거. 아주 큰 프로젝트. 내가 가져올 수 있어."


갑자기 나는 사무실의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핸드폰을 꺼내 카톡으로 K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K 역시 예전에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로 지금은 잘 나가는 글로벌 게임회사의 한국지사에서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일하고 있다.



'K, 요즘 어때?'


답장이 왔다.


'네, 형님. 바쁘네요 ㅎㅎ'


나는 열심히 손가락을 움직였다.


"혹시 거기 우리 팀이 할 만한 일 있으면..."

"아 그게요, 요즘 저희도 다 내부에서 소화하는 분위기라서요."


천장의 형광등이 깜빡였다. 순간 씁쓸한 기분이 되어버렸다.



자리로 돌아왔을 때 내 앞에 개 한 마리가 있었다.

멍멍 짖는, 갈색 중형견이었다.


원래 회사에 이런 개가 있었나? 팀원들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깜빡했나 싶었다.


카즈하1.png


개는 사무실을 배회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카즈하 쪽으로 다가갔다.

천천히, 빠르게, 마치 잘못 편집된 CG처럼, 목표는 분명 카즈하였다.


"위험해!"


난 소리쳤다.

그리고 나는 순간이동처럼 움직여 어느새 카즈하와 개 사이에 서 있었다.


개는 시선을 카즈하에게 둔 채 입으로는 내 팔을 물었다.

이빨이 살을 파고드는 느낌은 분명했는데, 통증은 멀리서 들려오는 종소리처럼 금세 왔다 사라졌다.


"팀장님!"


카즈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개와 눈이 마주쳤다. 그 눈이 슬프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는 사라졌다.



"팀장님, 멋졌어요."


라고 들은 것 같은데 확실하진 않다. 다만, 그런 말을 듣고 싶었던 건 확실하다.


갑자기 난 이 상황이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퇴근 시간이 왔고 난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카즈하가 내 옆에 있었다.


"팔은 괜찮으세요?"

"응."


엘리베이터가 오고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의 거울에 내가 비쳤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40대 중반의, 일이 없는 팀장의 모습이었다.

팔에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팀장님, 다음 프로젝트 정말 들어오는 거예요?"


카즈하가 물었다.



"모르겠어."


카즈하2.png


어떤 짓궂은 힘이 작용해 한 마디를 더 하게 만들었다.


"아마 안 들어올 수도 있어."


다시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즈하가 웃었다. 그 생각에 전염된 듯이.


엘리베이터 문이 채 닫히기 전에 난 잠에서 깼다.




잠에서 깨고 하나의 문장이 머릿속을 자막처럼 지나갔다.


'이런, 꿈속에선 말을 해버렸네?'


사실 며칠 전 K를 찾아갔었다. 점심 식사로 순댓국을 함께 먹고 헤어지기 전까지, 몇 번이나 '일 좀 있어?'라 물으려다 꾹꾹 참았다. 난 참 이런 일에 소질이 없구나 싶었다.


꿈을 꾼 며칠 뒤인 4월 13일,

르세라핌은 '코첼라 밸리 뮤직 앤드 아츠 페스티벌'에서 라이브 실력 논란 이슈가 발생했다.


'그래, 너희도 힘들겠네.'


40대 아저씨는 조용히 걸그룹을 응원했다.



- fin





이전 28화물속에서 건져 올린, 궁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