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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15. 2023

9. 방송에, 거슬리는 내용 나오면 안 돼?

MZ사회생활기록부 > 예비창업자 노윤재편 (9)

12월 7일, On Air


<그녀의 전생(前生)>     


꿈을 꿨어요. 또 성이 나왔어요. 중세 배경의 서양 영화에서 자주 보던, 뾰족한 구조물들이 있는 말 그대로의 성이었어요.      


잠에서 깨어 중세 성을 검색해 봤어요. 중앙에 솟은 구조물인 킵(Keep), 그 옆의 예배당, 안을 둘러싼 내벽(인너월)과 밖의 외벽(커튼월). 제가 꿈에서 보던 그 성은 중세의 성이 맞아요.

    

꿈속, 성의 외벽 안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아요. 그들은 축제를 즐겨요. 형형색색의 마차에 다양한 나라에서 온 화려한 무희들이 춤을 추며 행진을 해요. 활달한 성의 주민들은 때를 놓칠 새라 손님들에게 갖가지 음식을 팔고, 또 돈을 지불하고 싶을 만큼의 진귀한 경험을 제공해요. 아, 손님들도 많아요. 그들 역시 멋지게 차려입고 짝을 이뤄, 혹은 가족과 함께 성 안에서 축제를 즐기고 있어요.

      

꿈속에서 제 시선은 많은 시간, 성의 킵을 향하고 있어요. 그곳에 제가 아는 누군가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그리고 축제의 흥겨운 분위기와 다르게 불안한 마음이 점점 커져요. 왠지.     




저는 내과 의사예요. 사람의 몸을 다뤄요. 과거 어느 책에서 말하길 5달러 정도면 인간의 몸을 만드는 데 필요한 화학물질을 모두 살 수 있다고 하지요. (그때보단 물가가 올랐으니 재료비가 좀 더 비싸졌을 수는 있겠네요.) 틀리지 않아요. 논리적으로는요. 그렇다면 내과 의사라는 제 직업은, ‘5달러의 화학물질 집합체에 이상이 생겨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을 경우 또 다른 화학물질을 투입해 원래의 상태로 되돌리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환자의 치료에 대한 스트레스와 압박감이 심할 때마다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겨우 5달러의 화학물질’로 눈앞의 환자를 규정했습니다. 마음은 편해졌죠. 더 냉정하고 과감하게 그 ‘대상’을 다룰 수가 있잖아요?     

하지만 3개월 전 가까운 지인이 희귀한 병명을 달고 입원을 했고 직접 치료를 하면서 '5달러의 화학물질'이라는 개념에 혼란을 겪었습니다. 여느 환자들을 대할 때보다 더 냉정하기 위해 내 눈앞의 사람에 대해 화학물질 취급을 굳건히 해야 하는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손이 떨리고 눈물이 흐르기도 했습니다. 저는 저를 제어할 수 없었습니다.


다행히 그는 지금 서서히 회복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 관심사는 ‘사람이라는 화학물질 안에 담긴 무언가’로 옮겨갔습니다. 냉정을 깨뜨려 버린 그 존재에 대해 알고 싶어 졌습니다.     



어느 날 TV로 한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어요. 전생을 볼 수 있게 해 준다는 ‘전문가’가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멤버들에게 각자의 전생을 보여줬어요. TV 속에선 그들이 전생이 희화화되어 웃음의 소재로 쓰였지만 저는 그 방송을 보며 웃을 수가 없었어요.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전생이 있다는 건 5달러의 그릇을 옮겨 다닐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있다는 것. 내 일은 단지 '현재의 그릇'을 임시로 고치는 일', 결국 그릇은 깨질 것이고 '영원한 존재'는 다음 그릇으로 옮겨질 뿐.'


이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서 전생이라는 게 실재하는지를 확인하는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그 전문가를 만나기 위해 예약을 하고 몇 달을 기다렸어요. TV에 출연한 덕분에 예약이 엄청 늘었다고 하더라구요.    


뒤, 난 편안한 의자에 누워 전생을 향한 여행을 시작했어요. 




그의 지시에 맞춰 한 점을 응시하며 최면에 빠져드는 암시어를 읊조리고, 눈을 감았어요. 그리고 수면마취와 같은 상태에 들어갔어요.


눈을 떴어요. 제 눈앞에는 성이 있었어요. 아! 꿈에서 보던 그 성이었어요. 그리고 전 기사였어요. 잔다르크와 같은 여자 기사. 저는 성을 지키고 있었어요. 하지만 적은 강했어요. 복장과 무기, 그리고 언어를 봤을 때 그들은 동쪽에서 온 이민족, 아마도 페르시아의 군대 같아요.     


성이 불에 타고 있어요! 전 성의 북쪽에 가족이 있는 걸 알고 있어요. 가족을 구하려면 지금 그곳으로 가야 해요. 하지만 그러면 전 이 성을, 절 따르는 부하들을 지키지 못해요.


결국 전 가족을 택했어요.

가족들을 데리고 성을 빠져나가고, 시간이 흘러 먼발치에서 보이게 된 하얀 성, 나를 따르던 이들은 금세 붉게 물들고 결국 검게 재가 되어갔어요.      




그리고... 결말이 좋지 않았어요.

내가 구출한 ‘가족’이란 존재는 화목하지 않았어요. 서로 싸우고 반목하다 끝내 서로에게 정신적으로, 또 육체적으로 해을 입히며 뿔뿔이 흩어졌어요. 그 모습을 보며 전 제가 지키지 못한 성, 그리고 나를 따르던 이들에 대한 죄책감에 미치도록 괴로웠어요.      


최면에서 깼을 때, 뺨을 따라 눈물 한 방울이 주르륵 흘러내렸어요.

현실 속, 어렸을 때 이혼을 한 부모님이 떠올라서인지, 전생 속, 따르던 이들을 지키지 못한 죄책감 때문이었는지...     


결국 난 그렇게 '영원한 존재'를 인정하게 됐습니다.




어젠 맥주를 사들고 집에 가다 호숫가 벤치에 잠시 앉았어요. 꽤 쌀쌀해졌네요. 하지만 호수 한가운데 있는 놀이공원엔 이 시간에도 여전히 사람이 많아요. 오늘 무슨 이벤트가 있나 봐요. 불꽃놀이가 펼쳐지고 있어요. 호수의 수면 위까지 아슬아슬하게 오가는 시계추 같은 놀이기구에 탄 사람들은 공포가 주는 환희에 소리를 지르고 있어요.


밤, 불꽃의 열기, 섬광, 그 화려함을 반사하며 일렁이는 붉은 수면, 사람들의 쥐어짜는 함성. 그리고 불꽃과 같이 붉은빛을 내고 있는 성, 성?


‘아...’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요? 이 성은 제가 전생에서 본 바로 그 성이었어요!     




이번 생에선 제가 이 성을 지켜야겠어요. 언제 꿈에서와 같이 위기가 닥칠지 모르잖아요?


집에 가서 노트북을 켜고 L공원의 홈페이지에서 연간 회원권을 끊었어요. 주차할인은 필요 없으니 '그린권'으로 25만 원, (무료 주차 12회를 포함한 골드권은 29만 원입니다.) 이 돈이면 저처럼 호수공원 주변에 사는 분들은 안방처럼 자유롭게 놀이공원을 드나들며 스트레스 해소를 있겠죠?

 

내일부터는 퇴근 후 가능하면 매일 이 공원을 순찰할 예정입니다. 산책 겸해서요.

홈페이지를 보니 12월엔 이벤트도 많아요. 당장 이번 주말에는... (후략)  




#매출


* 매출 : 물건 따위를 내다 파는 일 <네이버 국어사전>


윤재는 여기까지 읽다가 눈을 감았다.

마지막 빨간 부분은 L놀이공원의 신민영 대리가 수정해서 보낸 내용이었다.

짧게 한숨을 윤재는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예, 신민영 대리님이죠? 저 동.말.스. 운영자 노윤재입니다. 메일 보고 연락 드렸어요.”


“아 보셨구나. 보내주신 제안서 내부에서 검토를 해봤는데요, 저희 놀이공원의 홍보 효과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대표님 제안대로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아, 감사합니다!”


“세부적인 내용 협의되면 바로 계약서 작성을 진행할 건데요, 음, 사실 검토하면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더라구요."


“예, 뭔가요?”


“그동안 저희 L놀이공원, 종종 방송에 등장을 하던데,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제안을 하니, 사실, 좀 어이없기도 했어요."


"아..."


"그래서 좀 시간이 걸렸죠. 저희는 지역과 상생하는 L사 아니겠어요? 대승적으로, 동.말.스.와 긍정적인 관계를 가져가기로 했어요. 우린 이 호수공원에서 함께 공생하는 관계잖아요?"


"예. 감사합니다..."


"사연 샘플들 보내신 것도 봤구요, 그중에 하나를 골라서 저희가 내용을 약간, 아주 약간만 수정을 했어요. 마침 12월에 있는 이벤트들을 소개하기에 적합한 구성이라서요. 한 번 검토해 보세요. 그게 우리의 첫 협업이 될 거라 기대합니다! 견적은 보내주신 금액의 80% 정도가 적당할 것 같고요."




윤재는 전화를 끊고 다시 한번 사연을 정독했다.

쉽게 결정할 순 없었다. 물론 L사와 손을 잡으면 정기적으로 적잖은 매출이 발생한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동.말.스. 는 그저 L사의 홍보방송이 되어버린다.


딱히 엄청난 소명 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일은 아니지만, 이 일을 진행하면서 지켜왔다고 자신할 수 있는 건, 진정성과 다양성이었다. 그게 깨질 수 있다.


창밖을 봤다. 호수공원에 때 이른 첫눈이 온 날이다. 윤재는 멀리서부터 점점 관리실로 걸어오고 있는 한 사람을 보았다. 첫눈과 함께 첫 출근을 하는 아림이다. 그녀는 창밖을 보고 있던 윤재를 발견하고 밝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윤재는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 방송할 원고들 파일에 <그녀의 전생> '원본'을 넣는다.


'다른 방법이 있겠지.'


문이 열리고 윤재의 첫 직원이자 동업자, 아림이 눈을 털며 등장한다.

윤재는 웃으며 그녀를 맞이했다.


"안녕!"




FAQ


* 결국 윤재는 '다음 기회를 도모하며' 신민영 대리에게 정중히 거절 의사를 밝혔다. 윤재는 L사와 있었던 일을 멘토에게 얘기했다.


윤재 : 그렇게 되긴 했지만 사실, 안정적인 매출의 기회를 놓친 건 아쉬워요.


멘토 : 그랬군요. 이런 걸 말해주고 싶어요. 윌리엄 보몰이라는 경제학자가 있는데요, 경제학의 관점에서 '기업가 정신'을 연구한 분이죠. 그분이 대기업과 스타트업의 차이에 대해 말한 부분이 있어서 들려줄게요.


'대기업은 혁신 초기 단계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혁신 초기 단계는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창의력, 맹목적인 믿음, 얼핏 유망하지 않은 아이디어에 비이성적으로 낭비되는 시간을 특징으로 한다.'


'중소기업은 사회 발전에 도움이 되는 혁신의 대부분을 고안해 내지만 그 혁신을 사회 전반에 보급할 자원을 지니지 못한 경우가 많다.'

- <세계 경제학 필독서 50> 중.


윤재 대표님이 창업을 해 진행하고 있는 '새로운 일'은 거창하게 말하면 혁신이라 할 수 있어요. 하지만 꽃을 피우기 전에 돈 많고 규모가 큰 대기업에 종속이 되어 버리면 일반적인 대기업의 서비스가 되어 버릴 거예요. 사실 그래서 단계별로 스타트업의 성장을 지원하는 정부지원사업이 존재하는 거기도 하죠.


물론 앞으로도 이런 상황, 또 유혹은 종종 존재할 수 있지만 대기업과는 '하청'의 관계가 아닌 '투자'나 '제휴'의 관계를 형성하는 게 좋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동.말.스., 잘 성장해야겠죠? 파이팅입니다!



다음 이야기


'꼴깍!'


박씨 아저씨의 침넘어 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러분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 주시면 제가 제 데뷔곡을 여기서 처음 공개하려구요.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켜서 하늘을 비춰주세요! 하나~ 둘~ 셋!"


윤재와 아영, 그리고 박씨 아저씨는 관리실 창에 붙어서서 호수공원을 내려다 보았다.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는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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