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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21. 2023

10. 방송 듣는 사람, 손 들어주면 안 돼?

MZ사회생활기록부 > 예비창업자 노윤재편 (10)

12월 15일, On Air


<호수공원의 얼음 위에서 접시만 한 구멍을 발견한다면,  그건 바로!>


안녕하세요. 저는 호수 중앙의 놀이공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스물세 살의 남자입니다. 


제 파카 주머니엔 지금도 푸른 표지의 <키위의 반전 없는 삶> 문고판이 있습니다. 이미 완독을 했는데 갈색 파마머리, 녹색 얼굴을 한 키위 아줌마의 '반전 없는 삶'에 대한 여운이 남아 틈틈이 다시 읽고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저 또한) 그녀처럼 신기루 같은 반전을 기대하며 지루한 일상을 살고 있지 않나 그런 안타까움이 가시질 않네요.

     

제가 이렇게 작가 님에게 편지를 보내는 건, 베스트셀러인 <키위의 반전 없는 삶>이란 소설과 연관이 있다고 개인적으로 강한 확신이 드는 호수공원에서의 제 경험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아시다시피 제가 일하고 있는 놀이공원은 인공섬 위에 있습니다. 인공섬은 무한대 기호모양의 호수 중앙(어느 쪽으로든 사업이 무한히 뻗어나가라는 L사 회장님의 기원이 담겨있어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만...)에 자리 잡고 있구요, 같이 일을 하는 친구들은 이 호수가 8 자 모양이라고, ‘우리가 이 호수에서 일을 하는 건 팔자’라는 농담을 하곤 하는데 전 무한대 기호라 생각합니다.      


매일 같이 동네 사람들, 또 데이트를 하는 사람들이 느린 걸음으로 호수를 둘러싼 우레탄 산책로를 걷는 모습을 높은 위치에서 보다 보면 결코 확실한 시작도 끝도 없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반전 없는 행진을 보는 것 같아 ‘답답한 무한대’의 느낌을 떨칠 수 없답니다. <키위의 반전 없는 삶> 초반부에 묘사된 휘슬리어니 마을의 분위기와 흡사하죠.



여하튼, 12월 중순, 호수에는 며칠 동안 맹수에 쫓기는 거대한 영양의 무리와 같은, 본격적인 맹추위가 며칠 동안이나 몰아닥쳤습니다. 덕분에 호수 수면의 삼분의 이 정도가 순식간에 얼어버렸어요. 얼마 뒤, 서서히 추위가 진정되고 종종 포근한 함박눈이 내리면서 다시 호숫가는 산책을 하는 사람, 데이트를 하는 커플들로 밤늦게까지 붐비게 됐구요. 


어느 날, 일이 끝나고 그곳에서 같이 일하는 친구의 생일파티를 했어요. 그리고 저와 친구 하나는 차가 끊겨서 회전목마 옆 대기실에서 간이 난로를 피우고 자게 됐습니다. 친구는 알코올로 벌겋게 달궈진 코를 가늘게 골고 있었고 전 잠이 오지 않아 주머니에 있던 <키위의 반전 없는 삶>을 꺼내 읽기 시작했습니다. 난로에선 가끔 불꽃이 몸을 일으켜 삼바춤을 추는, 꽤 편안한 밤이었죠. (매니저님이 들으실라나요? 안 되는데...)     


그런데 어느 순간 밖이 너무 밝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새벽 두 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죠. 전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갔습니다. 롤러코스터 레일사이로 커다란 달이 보였습니다. 아, 범인은 그 푸르스름한 달빛이었어요. 달에서 푸른 입자들이 8월의 소나기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리고 있었습니다. 전 호수로 향했습니다. 문득 얼음 깔린 호수를 보고 싶었어요. 얼음에 덮인 호수는 마치 북쪽 바다, 빙하와 함께 떠있는 모비딕의 등 같았습니다. 

    

그런데 건너편 호숫가에서 작은 움직임이 보였습니다. 저와 마주 보이는 그곳에선 파마머리의 살집 있는 중년 아줌마가 초록색 잠옷 위에 흰 파카를 입고 서 있었습니다. 



그 아줌마는 하늘색 스케이트를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스케이트의 날이 달빛을 반사해 아주 잠시 차가운 푸른빛을 대기에 흘렸습니다. 그녀는 파카를 벗어놓고 얼어붙은 호수의 수면에 스케이트를 신은 두 발을 사뿐히 내디뎠습니다. 그때 저와 살짝 눈이 마주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지금껏 살아온 중 가장 기분 좋았던 일을 떠올린 듯한 웃음을 짓더니 얼음 위를 ‘날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몸놀림을 보니 분명 그녀는 김연아의 화신이었습니다. 누군가 제 뒤에서 몰래 다가와 이어폰이라도 끼어준 듯, 귓가에 그녀의 동작과 그럴듯하게 맞아떨어지는 경쾌한 음악마저 들리는 듯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는 뛰어올랐습니다. 그건 분명 공중 십 회전이었습니다. 놀이공원에서 일을 하다 보면 빠르게 수를 헤아리는 데 익숙해지거든요. 환상적이었죠. 저는 벌떡 일어나 물개박수라도 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타이밍을 놓쳐버린 건, 그녀가 문득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제가 꿈을 꿨냐구요? 아니에요. 공중에서 열 번의 회전을 마친 그녀는 얼음 위에 분명 사뿐히 착지를 했어요. 하지만 아주 짧은 파괴음이 들렸고 그녀는 여전히 행복에 겨운 표정을 지은 채 제 눈앞에서 그대로 사라졌습니다. 그곳엔 접시 만한 구멍밖에 남질 않았어요. 


아주 잠시 동안 그녀가 사라진 얼음은 연보라 빛으로 물들어있었습니다. 귓가에 어른거리던 음악도 일순 사라지고 스포트라이트처럼 날카롭게 쏟아져 내리던 달빛도 어느샌가 아라비아산 실크처럼 잔잔하게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마치 환풍기 앞에서 푸른 담배연기가 휘청거릴 틈도 없이 빨려 들어가듯 그 하나의 사건은 청결하게 청소되었습니다.     



소리라도 질러야 할 이 상황에서 전 키위 아줌마를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소설 밖으로 펼쳐질 그녀의 삶에 제가 목격한 이 사건을 ‘행복한 결말, 행복한 반전’으로 선사해 주고 싶었던 겁니다. 제가 소설을 읽으면서 받은 느낌이 틀리지 않다면 키위 아줌마도 얼음 속으로 사라진 그 아줌마처럼 지극히 황홀한 미소를 짓고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정신없이 써내려 가다 보니 너무 기나긴 메일이 되겠네요. (이러면 안 뽑힐라나...?) 그럼 동.말.스.에서 제 사연을 들을 수 있기를 기대하며 이만 줄이겠습니다. 감기 조심하시길… 


* 아영님에게도 응원 보냅니다. 전 쉬는 시간에 유튜브로 지난 영상을 봅니다. 바로 제 주변에도 그런 다양한 이야기들, 아니 삶이 존재한다는 게 뭔가, 세상에 대한 기대를 품게 합니다.

    



#성과


* 성과 : 이루어 낸 결실 <네이버 국어사전>

     

윤재는 완료 보고서 안내를 살펴보고 있다. 이제 지원사업 기간도 끝이 보인다. 


처음 이 일을 시작할 때 도대체 '성과를 어떻게 측정할까'에 대한 고민이 컸다. 경험이 부족하다는 건 이런 데서 티가 나는 건가? 결국 시간에 쫓겨 작성한 사업계획서에는 아주 간단히, 정량적, 정성적 목표를 넣었다.



정성

- 전용 온라인 시스템 구축

- 지역 상권과 연계한 스토리텔링 광고 비즈니스 모델 실현

...


정량

- 호수 공원 이용자 방송 청취율 80% 이상

- 사업 진행을 통해 지역에서 활용할 수 있는 스토리 50개 이상 확보

...



사업계획서에 적었던 목표는 사업의 방향성을 흔들리지 않게 해주는 효과가 있었다. 


덕분에 시스템을 구축해 효율적으로 사연을 접수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됐으며 캐릭터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효과적으로 지역 주민들과 커뮤니케이션할 수 있었다. 또한 지역 상권의 스토리형 광고를 통해 매출이 발생하고 있으며  방송을 거듭하면서 가치 있는 스토리들도 접수되면서 지자체에서 활용할 수 있는 지역 기반 스토리도 목표량 이상 확보됐다.


그런데! 청취율 조사는 어떻게 하지?


동.말.스.가 디지털이 메인인 방송이라면 쉽게 데이터를 얻을 수 있겠지만 오프라인 기반의 방송이다. 라디오 청취율 조사처럼 일일이 서베이를 하는 건 효율적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감당하기 힘들다.


"회의 좀 할까?"


윤재는 방송이 끝나고 팀 회의를 소집했다. 팀이래 봤자 윤재와 아영 둘 뿐이지만 일이 끝났는데 퇴근하지 않고 관리실 구석에서 트로트 음악을 흥얼거리며 종이로 뭔가를 접고 있던 박씨 아저씨도 엉겁결에 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우리가 알아내야 하는 건 동.말.스. 방송의 청취율이야. 간단히 말하면 우리가 방송을 하는 시간에 호수공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말.스.를 듣고 있는지 확인을 해야 한다는 거지. 그 시간에 공원에 있는 전체 사람 수와 동.말.스.를  듣고 있는 사람 수를 알면 구할 수 있을 것 같아."


윤재는 진지한 표정으로 얘기했다.


"쉽지 않네. 어떻게 호수공원에 있는 사람들 수를 알 수 있지?"


아영도 쉽지 않은 문제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일단 아이디어를 막 쏟아보자."


 "핸드폰은 다들 가지고 있을 거니 통신사 데이터를 활용하면 어때?"


"시간도... 돈도... 넉넉지 않네."


"알바를 써서 사람 수를 일일이 헤아리면?"


"역시 돈도 그렇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니 쉽지 않지."


"동시에 호수 공원 전체를 사진을 찍어서 '방송을 듣는 듯한 사람의 수'를 헤아린다면?"


"음... 일단 전체 사람의 수는 셀 수 있겠다. 그런데 어떻게 동시에 공원 전체의 사진을 찍지?"


"드론! 나 뮤직비디오 찍을 때 촬영팀이 드론을 여러 대 가지고 있었어. 보통은 임대해서 쓰는데 PD 오빠 취미가 촬영용 드론 수집이더라고."


"너... 뮤직 비디오도 찍었어?"


"데뷔 준비는 다 했다니깐? 막판에 일이 터져서 그렇지! 그 오빠 친해서 비싸게는 안 부를 거야~"


"오케. 그럼 동시에 사람 수 세는 건 해결됐는데... 그럼 방송을 듣는 사람의 수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방송을 듣는 듯한 사람'을 센다는 건 너무 추상적인데?"


한동안 관리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정적을 깬 건 박씨 아저씨였다.


그는 손을 번쩍 들었다.


"예, 아저씨 좋은 생각 있으세요?"


"이렇게 하면 되잖아. 듣는 사람은 손 들어 보라고."


"아..."


"밤이니까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아~"





 

일주일 뒤, 호수공원 상공에는 몇 대의 드론이 떴다.


시간에 맞춰 아영은 준비된 멘트를 시작했다.


"제 콘서트에 와주신... 아니, 방송을 듣는 여러분. 오늘은 얼마나 많은 분들이 이 방송을 듣는지 조사를 하려고 해요. 그동안 동.말.스.는 호수공원에 동네 분들의 이야기를 나누고 기록하는 노력을 해왔어요. 이 이야기들은 다양한 형태로 현재의 이 동네를 대표하는 기록으로 남길 예정이랍니다. 요즘 여러분들이 보내주신 사연의 수가 엄청 많아요. 이런 걸 보면... 이곳에 계신 여러분들은 다 방송을 듣고 있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래도 한 번 확인을 해보려고요."


'꼴깍!'


박씨 아저씨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러분이 뜨거운 호응을 보내 주시면 제가 제 데뷔곡을 여기서 처음 공개하려구요. 그럼 하나 둘 셋, 하면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켜서 하늘을 비춰주세요! 하나~ 둘~ 셋!"


윤재와 아영, 그리고 박씨 아저씨는 관리실 창에 붙어 서서 호수공원을 내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들의 눈앞에는 반딧불 같은 작은 불빛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영은 탄성을 질렀다.


"와~"


뫼비우스의 띠 모양을 한 호수공원의 산책로를 따라 금세 반짝이는 핸드폰 손전등이 은하수처럼 펼쳐졌다.


"여러분 사랑해요~! 감사의 선물로, 빛을 보지 못했던 제 데뷔곡을 불러드릴게요!"


호수공원에서는 마치 콘서트장처럼 팬(?)들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두고 윤재의 동.말.스.도 이렇게 끝을 향하고  있었다.


윤재는 한숨처럼 조용히 한마디를 내어 놓았다.



'결국 이어폰을 이겼네. 적어도 우리 동네에선.'



* 드론으로 촬영한 호수공원 전체의 모습을 담은 사진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윤재는 빙판이 된 호수의 좌측 편, 한가운데서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자연적으로 발생하긴 힘든 위치였다. 구멍의 정체에 대해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윤제는 퍼뜩 그 이야기를 떠올렸다.


'이거, 키위 아줌마?'

 


FAQ


윤재 : 멘토링도 이번이 마지막이네요. 1년 간 감사했습니다. 


멘토 : 예, 윤재 씨는 어땠나요? 청취율 조사도 잘 끝났다고 들었는데, 이제 1년 동안 자신이 사업을 했다는 실감이 나나요?


윤재 : 예. 참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특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뜻깊은 여정이었던 것 같아요. 그나저나 다음 달이면 성과 보고가 있는데 잘 될는지 모르겠네요.


멘토 : 지금 와서 뭔가를 하기보단 1년 동안 해 온 걸 정리하는 시간이라 보면 됩니다. 정부에서는 1차적으로 사업계획서를 기준으로 선정을 한 거잖아요? 확정된 사업계획서는 일종의 약속이고, 평가는 그 약속을 잘 지켰는지를 보는 거예요. 

특히 소중한 세금으로 마련된 정부기금이 원래의 용도로 제대로 쓰였는지, 지원 기간 동안 기술과 서비스를 성장시켰고 이를 통해 매출을 발생시켰는지, 고용을 창출했는지, 투자를 받아 성장의 발판을 마련했는지 등등, 한 마디로 스타트업이 정부, 혹은 국민들의 지원 덕분에 다음 단계로 무사히 잘 성장했는지를 평가하는 거죠. 


윤재 : 다행히 사업계획서에 적은 대로 약속은 지킬 수 있었네요. 덕분입니다.


멘토 : 윤재 씨가 열심히 달린 덕분이죠. 다음 달에는 성과에 대한 다양한 자료들을 제출하고, 보고서를 작성해 발표하게 될 거예요. 그 시간은 누군가에겐 축제고, 어떤 이들에겐 쓰라린 시간일 겁니다. OT때 봤던 스타트업들을 성과 보고회에선 다시 못 보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그럴 땐 정말 씁쓸해요.




다음 이야기


동.말.스. 홍보 영상을 보던 관계자와 여러 스타트업 대표들은 종종 웃음을 터뜨렸다. 

바깥 날씨만큼이나 차갑고 사무적인 실내의 분위기를 영상 속 머머리 스튜디오 좌담회의 '센' 수다는 4월 봄바람처럼 서서히 녹여갔다.


"시간 다 됐습니다."


윤재는 당황했다. 그리고 허둥지둥 노트북을 손대며 말했다.


"잠시만요! 마지막 장면만 보여 드릴게요!"


스킵, 스킵. 그리고 영상의 마지막 장면엔 여고생 수아의 술... 아니 분위기에 취한 발그레한 얼굴이 떠올랐다. 수아는 이렇게 외치고 있었다.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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