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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창범 Oct 12. 2023

8. 걸그룹 멤버, 채용하면 안 돼?

MZ사회생활기록부 > 예비창업자 노윤재편 (8)

11월 20일, On Air


<고백>

   

드디어 2학기 기말고사가 막을 내렸습니다. 펜을 놓고 강의실 문을 나서니 그제야 정신이 들었어요. 며칠 동안 자취방에 안 가고 학교 근처 친구집과 도서관을 오가며 지냈습니다. 


그동안에도 방송은 잘하셨죠? 저도 운동하며, 귀가하며 종종 듣고 있습니다. 전 호수공원 근처에서 자취를 하며 신촌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는 예비역 복학생입니다.    


그날, 시험도 끝났겠다 왠지 허탈한 기분에 머뭇거리며 여기저기 기웃거렸는데 아는 얼굴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실, 복학 후 첫 학기라 아는 애들은 별로 없어요. 쌀쌀한 날이었습니다.

     

교문 옆 계단에 앉아 커다란 천에 프린트된 학교 홍보모델을 훔쳐봤습니다. 교양 수업 때 몇 번 마주친 아이입니다. 바람을 맞아 천이 펄럭이니 그녀는 웃기도, 인상을 쓰기도 해요. 나에게요. 


바람이 잦아들고 그녀는 다시 평면의 현실이 됐습니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습니다.      


쌀쌀한 늦가을이라 그런지, 또 복학 후 첫 시험을 치르느라 긴장했던 게 풀려서 그런지 좀 우울했습니다. 이런 날은 혼술도 좋겠다 생각했어요. 학교 앞 부산집에 갔습니다. 그리고 주머니를 털어 소주 한 병과 찌개 하나를 시켰습니다. 이곳은 혼술을 해도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테이블 다섯에 셋은 저 같은 혼술족이거든요. 한 잔 한 잔, 소주가 내 몸으로 들어가며 전 기억할 수 없을 생각에 잠겼어요. 그러다 퍼뜩, 막차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걸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지하철에 탔어요. 자리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옆에 앉은 사람은 취한 것 같았습니다. 평소 같으면 그 자리에 앉지 않았겠지만 그날은 많이 피곤해 털썩 그의 옆에 앉았습니다. 


역을 지날 때마다 복잡하던 전철이 점점 속을 비워갔습니다. 그런데 상왕십리쯤이었나? 그가 혼잣말을 시작했습니다. 핸드폰 배터리도 간당간당한 해 잠시 꺼놓고 멍하니 있자니 그의 중얼거림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은 저에게(혹은 누구든 옆에 앉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했습니다.

     

"자꾸 그 아저씨 얼굴이 떠올라. 난 그냥 술 마시고 싶었을 뿐이야. 그년이 날 버려서 그랬잖아. 포장마차에서 소주 한 병 시켜놓고 마시는데 옆에서 그 아저씨, 더럽게 시끄러운 거야. 나잇살이나 처먹은 자식이. 난 그 자식을 끌고 갔어. 다 그년 때문이야. 때리니까 피나 나더라? 그래서 립스틱으로 떡칠한 그년 얼굴이 생각났어. 그래서 때리고 때리고 또 때리고, 더 빨개지고 더더 빨개지고.”     



종점인 성수에 접어든다는 안내방송이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습니다. 회전목마처럼 끊임없이 돌 것 같던 순환선인 2호선도 마지막은 존재했습니다. 

     

“얼마나 지났지? 정신 차리니 멀겋게 눈뜬 그 아저씨가 누워있었어. 튀었어. 집에 와 몸에 걸치고 있던 거 다 벗어서 없애버렸어. 그리고 하루 동안 알몸으로 죽은 듯 지냈지. 그래 다 그년 때문이야. 오늘은 그년이 보고 싶어서 회사에 찾아가 숨어서 기다렸는데... 안 오네...”     


진짜인지 망상인지 모를 그의 고백에 전 소름 끼쳤습니다. 지하철이 성수에 도착해 문이 열리자 전 빠른 걸음으로 빠져나왔어요. 그는 여전히 자리에 널브러져 있었고 잠시 후 지하철은 소등이 되었어요. 


언젠가 연극에서 본 모노드라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그의 독백이 끝나고 지하철이라는 무대는 점멸, 막을 내렸습니다.


저는 돌아보지 않고 그 자리를 빠져나왔습니다.




저는 성수역에서 자취방이 있는 호수 옆 동네까지 한참을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호수 옆 벤치에 앉아 잠시 숨을 돌렸습니다. 놀이공원도 멈추고 스피커도 조용했습니다. 그래도 아직 늦은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좀 있어서 다행이었습니다. 그때 저에겐 사람 '사는' 곳이란 느낌이 간절했거든요. 

    

자취방이 있는 빌라 건물에 도착했는데 늦은 시간에도 좀 웅성거리는 느낌이었어요. 주인집에 사람들이 있어요. 그런데... 까만 옷을 입은 사람이 눈에 띄어요. 주인아주머니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요. 그리고 계단을 오르는데 짐들 옆에 쓰러져 있는 영정 사진이 보였습니다. 주인아저씨였습니다.

      

지하철에서 들은 그 남자의 독백, 그리고 내 곁에 찾아온 죽음. 둘은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둘을 잇는 매개체는 저뿐이었습니다.     


그날 방에 올라와 바로 적는 사연입니다. 이런 이야기를 왜 여기에 보내는지, 좀 안 어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은 듭니다만... '우리 동네에서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라 생각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아저씨의 명복을 빌어주세요.          


내일 아주머니에게 물어보려 합니다. 주인아저씨가 그렇게 허무하게 돌아가시진 않았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채용


* 채용 : 사람을 골라서 씀 <네이버 국어사전>

     

가을에 접어들면서 접수되는 사연이 부쩍 늘었다. 호수공원에 동.말.스.가 자리를 잡았다는 뜻일까? 그냥 감성적인 계절 덕분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덩달아 일도 늘었다. 광고나 제휴 문의도 종종 들어오고 있고, 매력적인 콘텐츠가 지역의 경계를 넘을 수 있도록, 또 부가적인 수익을 거둘 수 있도록 실시간 라이브를 시도해 보고 싶었다. 


어느새 윤재의 사업은 작게나마 성장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윤재에게도 함께 이가 필요했다.


채용 플랫폼에 공고를 올릴까 생각도 해봤지만 대형 플랫폼에 윤재의 조그만 회사의 채용 공고를 올려봤자 눈여겨볼 이는 없을 것이다. 요즘은 스타트업을 타깃으로 하는 채용 플랫폼들도 있지만 채용할 경우 고용하는 회사로부터 적잖은 수수료를 걷어간다. 그리고 그 일부는 채용 확정자에게 취업축하금이라며 건네준다. 윤재는 이 프로세스가 '회사의 일'을 돈으로 거래하는 것 같아 썩 내키지 않았다. 


결국 지금 시점에는 자신이 아는 이들 중에서 뽑는 것, 혹은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추천을 받는 방법이 현실적이었다.




윤재는 방송이 끝난 관리실에 앉아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된 전화번호부의 끝에서 끝으로 몇 차례 오르내렸다. 함께 일할 이를 물색한다는 명확한 목표의식을 갖고 보니 마땅한 사람이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그러다 '유아림'이라는 이름에서 손끝이 머물렀다. 그녀는 제대 후, 음악을 하던 군대 후임으로부터 소개받은 걸그룹, 아니 예비 걸그룹 멤버였다.   


아직 데뷔를 앞두고 있던 6인조 걸그룹의 리더, 동그란 눈에 동그란 얼굴을 한, 조그만 맏언니. 대외적인 나이보다 실제 나이는 세 살이 많아 윤재와 동갑이었다. 낮춘 나이임에도 아이돌로선 부담스러운 나이였다. 그만큼 그녀의 연습생 생활은 길었고 소속사는 규모가 작았다.


만날 때마다 그녀는 식사를 하지 않았다. 살이 찔까 봐 먹을 수 없다고 했다. 세 번째 만났을 때 윤재는 앙상한 그녀의 손목을 끌고 패스트푸드점에 갔다. 그리고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버거와 치킨 몇 조각을 그녀 앞에 차려 놓았다. 그녀는 한참 동안 물끄러미 자기 앞의 음식들을 보다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손은 보통 사람보다 빠른 속도로 치킨과 입을 오갔다.


패스트푸드점을 나온 아림은 작별 인사도 없이 근처에 있는 연습실로 뛰어갔다. 윤재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때의 감정은 뭐랄까? 안타까움? 슬픔? 잘 되기를 바라는 응원의 마음? 적어도 애정 같은 건 아니었다고 윤재는 기억했다.




그 뒤로 아림에게 연락하진 못했다. 종종 데뷔 소식이 있는지 검색을 해봤지만 눈에 띄진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목격한 적이 있다. 두어 달 전, 저녁 약속 때문에 들른 압구정동 거리에서 윤재는 아림을 발견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 그녀는 두셋의 일행과 함께 활짝 웃으며 한 패스트 패션 브랜드 매장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행복해 보였다.


그 후 며칠 뒤, 아림을 소개해 줬던 후임에게 연락을 해 그녀의 안부를 물었다. 팀은 이미 해체됐다고 했다. 그룹의 쌍둥이 멤버가 대표로부터 몹쓸 짓을 당해왔고 아림이 참지 못하고 대표를 경찰에 신고하면서 그녀 역시 데뷔도 하지 못한 채 연예계를 떠나야 했다.   


'아림이라면 딱이겠는데...'


그녀는 당차고 쾌활했으며 센스도 있었다. 그리고 밝은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윤재는 그녀에게 톡을 보냈다.      


'안녕 오랜만이지? 나 윤재야. 소식은 들었어. 괜찮지? 아 연락한 이유는, 스카우트 제안을 하려고. 나 소박하게 방송을 하고 있거든. 일종의 라디오 같은 거야. 같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데 네가 딱이라는 생각이 드네? 네가 맘껏 먹고, 뛰고, 소리 지르며 할 수 있는 일이야. 생각 있으면 한 번 연락 줘. 부담은 갖지 말고.'


한참 동안 핸드폰을 지켜보던 윤재는 피식 웃으며 주섬주섬 짐을 챙겼다. 그 짧은 만남이 아림에게는 어느 정도의 인연이라 생각될지 윤재는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험 상 사람과 사람이 만났을 때, 각자가 느끼는 인연의 밀도가 저울 위에서 정확히 균형을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까똑’      


윤재가 관리실의 문을 나설 때 핸드폰이 울렸다. 윤재는 멈칫했지만 금세 하던 일, 즉 '불을 끄고 문을 잠근 뒤, 야간 개장 중인 놀이공원의 소음과 동행해 호수 공원을 따라 집으로 향하는 일'을 이어나갔다.      


‘시간을 끌면 메시지의 내용이 좀 더 무르익어 내가 바라는 텍스트로 바뀌지 않을까?’     


그날 윤재의 퇴근길은 ‘이상한 나라의 솜사탕’처럼 설렜다.        



FAQ


* 윤재는 사람을 뽑아야겠다고 결심한 뒤 먼저 멘토님에게 '사람을 채용하는 일'에 대해 상의를 했다.


윤재 : 멘토님, 이젠 도저히 혼자 못하겠어요. 그래서 사람을 뽑으려구요. 다행히 매출도 오르고 있고 정부지원사업 예산에서 사용할 수 있는 지원금도 있어요. 그런데 과연 사람들이 이런 작은 스타트업으로 올는지...


멘토 : 음... 그 문제만큼은 제가 시원하게 답을 못 드리겠네요. 오래 함께할 능력 있는 직원을 채용하는 건 어쩌면 초기 스타트업에겐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일 거예요. 


겸임 교수를 하고 있는 한 대표님은 함께하고 싶은 학생이 있으면 한 학기 동안 열심히 공을 들인다고 해요. 자기 회사에 오라고. 그래도 그쪽은 아주 훌륭한 상황이죠. 다른 대표님은 동업자 두 명과 함께 유통 쪽 스타트업을 했는데 직원을 한 명 뽑으면 워크숍을 가기로 동업자들과 약속했대요. 그리고 창업하고 3년이 지나서야 첫 워크숍을 갈 수 있었다고 해요. 직원을 뽑는 데 2년이 걸린 거예요.  


제일 좋은 건 창업하기 전 함께할 사람을 확보하는 거예요. 동업도 좋고 함께할 거라는 전제 하에 일부 일을 지속적으로 맡기는 형태도 좋죠. 사업이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확인해도 필요할 때 뽑는 건 쉽지 않거든요.


그래도 뭐 결국 이것도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하나의 인연 아닐까요? 어떡해서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으니 여러모로 시도를 해보시길 바랍니다. 



다음 이야기


윤재는 여기까지 읽다가 눈을 감았다.마지막 빨간 부분은 L놀이공원의 신민영 대리가 수정해서 보낸 내용이었다.

짧게 한숨을 쉰 윤재는 메일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세부적인 내용 협의되면 바로 계약서 작성을 진행할 건데요, 음, 사실 검토하면서 한 가지 걸리는 게 있더라구요."


“예, 뭔가요?”


“그동안 저희 L놀이공원, 종종 방송에 등장을 하던데, 주로 부정적인 이미지로 묘사되더라구요. 그런데 이런 제안을 하니, 사실, 좀 어이없기도 했어요."


"아..."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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