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이 아닌, 잠시 머무는 공간
미얀마 수도 양곤에 가면 순환열차라는 것이 있다. 종점에서 출발해 다시 종점으로 돌아오는, 말 그대로 양곤 구석구석을 둥그레 순환하는 열차. 오늘 하루는 내 마음을 천천히 순환하고자 역으로 향했다.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테니 중간에 길을 잃을 걱정도 없었다. 그저 바람을 타고 풍경을 느끼는데만 집중하기로 하고 발걸음을 향했다.
양곤역은 입구부터 주변의 모든 풍경과 사람들의 모습들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화려한 역사 대신 낡은 건물은 정겨웠고, 사람은 많았지만 북적이고 시끄러울 것 같은 예상과 달리 모두들 조용히 기차를 기다리는 모습에서 평온함이 느껴졌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발걸음에는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또한 열차를 탈 때는 무리한 탑승보다는 서로서로 양보를 하고 간혹 무거운 보따리는 젊은 청년들이 들어주기도 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들의 순박함에 빠져듬과 동시에 옛 기억들이 떠 올랐다.
미취학 아동 시절, 지금은 복합문화공간이 되어버린 구 서울역에서, 외할머니는 늘 쓰리꾼(소매치기)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지만, 대게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길을 물으면 친절하게 알려주었고, 열차를 타면 앉아있던 사람들은 일어나서 외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해주곤 했다. 그리고 나는 외할머니 무릎 위에 같이 앉아서 63 빌딩을 구경했다.
한 번은 열차를 내린 후 길을 잘못 들러 모르는 집을 찾아간 적이 있었는데, 문을 열어 준 그러니까 나와 외할머니를 처음 본 아주머니는 말씀하셨다.
" 뭐 온 김에 잠깐, 앉았다 가세요 ~"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히지 않는 한마디였다. 그때는 그 말이 어리둥절하기도 했지만, 이곳에 있어보니, 그 시절 그 마음이 조금은 느껴진다. 그렇게 나도 모르게 이곳에 정이 들기 시작했다.
마치 이곳이 내가 어릴 적 기억하는 서울역과도 같아서.
혹시, 이 열차가 맞아요?
티켓을 구매할 때 설명도 들었지만, 여기저기 2 ~ 3번 정도를 더 물어본 끝에 마음 편하게 탑승할 수 있었다. 이내 출발하는 열차. 다행히, 내가 탄 열차가 맞는 듯했다. 그리고 정차할 때마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게다가 각종 주전부리를 파는 상인들도 제법 눈에 띄었는데 처음에 귤 바구니를 들고 탄 두 청년들은 제법 많은 귤을 팔았다.
순환 열차라서 '경제가 순환하는구나 싶었다' 그렇게 청년들은 내리고, 곧이어 똑같이 귤 바구니를 들고 탑승한 아저씨는 어긋난 타이밍에 단 한 개의 귤도 팔지 못 했다. "나라도 하나 사 드릴까?" 싶었지만,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아니, 그렇게 먹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묵묵히 창 밖을 바라보는 아저씨의 뒷모습에서 삶의 고단함이 느껴졌다. 어릴 적 내가 기억하는 파란색 열차에는 어린아이들의 앵벌이부터 구걸을 하는 어르신들. 그리고 외면하기에는 꽤나 신기한 물건을 판매하는 잡상인들까지 다른 듯 비슷했다. 외할머니는 잡상인들의 물건을 제법 구매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오백 원짜리 동전이나 천 원짜리 지폐를 하나 쥐어주며, 할아버지 모자에 넣어주고 오라고 하셨다.
그 시절은 그랬다. 서로 어려웠던 시기를 겪었기에, 서로 돕는 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시절.
그렇게 추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여행 속. 이곳 사람들 보는 재미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느리게 달리는 기차. 그리고 창문이 없는 열차 밖에서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까지도.
어쩌면, 작디작은 이 순환 열차의 하루는, '양곤의 하루'를 축소해서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