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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동행

가벼운 시작, 깊은 끌림

by 타이완짹슨

여행은 크게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혼자 떠나는 여행과, 함께 떠나는 여행' 물론 많은 사람들이 '여행은 함께 떠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더 나아가 "혼자 가서 뭐 해?"라는 반응이 우세할 것도 조심스레 예측해 본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니 말이다. 하지만 현실 속 내 여행의 대부분은 혼자였다.


처음에는 의도치 않게 혼자 떠나기는 했지만 여행지에서 스치 듯 시작된 우연이 차곡차곡 쌓이고 겹쳐 인연으로 이어지는 그런 예기치 못 한 상황들을 내심 즐기기 시작했다. 그것은 삶을 살아가면서 힘이 들 때 가끔 꺼내볼 수 있는 흑백사진 같은 것이었다.


그러한 경험들이 몇 번 쌓이기 시작하니 언제부턴가 방문하는 국가에 대한 호기심보다 그곳에서 만나게 될 누군지도 모를 사람들에 대한 기대감이 더 큰 적도 있었다. 다시 말해서 여행의 즐거움을 사람에게서 찾기 시작한 것이었다. 한 번은 로마에서였다. 한인 숙소에서 1박을 했는데, 그게 인연이 되어 가끔 연락을 하고 지내기도 하고 내가 대만에 있을 때 여행도 오면서, 잊을만하면? 만나고는 했다. 흔히 말하는 가늘고 긴 인연이었다. 그러다 결혼식 사회자로 연락을 받기까지 했으니 "혼자 여행도 나쁘지 않아"라는 나름의 의미를 충분히 건져 낸 셈이었다.




그러나 그때와 지금의 여행 문화는 많이 달라진 것 같다. 아니면, 내가 달라진 문화에 적응을 못 하고 "글쎄, 라떼는 말이야~라고 말하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우려에 휩싸일 때도 있다.


그런데, 불과 5년 전 2020년. 코로나 직전 미얀마 껄로(Kalaw)로 여행을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당시 한국 나이로도 30대 중반을 넘어가는 나이였으니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띠동갑 차이가 나는 '동행者' 들은 나 홀로 한국인이 신경 쓰였는지 걷는 내내 끊임없이 말을 걸어주었다. 이따금, 중간중간 머리를 비우고 그냥 걷고 싶은데..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들의 호의는 고마울 따름이었고 우린 그 누구보다 잊지 못할 시간을 보냈다.

<왼쪽부터 파리 커플과 리옹에서 온 세 친구, 그리고 나까지 총 6명은 1박 2일 내내 함께 걸었다>

고작 이 낯선 곳의 들판을 한번 걸어보겠다는 이유 하나로 '동쪽 한반도에서, 서쪽 유럽에서, 그리고 태국에서. 다른 날짜에 다른 비행기까지 단 하나도 일치하는 것 없었지만, 밤새 버스를 타고 같은 날, 이름도 낯선 작디작은 동네로 모여들었다.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내미는 손길과, 건네는 손길

반대로 여행 중 내가 먼저 손길을 내민 적도 있었다.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기차를 타고 마라케시에 도착했을 때였는데, 역을 나오니 도저히 어디로 가야 할지 감이 오질 않았다. 거리에 수많은 택시들이 보였지만 나는 그 손길들을 다 뿌리친 채. 무작정 걸었다. 그러다 저 멀리 누가 봐도 배낭 여행객으로 보이는 어느 키 큰 백인 청년이 보여서 대뜸 뛰어가 자연스레 인사를 건넸다.

이유는, 왠지 이 친구만 따라가면 무슨 길이든 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는 나의 인사에 살짝 당황하면서도 미소를 잃지 않았고, 프랑스에서 웨이터로 일 하면서 여행 경비를 모아 여행 중이라고 했다. (역시 내 예감이 맞았어!)

그렇게 30여분을 걸었을까? 별 탈 없이 여행자들의 공간으로 잘 도착할 수 있었다. 덩달아 같은 숙소까지 예약을 끝내 버렸다. 보통 '인연의 가벼운 시작점'이 이런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경우가 달콤하게만 끝나지는 않는다. 각자 방에서 개인 정비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슬슬 땅꺼미가 깔리고 있었고 밤하늘은 이곳이 모로코임을 여전히 알려주는 듯했다. 그리고 때 마침 그 또한 밖으로 나와서 자연스레 마주쳤다. 그리고 그는 영어로 Bla Bla 하는데, 내가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으니, 아래와 같이 말했다.


Don't wait for me.

그가 방금 내게 한 말들을 다시 복기해 봤다. "동행하면서 길도 찾았고, 숙소도 예약을 했는데..."라는 의미는 편안한 수다가 아니라, 내가 널 위해 할 수 있는 호의를 다 베푼 것 같다.라는 '일종의 거절의 의미' 였던 것이었다. 아마도 직설적으로 말하는 게 미안해서 애써 돌려 말했던 것 같다. 길을 헤매는 나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도 그리고 나의 인사를 해맑게 받아 주었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거기까지가 그의 마음이었을지 모르겠다. 순간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면서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동행이란 그런 것이다. '흘린 물 몇 방울에도 쉽사리 젖어버리는 두루마리 휴지 같은 존재' 그래서 작은 마찰에도 툭 끊어져 버리는 아슬아슬한 관계.

하지만 가끔은 가늘게 펼치다 보면 계속 이어지다 못해, 그 끝이 눈으로는 도저히 보이지 않는 실타래 같은 존재도 있다. 그러니까 물에 젖은 두루마리 휴지처럼 끝나더라도 속상하거나 서운할 필요는 없다. 어딘가에는 실타래 같은 사람들도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애써 모든 것을 미리 판단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때로는 물에 젖어 도저히 쓸 수 없을 것 같은 휴지도 충분히 건조의 시간을 가지면 어느새 튼튼한 실타래가 되어 끊임없이 이어져 나올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러니까 그저 순간순간에 충실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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