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관계 속, 새로운 관점의 시작
달리 선택지가 없어서 시작하게 되었던 나 홀로 여행. 그러나 선택지 없던 선택이 도화선이 되어, 혼자서 짐을 꾸린 지도 10년이 훌쩍 넘어 버렸다. 강산이 한번 정도는 바뀐다는 그 시간 동안에도 내 여행 습관은 크게 바뀌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가끔은 그럴 때가 찾아온다. 같이 떠날 수 있는 기회. 그리고 그 기회는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로부터 시작되었다.
아, 회사 생활 못 해 먹겠네. 여행이나 가고 싶다.
그럼, 이번에 같이 한번 갈까?
그러까? 그럼, 그러자!
그저, 세상에 불만이 많은 15살 소년들로 빙의한 두 남자. '대만 사는 부산 남자'와 '대구를 떠나본 적 없는 대구 토박이'가 무심코 던진 불씨가 사춘기 아재들 마음에 불을 질렀고 이는 결국 현실이 되었다. 어쩌면, 사고를 쳤다고 해야 할까? 무슨 일이 생길 줄 상상도 못 한 채. 항공권 결재부터 끝냈고, 그렇게 우리는 평소보다 연락할 일이 많아졌다.
덤 앤 더머들의 '코타키나발루 行'
지금도 가끔은 그때의 결정에 의문을 품고는 한다. "왜?, 굳이?"라는 질문에 싱거운 변명을 하자면 단순하게도 3대 석양이라는 단어에 꽂혀서였다.
일상으로 비유하자면 '남자 둘이서 대학로에서 연극을 보고, 아웃백에서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스티커 사진으로 마무리를 하는 일정'이라고 할까?
허나, 이러한 선택 뒤에는 마음이 너무 지쳐서 어디든 좋으니 그저 '같이' 떠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냥, 벽에 세계지도를 붙여 놓고 다트를 던져서 걸리는 대로 떠나는 그런 여행처럼.
1주일도 안 되는 짧은 일정. 하지만 함께 떠난다는 사실은 두 남자의 심장을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했다. 어쩌면, 전역을 앞둔 말년 병장들처럼 설렘으로 날짜만 세면서 하루하루를 버티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대구 토박이는 처음부터 모든 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대만까지 비행기를 한번 더 타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고, 타오위안 공항에서 조우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여정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감이 나지 않는 건 늘 혼자였기 때문이었을까? 익숙한 관계였지만 옆자리에 앉아있는 모습이 조금은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낯선 기분이 익숙해지던 찰나 비행기 창 밖으로 울창한 산림들이 보였다.
시내에서 바라본 코타키나발루는 관광특구라는 느낌이 강했다. 다시 말해서 뻔하고 식상한 여행지랄까? 결국, 같은 곳을 몇 번을 돌고 돌아 어느 한 여행사에서 판매하는 산악자전거 투어를 발견했다. 어렵사리 만든 시간. 두 남자 모두,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르는 이 기회를 평범하게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함께 하는 여행. 어쩌면, 떠나기 전이 가장 행복하다.
4박 5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남정네 둘이서 24시간을 붙어 있으면서 "어찌 좋을 수만 있을까?" 그럼에도 싫은 듯, 좋은 듯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시간들은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인도네시아 산속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낯선 곳에서 빗물로 샤워를 하고, 숲 속에서 삽으로 땅을 파서 볼일을 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치며 어이없이 웃으면서도 이 일을 계기로 "우리는 가까워졌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더 이상 보여줄 게 없어"라고 생각했던 지난 순간들이 모두 착각이었음을 깨닫게 해 준 시간.
마치, 산악자전거 코스 같았던 4박 5일이었다. 녹이 슨 자전거처럼 삐걱거리면서도, 오르막 길은 거침없이 올라갔고, 내리막 길에서는 좌우로 비틀거리며 내려오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안전하게 완주했다.
서로를 잘 알고 있다는 생각은 그저 착각이었음을
여행은 여전히 서로에게 보여줄 것이 많이 남아있음을 알려 주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는 마음을 후비는 단어도 있었지만 "몸에 좋은 건 쓰다고 하지 않았던가?" 단맛만 기대하고 시작했던 여행 속에 쓴맛은 계획에 없었지만, 결과적으로 그것이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해 주었던 시간이었다. 만약 단맛만 보고 왔다면, 깨달음 없이 계속 착각 속에서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우린 서로를 너무 잘 안다고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건 정말이지. 크나큰 착각이었다.
술, 담배를 좋아해서 나보다 체력이 나약할 거라고 생각했던 대구 토박이는 때로는 나보다 빠른 속도로 자전거를 타는 모습을 보며 그동안 속으로 생각했다.
내가 그동안 너를 오해했구나. "아니, 내가 아직 너를 다 알지 못하는구나"
정확히는 이번 여행을 통해서 하나 더 깨달았다. '같이 여행을 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서로가 몰랐던 사실들을 새롭게 알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그게 여행의 가치가 주는 의미였을지도 모르겠다. 여행은 혼자 해도 행복하겠지만, '여행의 가치'는 '같이' 였을 때 더욱 깊어진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또 같이 떠나게 될 때는 그때는 몰랐던 부분까지 감싸주고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가족보다는 멀지만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관계에 있는 우리. 다른 듯 같은 듯. 맞는 듯 안 맞는 듯. 그래도 서로 합이 잘 맞는 날에는 강남 스타일로 마라톤을 할 수 있는 에너지가 폭발하는 돌아이들. 가끔은 어벤저스의 일원이 되어 지구를 구하는 영웅이 되는 꿈을 꾸는 조금은 철없는 아저씨들. 오늘도 경상도 아재들의 좌충우돌 여행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