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이 '기록'이라면, 선은 '기억'이다.
'한번, 두 번' 어느새 내 여권에 도장이 하나씩 늘어나는 즐거움에 여행을 무척이나 기다리던 시간들이 있었다. 최근에는 자동 출입국 심사가 세계화되면서 그 즐거움은 반감되었지만, 도장 횟수와 별개로 여행에 대한 기억들은 되려 쌓이고 쌓여 지금 쓰고 있는 글들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동시에 여행의 횟수가 쌓일수록 작은 습관이 생겼다.
그것은 하나도 좋고, 모래알만큼 작아도 좋으니, '여행의 흔적을 남겨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다. 처음에는 소소한 기념품을 사는 정도였지만 몇 번 해본 결과 시간이 지나면서 대게는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다시 말해서 추억이랍시고 구매한 것들 중에 현재까지 내 곁에 딱히 남아 있는 것은 없었다.
화폐를 남겨오는 이유
그렇게 조금씩 모인 것이 여행을 다녀온 국가의 화폐였다. 보관이 용이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는 다시 갈 거니까!"라는 희망이라는 단어가 가득한 나의 보물 상자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특히, 가까운 일본의 경우는 상대적으로 자주 방문하기에 남겨 둔 돈은 숨겨둔 비상금을 쓰는 것 같은 든든함이 있다.
정리의 기술 저자 곤도 마리에는 "이 물건을 가슴에 얹었을 때, 설렘이 느껴지지 않으면 버려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더욱더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금액적 값어치를 떠나서, 설렘이라는 감정을 만들어주는 존재. 그래서일까? 가끔 방 정리를 하면서 한동안 꽁꽁 싸매 두었던 돈 봉투를 열 때 스며드는 쿰쿰한 화폐 냄새를 좋아한다. 또한, 이 화폐가 처음 세상 밖으로 나와서 수많은 사람들을 거쳐 내게 왔을 과정을 상상해 보면 이 또한 작지만 소중한 인연 아니겠는가.
어릴 적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에는 습관처럼 신문을 읽었다. 처음에는 단순히 롯데의 경기 결과가 궁금해서 읽기 시작해 점점 '사회, 시사' 쪽으로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 신문 지면 사이로 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바로 유럽 패키지여행 광고였는데 당시에는 별생각 없이 넘기곤 했다. 그때 나는 어렸고 그 시절 해외여행은 그야말로 꿈속 (생각해 보니 가본 적이 없는데 꿈을 꾸는 것도 참 어렵단 생각이 든다) 에서나 가능했으니까.
점으로 시작해서, 점으로 끝나는 여행
패키지여행은 세월의 흐름과 관계없이 늘 새롭게 포장되어 판매되고 있다. 짧은 기간, 여러 국가를 방문할 수 있다는 편의성을 장점으로 내세워 포장되어 판매되지만, 이는 내가 선호하는 여행의 방식은 아니다.
어쩌면, 예술가들이 GPT로 그린 작품은 작품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할까? 아니면, 그저 여권에 도장을 찍은 사실만으로 여행을 다녀왔다고 생각하는 이전의 나 같아 보여서 그런 걸까?
물론 짧고 굵은 것이 목적이라면 꽤 적합한 선택지일 수 있다. 하지만 한 국가 아니 한 도시에 머무는 시간이 평균 2일, 3일이 채 안 되는 일정은 한 도시의 문화를 경험하고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시간인 것이다. 삼성 전자에서 2개월 인턴 했다고 해서 "저, 삼성 출신입니다!" 하지 않는 것처럼.
잠시 축구 이야기를 하자면 맨유의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의 활동량을 극찬하며 “그가 축구화 바닥에 흰색 페인트를 묻히고 뛰면, 녹색 그라운드가 모두 흰색으로 변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여행의 방식' 이기도 하다. 영역 표시처럼 잠시 방문해서 사진만 찍고 이동하는 것은, 나를 찾아가는 여정이 아니라, 여행 자랑에 목마른 낯선 방문자의 침범일 뿐. "기억보다는 기록만 남아 있는" 환상의 둘레.
그렇다면 '점을 찍는 여행과, 선을 잇는 여행'은 무엇이 다를까? 물론, 해답은 없다. 다만 선을 잇는 여행은 선을 그을 여지, 다시 말해서 다시 돌아올 것이라는 마음가짐의 차이가 아닐까? 어쩌면 점을 찍는다는 것은 문장의 마지막에 찍은 '그 점' 과도 같아서.
처음부터 점 대신 선을 그을려는 노력은 필요 없다. 노력으로 되는 것과,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으니 말이다.
때로는 넘쳐나는 정보들이 되려 여행의 시야를 가릴 수 있다. 그래서 발길이 닿는 여행이 아니라 누군가 다녀 간 길을 똑같이 다녀가는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고 오는 여행도 많다. 물론 제한적인 시간 속에서 실패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관점에서는 성공적인 여행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행은 기록보다 기억으로 남아 있을 때, 혹여나 인생에서 갑작스레 큰 어려움에 찾아왔을 때, 깊은 밤 어둠 속 별들처럼 길을 안내해 주는 표지판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혹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길고 긴 어둠이 찾아오더라도, 유일하게 길을 밝혀주는 빛나는 존재일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