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는 것이 아니라, 남겨두어야 하는 것
가끔,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후에, 한동안 멍해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한다. 여행은 끝났지만 여전히 마음속 일부는 돌아오지 못하고 그곳에 머물러 있는 느낌이다. 머물렀던 시간이 길수록 , 떠나 있던 시간의 길이만큼 무게감이 더해져 내 마음속 어딘가 선명하게 흔적을 남긴다. 꼭 여행이 아니어도, 유럽에서 공부를 마치고 7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왔을 때. 거리에서 한국말이 들리는 것이 낯설게 느껴졌고, 대만에서 한국에 들어오면 커피를 주문할 때마다 한동안 습관적으로 중국어가 튀어나오기도 했던 것처럼.
어쩌면, 여행 후에 밀려오는 이런 감정은 "익숙한 현실과 낯선 여운이 머물러 있는 그 사이 어딘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여행은 연애와도 같아서 가끔은 이별을 경험할 때만큼 아릴 때가 있다. 처음으로 이별의 아픔에 휘몰아치는 낯선 감정이 한동안 내 마음을 지배했을 때처럼, 첫 여행이 꼭 그러했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조금은 진정되었던 내 첫 여행의 잔상들. 이후로도 파도처럼 휩쓸려 간 줄 알았지만 문득 내 마음 한 구석 잔잔하게 가슴을 툭 건드릴 때가 있다. 그저 그 크기만 달라졌을 뿐. 도저히 무뎌지지 않는 익숙하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 그런 감정.
그럼에도, 늘 감사하게 생각하려 하는 이유는, 그만큼 여행에 모든 힘과 감정들을 쏟아내었기 때문이다.
"때론 직접 경험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는 감정들이 있다"
좋아했던 만큼 마음이 베여 나가는 이별의 칼날. 누가 보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달려야 느낄 수 있는, 그래서 턱 끝까지 차 오르는 거친 호흡.
하지만, 이별이 너무 힘들어서 "나 너무 힘들어. 이제 다시는 연애 안 할 거야!"라고 혹은, "다리가 너무 아파서 이제 못 달리겠어"라고 말하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누군가를 찾아 나서고, 또다시 출발선에 서서 호흡을 가다듬는다.
"어쩌면 잠시 쉬어갈 시간이 필요했을 뿐."
어쩌면 여행은 이 모든 것들과 조금씩 닮아 있는 듯하다.
간혹 내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을 붙들고 있기엔 너무나도 버겁게 느껴져서 세상에 떠밀리듯 떠나는 여행일지라도 고통을 게워내며 마음속으로 다짐한다. 여행에서 쌓아 올린 행복 지수를 일상에서 조금씩 소비하며, 다시 찾아 올 힘듦과 고비들을 버티겠노라고. 그러다 마지막 남은 행복 한조각조차도 고갈되어 버틸 수 없을 때, 나는 또다시 떠날 채비를 하겠노라고.
여행 후에, 현지 화폐를 조금씩 남겨두는 이유
가끔 현지 공항에 도착했는데 정작 수중에 현지 화폐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조급해진다. 특히 편의점을 발견하면 물이라도 하나 사 먹고 싶은데 화폐가 달라 사용하지 못하는 답답함이 싫을 때가 있다. '일상에서는 아무렇지 않았던 작은 행위조차도 타지에서는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이전 여행에서 여비를 조금 남겨두는 습관이 생겼다. 나름 경험을 통해 얻은 편의성 추구이기도 하지만, 여행 말미에 다시는 오지 않을 사람처럼 남은 돈을 정신없이 쓰기보다는 "다음에 또 올 거니까!"라는 마음속 여지를 남겨놓는다. 그러다, 슬며시 마지막까지 눈에 들어오는 작은 사물까지도 여운을 남길 수 있도록.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고 혹은 지키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소박한 기약은 내 삶 속에서 작은 위로가 되고는 한다. 그래서 가끔은 서랍 속에 나라별로 정리해 둔 돈뭉치들을 열어 보고는 한다. 동전이 많은 엔화에서는 묵직함이, 화폐를 사용하는 베트남 동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쳐 갔을 세월의 흔적이 느껴진다. 합쳐서 얼마인지도 모르지만 금액은 중요하지 않다. 마음속 한편에 "언젠가는, 이 돈으로 또 떠나야지"라는 설렘을 느낄 수 있는 게 소중할 따름이다.
그러다 문득, 뚫어져라 보고 있으면 잠시나마 여행지에 있는 듯한 생각에 잠길 때가 있다. 이 작은 동전과 꼬깃 꼬깃한 화폐들이 마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는 내 마음속 다락방 열쇠처럼. 누군가에게는 쓰고 버리거나 당근에 처분해 버리고 말 소액의 돈뭉치일지라도 말이다. 어떠한 형태로든 여운을 남겨두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다 "다음이 있으니까." 이는 이별 후에 간혹 찾아오는 미련이라는 감정하고 다르다. "이별 후에는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다면, 여행은 그리웠던 곳을 다시 찾는 것" 그러나 그때와 지금은 다른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