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하게, 느리게 그리고 더 많이
지금까지 수많은 여행 중, 가장 모험적인 여행을 꼽으라면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경유' 하는 여행이라고 말할 것이다. 영어로는 Stop Over. 사전에는 '여정상의 두 지점 사이에서, 잠시, 머무는 것', 혹은 '단기 체류'라고 되어 있다.
사전적 의미는 대부분 딱딱하게만 느껴지곤 하는데 '잠시, 머무는 것'이라는 명사와 이를 수식하는 '여정상의 두 지점 사이'라는 부가 설명이 지금도 여행의 기억을 다시 되살아나게끔 하는 것 같다. 잠시 머무는 것이지만 그 안에서도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것 또한 여행의 일부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여행과는 조금은 다른 느낌. 나는 이 어감과 사전적 정의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경유, 어쩌면 잠시 머무르기 위한 목적보다는, 경비를 아끼기 위한 필연적인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20대 끝자락. 더 늦기 전에 처음으로 유럽이라는 곳을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였다. 인터넷에서 검색을 하니 정말 수많은 경로의 항공권이 쏟아졌고, 처음으로 경유 항공권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대게 경유 항공권은 저렴했지만 나는 고민 끝에 '도쿄와 로마를 경유해서, 이스탄불로 도착하는 항공권'을 구매했다. 금액은 왕복 160만 원. 직항도 140만 원에 갈 수 있었는데 굳이 돈을 더 주고? 저런 일정이라고?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도쿄를 포함하여 책으로만 접하던 로마를 방문할 수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았다.
되려, 비행기를 여러 번 타니까 이득 아니야? 기내식도 더 많이 먹고, 이렇게 아주 단순하게 생각을 마무리 지었다. 내가 구매한 항공권을 공유하자, 이를 본 지인들은 한 마디씩 거 들었다. 이 정도면 "세계 여행 아니냐?"라는 부러움 섞인 시선부터, 경유를 2번 하는데 160만 원이라니, "사기 아니냐?"라는 우려까지. 하지만 아무렴 좋았다. 생애 첫 유럽 여행이고, 경유라는 경험 자체가 신기함 그 자체였으니까.
출발
출발 당일 아침이 밝았다. 부산에 거주하던 나는 전 날 서울에 살고 있는 친구네 집에서 하루 묶은 후에 아침 일찍 공항으로 향했다. 그렇게 출발한 비행기는 정확히 낮 12시에 나리타에 도착을 하였고, 나는 다음날 아침 7시까지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정이었다. 그렇다. 이제부터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약 19시간 남짓. 짧다면 짧았지만 도쿄가 처음은 아니었기에 나름 충분하다고 여겨졌다.
때마침 도쿄에는 방학을 이용해 인턴 근무를 하는 지인이 있었기에 빠듯한 일정임에도 더할 나위 없이 기쁘기만 했다. 스마트폰은커녕 유심도 활성화되지 않았던 시기. 낯선 언어로 가득한 도쿄 시내 한복판에서, 두어 번 정도의 국제 전화를 시도한 끝에 조우할 수 있었고, 곧이어 눈앞에 보이는 라멘 가게에 들어갔다. 6월 26일(참고로 내 생일은 6월 25일이다), 슬슬 더워지는 초여름이었지만 입 안으로 흡입하는 라면의 열기와 입 안으로 감기는 면발은 오히려 이곳이 일본임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낮에는 시부야를, 저녁에는 오다이바에서 야경을 즐겼다. 그리고 밤 10시. 우리는 천천히 클럽들이 모여있는 롯폰기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이곳에서 밤새도록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황혼에서 새벽까지
경유로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았기에, 숙박보다는 조금이라도 이 분위기를 만끽하고 싶었다. 그리고 도쿄의 클럽 또한 궁금했던 터라 신나게 놀았다. 한참을 놀고 나니 시계가 어느덧 아침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밖을 나와 공원 의자에 앉아 있으니, 거리에는 간간히 넥타이에 검정 정장을 입은 직장인들이 출근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다. 나는 누가 봐도 여행객 그 자체이니.
라멘으로 해장을 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해 간단하게 샌드위치로 아침을 때우고, 지인과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다시 공항으로 가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사실상 무박 여행을 한 셈이었다. 그리고 로마행 항공권을 발권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는 유럽, 그리고 약 12시간의 비행.
그리고, 나는 계획한 대로? 비행기에서 깊이 곯아떨어졌다. 12시간의 비행은 지루할 틈이 없었다. 눈을 떴을 땐 시차 적응도 끝나 있을 것이었다.
도쿄에서 로마 路
최종 종착지는 터키 이스탄불이니, 결국 로마 또한 잠시 머무르는 곳이었다. 다만 도쿄와는 다르게 1박 2일 일정이었기에 여유가 있었다. 당시에는 "2박은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많이 했었지만, 전체 일정이 2주일 밖에 되지 않았기에. 또한 2번의 경유로 이동 시간을 제외하면, 실제 터키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10일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비록 짧은 1박이긴 했지만, 처음 유럽이라는 곳을 방문해서 그들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그 가치는 충분했다. 특히 로마의 중심부라고 불리는 떼르미니 역은 내가 상상했던 거리와 다르게 담배꽁초가 산을 이루었고, 트레비 분수에는 전 세계에서 모여든 관광객들이 던진 동전으로 수복했다. 그리고 난생처음 한인 숙소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한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잠을 청했다. 한방에 6명씩 무려 12명이 이 작은 집에서 화장실을 공유하고 한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방은 좁았고 불편했다. 심지어 에어컨도 없이 덥기까지 했지만 이 작은 공간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금세 친해졌다. 이곳에서 여행객이라는 신분으로 만난 우리는 서로의 나이도 사는 곳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여행 이야기를 안주 삼아 설렘을 나누면서 그 순간을 즐길 뿐이었다. 한편 즐거운 대화가 오가면서도 속으로는 이 친구들이 20대 초 중반에 여행올 때 나는 뭐 하고 살았나?라는 생각에 잠시 잠기기도 했지만.
로마에서 1박 후, 이스탄불 行
다음 날은 숙소에서 분들의 제안으로 급하게 합류했던 바티칸 투어(참고로, 이거는 유료다!)를 통해서, 짧지만 로마의 역사를 이해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독서를 좋아하지만 10권의 책보다는 한 번의 경험이 주는 깊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여행을 통해서 깨달았다. 특히 그것이 학문이 아닌 다른 나라를 이해하는 여정이라면 말이다. 로마도 결국은 사람들이 사는 곳이었고, 매년 전 세계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들에게 나 또한 수많은 여행객 중 한 명일 뿐이었다. 이런저런 생각과 역사를 오가는 사이. 어느덧 바티칸 투어는 마지막을 향하고 있었다. 또다시 이동해야 할 시간이 온 것이다.
그렇게 그곳에서 만난 한국분들과의 아쉬움을 건넨 인사를 끝으로 다시 공항으로 향했다. 3번째 비행이자 드디어 최종 목적지인 터키 이스탄불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공항에서 수속을 끝내고 보니 시끌벅적해서 둘러보니, 유로 2012 대회가 진행 중이었고 공교롭게도 이탈리아가 4강전 경기를 진행 중이었던 것이었다. 아마도, 공항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 입장에서는 비행기를 타는 것이 못내 아쉬웠을지도 모를 일이다. 덕분에 떠나는 순간까지 이탈리아의 문화를 그대로 흡수한 것 같은 기분이다.
경유는 한자어로 '經由'이고, 경험의 한자어는 '經驗'인데, 어쩌면 경유는 경험을 한번 더 담아가기 위한 의미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