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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May 20. 2024

가난의 진면모

요즘엔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6시쯤 아침밥을 먹는다. 아침을 먹으며 유튜브를 둘러보곤 하지만 볼만한 콘텐츠가 떨어지면 시집을 읽는다. 오늘은 정호승 시인의 <꽃 지는 저녁>이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시 <강물>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었다' 희망이 가로막다니, 그게 무슨 말일까 생각하던 중 초등학교 시절이 떠올랐다.




본의 아니게 학창 시절 소풍을 자주 빼먹었다. 한번은 소풍을 못 간다고 담임선생님께 말씀드리자, 다른 친구의 부모님을 통해서 도시락을 하나 더 준비해 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이때도 못 갔다.


그날 아침, 나는 학교 앞 문방구에서 100원짜리 쮸쮸바를 사 먹었다. 다들 소풍을 떠났다는 사실을 까마득히 잊은 채, 평소 학교에 있을 시간에 문방구에서 불량식품을 사 먹는 재미가 쏠쏠했다.


20대가 되었을 땐 이런 과거들이 부모님에 대한 원망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차마 입 밖으로는 못 꺼냈지만 '도시락도 싸준다는데 왜 소풍을 보내지 않았느냐'라고 묻고 싶었다. 그깟 형편, 나는 가난을 우습게 봤다.


30대가 된 나는 네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쮸쮸바에 취했던 나는 멍청했구나. 둘째, 20대에도 멍청했구나. 셋째, 도시락을 싸주신 친구 부모님께 죄송한 일이구나. 넷째, 부모님은 희망을 감추셨던 것이구나.


하마터면 미숙했던 초등학생 시절부터 온갖 불만을 가질 뻔했다. 단순히 도시락 문제가 아니라 옷과 간식, 그리고 경험의 차이까지 나에게 부족한 면들을 단 몇 분 만에 모두 느낄 뻔했다. 멍청해서 다행이었다.


운이 좋아 전교회장이 된 후로는 어쩔 수 없이 소풍에 빠질 수 없었다. 떠나기 며칠 전이면 이상하게도 옷 하나 만큼은 저렴하더라도 꽤 멋스러운 것들을 사주셨다.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여행지에서 신나게 놀고 있을 당시, 집에는 실시간으로 학부모 모임의 전화가 빗발쳤다고 한다. 내 도시락 준비도 벅찬데 선생님 간식도 챙겨야 했을 줄이야.)




아직도 부모님의 행동들을 모두 이해하진 못한다. 다만 희망을 감추셨기 때문에 그 시절 나는 형편에 아쉬움만 있었지, 큰 불만은 없었다. 그저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복지관에서 공부를 했다.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에만 관심을 둘 수 있었다.


가난의 진면모는 내 일을 잊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슬럼이 없기 때문에 일상 속 모두가 대체로 비슷해 보인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남들과 비슷한 일을 하길 희망한다. 내가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살핀다. 그러면 부족함이 따라오고, 좌절과 포기가 이어진다. 


희망을 죽이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희망만 본다면 지금의 내가 부족할 뿐이다. 시간과 강물, 그리고 나는 흘러야만 한다. 가난의 진면모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탓도, 네 탓도, 절망도, 희망도 잠시만 느끼는 것이다. 품지 말고 흘러가도록 두자.


< 강물 >, 정호승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물이다
사랑의 용서도 용서함도 구하지 말고
청춘도 청춘의 돌무덤도 돌아보지 말고
그대로 두어라 흐르는 것이 길이다
흐느끼는 푸른 댓잎 하나
날카로운 붉은 난초잎 하나
강의 중심을 향해 흘러가면 그뿐
그동안 강물을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내가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그동안 나를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강물이 아니었다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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