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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아오 Mar 26. 2023

파스타집에 이런 손님이

곧 파스타집에서 일을 한 지 4개월이 된다. 작년 가을만 해도 '요식업을 시작해도 되는 건가, 내가 이걸 배워서 어디에 써먹으려고' 이런 고민이 많았다. 그러다 불쑥 시작한 게 며칠 전 사건인 듯한데 벌써 4개월이 되어 간다.


첫 한 달은 생전 처음 해보는 조리 앞에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레시피는 정해져 있고 그대로만 하면 되는데, 주문서에 피클을 줘야 하는지 다 적혀있는데, 그게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스타 대신 리조또를 만들거나 포장 음료를 빼놓거나.


그런 실수를 거듭하면서 한 달 반이 되자 어엿하게 일인분을 해낼 수 있었다. 두 달이 되자 아르바이트생 한 명을 데리고 둘이서 파스타집의 저녁을 도맡고 있다. 그러다 보니 온갖 손님들을 다 마주할 수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진상도 있었고, 별별 손님이 다 있었다.


그중 기억에 남는 손님들이 있다. 홀 운영을 잠시 접고 배달전문점으로 운영하는 터라 손님을 직접 대면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왕왕 아이와 강아지를 꼭 데리고 저녁 산책 중 들리시는 분이 계시다. 워낙 모습이 보기 좋으니 사장님께서 직접 문 앞까지 음식을 들고 마중 나가신다. (해 떨어지는 저녁 어스름에 가족 산책이라니.)


그렇게 드문 방문객을 제외하고는 죄다 주문서를 보고 손님을 알 수 있다. 주문서에는 어떤 손님들이 있었는지 정리해 보자.




1. 프랜차이즈 메뉴이지만 손님 레시피로.


가장 빈번한 손님 유형은 재료를 바꾸어 본인만의 맛을 찾는 분들이다. 프랜차이즈 파스타집이기 때문에 모든 메뉴는 정량, 정확한 조리법이 있다. 심지어 양파와 대파, 고춧가루나 팬에 두루는 기름 양까지 레시피가 있다.


그러나 주문서 요청사항에 "이렇게 해주세요."라는 문구들이 보인다. 살짝 매콤한 필라프소스 대신에 굴소스로 조리해 주세요라든지, 버섯 빼고 양파를 많이 주세요, 이런 분들은 특정 맛에 민감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소스만 주시고 다 빼주세요' 유형도 존재한다.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여기는 식당. 아무리 프랜차이즈라도 손님이 원하면 만들어 준다. 


2. 튀김 마니아.


파스타집이지만 파스타를 단 하나도 주문하지 않고 사이드 튀김으로만 최소 배달금액을 채우시는 분도 계시다. 그 가격이 웬만한 동네 치킨이랑 같아서 이럴 거면 치킨을 드시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따금 비빔면보다 배홍동이 당기는 것처럼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어제는 한국과 콜롬비아의 축구 친선 경기. 조리를 하면서 전반전을 재밌게 보고 있다가 주문이 들어왔다. 대개 이런 경기날에는 파스타보단 치킨을 찾지 않나 생각하던 찰나, 튀김마니아의 주문이었다. 윙과 봉, 가라아게까지 사이드 튀김 2만 원어치를 주문하셨다. 이 부위를 조립하면 닭 한 마리가 나올지도.


3. 리뷰 불참러.


대부분의 배달 전문점은 리뷰 이벤트를 한다. 나도 왕왕 주문한 음식만으로 배가 채워질 것 같지 않으면 리뷰이벤트를 신청해 요깃거리 하나씩을 더 얻어먹고 한다. 이렇게 음식을 더 얻어먹고 리뷰를 안 쓰면 큰 일 날 줄 알았다. 페널티라든지 앱 이용 정지라든지.


그런데 대부분의 고객들이 리뷰이벤트를 신청하고선 리뷰를 쓰지 않는다. 거진 60%는 쓰지 않는다고 보면 된다. 황당했다. 당황했다. 리뷰이벤트를 신청했어도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된다니! 양심에 바늘을 콕 찔러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배달 전문점들이 안고 가야 할 숙제가 되어버렸는지도 모르겠다. 공짜로 줘도 될만한 요깃거리를 하나씩 준비해야 할지도. 가장 심각한 건 '처음 주문해요'라든지 '리뷰 잘 쓸게요'라든지 딜을 걸어오는 경우다. 뭔가를 더 달라고 붙였는데, 더 주어도 리뷰를 기대하는 건 금물이다.




고작 파스타집에서 4개월을 일하고 볼 수 있던 손님들의 주문서이다. 이따금 '항상 맛있어요♡ 오늘도 잘 부탁드려요' 이런 요청사항이 달린다면 기분이 좋다. 아, 내가 곧잘 해내고 있구나. 이쁘게 보내드려야지. 없던 정성까지 샘솟는다.


이제 이런 경험을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머지않아 마치게 될 파스타집 근무. 자신의 취향대로 각양각색 주문서를 보내오는 것처럼 나도 남은 기간 동안 정성에 정성을 더해 맛있고 이쁜 파스타를 보내드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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