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것들
핑크 유니폼. 초등학생 이후로 다시 핑크 옷을 입게 될 줄은 몰랐다. 어릴 때 엄마가 죽어라 핑크옷만 사줬던 때가 있었다. 뭐 그 시절엔 당연했다. 옷이든 장난감이든 문구든 남자는 블루, 여자는 핑크로 딱 구별해서 나오던 때니까.
지겹도록 입어서 그런지 직접 옷을 고르기 시작하면서부터는 핑크에 손이 잘 안 갔다. 뭐 나랑 잘 안 어울리기도 하고. 그런데 30대가 넘어 축구를 하고 다시 입게 된 거다. 핑크 옷을. 몇 년째 흑과 백에 갇혀 있는 내가.
처음에는 “으엑!” 소리를 질렀는데 자꾸 입다 보니 나름(?) 정이 들었다. 또 새로운 의미를 찾게 돼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생각이 바뀐 건 최근에 팟캐스트 ‘여둘톡’ 사연을 듣고 난 후부터다. 한 청취자가 어린 조카(여아)가 유독 핑크색만 너무 좋아해서 걱정이라는 내용의 고민 사연을 보냈는데, 작가님들이 ’그럼 핑크색 유니폼을 사주면서 축구를 시켜보는 건 어떠냐 ‘는 뉘앙스의 답변을 내놨다.(정확한 답변인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음…. 작가님들이 ’좋은 걸 좋아한다고 말하기‘ 코너에서 자주 이야기했던 “여아들이 넷플릭스 오리지널 예능 ’사이렌‘을 꼭 봤으면 좋겠다”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예상하지 못한 답변에 뒤통수를 한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우리가 핑크옷을 입고 무엇을 하는 지를 보여주는 것도 중요하구나. ’공주 드레스만 핑크가 아니다‘ 그걸 보여주면 되겠구나!”
내가 김혼비 작가님의 에세이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축구’, SBS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을 보고 뒤늦게 축구를 시작했듯 누군가는 우리를 보고 축구를, 또 다른 팀 스포츠를 시작할 수도 있겠구나. 편견 때문에 망설였던 무언가를 시작할 수 있겠구나. 또 나처럼 핑크의 의미가 달라지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이제 이 유니폼을 입고 더 멋지게 뭔가를 해내고 싶다는 욕심이 생긴다. 연대의 힘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