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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홍 Sep 26. 2020

<소공녀> 미소의 진정한 미소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들


전고운 감독의 영화 <소공녀>의 주인공인 미소를 보았을 때  껌 없이는 못 살았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떠올랐다. 그 시절 나는 껌을 정말 좋아했다. 아니 환장했다. 언제 어디서든 하루 종일 껌을 씹었다. 수업시간에 껌을 씹다가 혼난적도 정말 많았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 껌을 입 안 깊은 곳에 숨겨뒀다가 몰래 씹는 스킬도 생겼다. (TMI를 덧붙이자면 껌을씹지 않고 입에 두었을 때 가장 녹지 않고 딱딱해지지 않는 껌이 바로 ‘후라보노’다. 여러 껌을 씹고 실험해 본 결과니 믿어도 된다) 그래서 MBC 예능 <나 혼자 산다>에서 상대배우와 키스신을 촬영할 때 껌을 잠시 숨긴다는 배우 이장우의 ‘껌 주머니’ 일화를 들었을 때 누구보다 깊이 공감했다.


껌은 나의 일부였다. 졸업 사진만 봐도 그렇다. 의정부고 졸업사진만큼은 아니지만 나의 고등학교 졸업사진도 평범하진 않다고 자부한다. 나는 직접 제작한 최애껌 ‘후라보노’ 대형 버전 플랜카드를 들고 졸업사진을 찍었다. 아마 그런 졸업사진은 100년이 흐른 뒤에도 아니, 지구가 멸망하기 직전까지 나 뿐이라고 장담한다. 특별한 졸업사진을 남기고 싶었다기보다는 당시 나는 10대의 ‘나’를 대표할만한 무언가를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소공녀> 미소에겐 담배와 위스키가 삶의 1순위다. 나의 못 말리는 껌 사랑보다 더 지독한 사랑에 빠져있었다. 처음에는 집까지 포기하면서까지 담배와 위스키를 지키는 미소가 잘 이해되지는 않았다. 담배, 위스키 그리고 껌 모두 기호식품일 뿐이다.  없다고 해서 사는 데 별 지장이 없는 것들.



껌 값을 위해 나는 집까지 포기할 수 있을까. 서울에 상경한 지 5년이 흐른 지금의 나는 단언컨대 절대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래서 미소가 무모해보였다.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미소가 이해되지 않았다.

서울 자취생이 최저가 원룸 마저 포기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미소처럼 더 저렴한 집을 구하기 위해 서울 곳곳을 누벼 본 이라면 알 거다. 공인중개사가 미소에게 마지막에 보여 준 가파른 언덕 위 곰팡이 가득한 집이 진짜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사람이 살 수 있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도 안되는 집들도 정말 많다는 것을 말이다. 미소가 철이 없다고 생각했다. 미소에게 담배와 위스키는 사치같아 보였다.

떠돌이가 된 미소는 친구들 집을 찾아나선다. 대학교 때 만난 밴드부 멤버들이다. 청춘을 함께 보낸 이들이다. 언제나 뜨거웠고, 두려움이 없던 이들이었다. 그들 중에서는 버젓한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도 있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린 사람, 부잣집 며느리가 돼 대저택에 사는 사람, 갓 결혼해 신혼살림을 차린 사람도 있다. 20대 때와는 사뭇 달랐고, 겉보기엔 다들 미소보다 삶이 나아보였다. 적어도 집이 없는 미소보다는 잘사는 듯 보였다.

실상은 달랐다. 그들에겐 뜨거운 ‘무언가’가 사라지고 텅비었다. 넓은 집이 있다고 해서, 돈이 더 많다고 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졌다고 해서 미소보다 더 잘사는 건 아니였다.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밴드부 시절때와 달리 다들 공허해보였다. 미소는 그런 그들에게 빌 붙을 수 밖에 없는 신세였으나, 정작 위로가 필요했던 존재들은 그들이었다. 미소는 그들보다 가진 것이 없어도 따뜻했다. 속이 텅텅 빈 그들과는 달랐다. 여전히 미소는 밴드부때와 마찬가지로 진짜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놓지 않고 살아가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미소에게 위로를 받은 건 나도 마찬가지다. 남들과 비교하기 바빴던 나의 삶이 부끄러웠다. 진짜 나는 무엇을 좋아할까. 진짜 내가 행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건 무엇인가.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인가. 이미 미소는 그 답을 아는 사람이었다.

<소공녀>의 엔딩은 오랫동안 내 마음 속에 간직 될 것이다. 작은 텐트에 살고 있는 미소. 마주편에는 고층 아파트들이 빼곡이 들어서있다. 텐트에는 불이 켜져있다. 미소의 마음 만큼이나 따듯한 불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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