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 모임 등이 거의 사라진 지금, 술 마시는 공간은 어느새 우리 집이 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장소만 바뀌지 않았다는 것. 바로 술 종류에도 변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소주와 맥주가 중심이 된 회식과 모임이었다면, 우리 집 술자리는 와인, 수제 맥주, 전통주, 그리고 적게 마시기 좋은 소용량 위스키 등 다양한 술이 자리 잡게 된 것이다. 기존의 소맥일변도로 가던 한국의 술 문화에 엄청난 변화이며, 음주 문화 자체가 과음에서 음미하는 문화로 시프트되고 있다고도 본다.
술맛을 돋우는 술잔
그렇다면, 이렇게 집에서 술을 즐길 때 한층 더 기분 좋게 마시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당연히 좋은 음식과 좋은 술이겠지만, 같은 맛의 술을 한층 업그레이드해 주는 마법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술잔이다. 눈으로 보고 손으로 잡으며 술을 따르고 입술과 맞닿는 잔은 어떻게 보면 주류 아이템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굿즈(Goods)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최근에 출시되는 제품들은 아예 홈술세트와 같은 개념으로 전용잔과 함께 판매한다. 적어도 집에서는 회사 회식처럼 즐기기 싫어서다. 그렇다면 어떤 전용잔이 최근에 가장 많이 판매가 될까? 당연히 와인잔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마트 등 와인 매출이 30% 이상 증가했기 때문. 그렇다면 이러한 와인잔에는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
킬릭스 (kylix)라고 불린 그리스의 술잔. 넓은 보울을 가진 것이 특징. 당시 와인은 다양한 허브 등을 섞어 마셨고, 이렇게 넓은 잔은 막상 따르기도 편했다. 사진 위키피디아
와인 잔은 사발과 같았다.
와인잔의 가장 큰 특징은 스템, 즉 다리가 달린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이미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있었다. 그렇다면 왜 다리가 달렸을까? 생각해 보면 간단하다. 그들에게는 우리와 달리 테이블이라는 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테이블에서 그들은 주로 술을 서서 따라주곤 했다. 그렇다 보니 낮은 잔보다는 높은 잔이 따르는데 훨씬 유리했다. 한국도 알고보면 비슷하다. 술잔에 다리는 잘 없지만, 술을 받을 때 손을 들어주는 것이다.
아테나가 헤라클레스에게 와인을 따라주는 모습.
또 잔의 크기도 지금보다 훨씬 컸다. 당시로는 술을 도자기나 가죽 주머니에 넣고 따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 보니 잔의 폭이 좁으면 흘리기도 쉬웠던 것이 사실. 그래 넓은 잔에 편하게 따를 수밖에 없었다. 마치 말통 속의 막걸리를 사발에 따르 듯 말이다.
르네상스 시대 카라바조가 그린 디오니소스(바쿠스). 역시 와인 잔이 넓다.
또 이러한 넓은 잔은 다양한 허브 및 과일을 넣고 섞기도 편했다. 현대의 와인은 포도 열매뿐만이 아닌 포도 껍질, 줄기 등도 맛의 일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고대의 와인은 포도를 바로 착즙하고 숙성하는 과정이 적다 보니 맛에 다소 심심한 부분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고대의 와인에는 벌꿀, 허브, 등 다양한 허브를 넣어 마셨다. 알고 보면 화채와 같은 개념이다. 그래서 섞이기 편한 넓은 잔이 편리했을 것이다. 지금의 문화로 보면 스페인식 와인 칵테일 상그리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 와인잔의 기원은 교회의 성배다. 중세 교회에서는 예수가 마셨다는 성배를 재현했는데, 그 성배 스타일이 지금 와인잔의 기원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에 등장하는 성배. 다만 이 성배는 영화에서도 가짜로 밝혀졌다.
유리로 된 와인잔, 15세기부터
유리로 된 와인은 15세기부터 슬슬 등장한다. 하지만, 당시 목재로 열을 내다보니 높은 온도를 내지 못했고, 표면이 자꾸 깨져 상용화되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이 1600년대 조금씩 개선되는데 목제가 아닌 석탄으로 바뀌면서 고온으로 유리를 가공할 수 있었고, 점차 강도가 높은 유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1700년대 들어서는 와인에서의 유리 산업은 탄력을 받게 되는데, 특히 강한 탄산의 내압을 버틸만한 유리병이 나오게 된다. 바로 샴페인의 등장이다. 샴페인은 병 내에서 2차 발효를 하기 때문에 탄산이 지속적으로 나온다. 이때 병이 내압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약하면 터져버리는 것이 가장 문제였는데, 유리 기술을 발달로 이러한 부분이 해결, 현대적인 샴페인이 속속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의 유명 샴페인 메이커들은 대부분 이렇게 18, 19세기에 등장한다. 즉, 이전에는 지금과 같은 샴페인이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지금보다 현저히 작았던 와인잔
와인잔은지금보다 현저히 작았다. 이유는 유리에도 세금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바로 창문세(Windos Tax). 1696년, 명예혁명으로 왕이 된 영국의 윌리엄 3세는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창문부터 세금을 부과하기 시작했다. 납세자가 소유한 집의 창문 수에 근거해 부과했던 세금. 시작은 1303년 프랑스의 필립 4세. 이내 폐지되었지만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고갈된 재정을 충당하고자 영국에서부활하게 된 것이다. 초기 목적은 큰 집을 가진 부자들에게 세금을 많이 걷으려고 했던 것. 원래는 난로세로 추징했으나 집에 들어가서 하나씩 확인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이에 밖에서 확인할 수 있는 창문세를 도입한 것. 창문세는 1851년 주택세의 도입으로 폐지되기 전까지 무려 150년 가까이 시행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남아있는 건물을 보면 창문의 흔적만 남은 경우가 많다. 절세를 위해 있는 창문도 없앤 것이다.
이것으로는 모자랐을까, 1745년에는 아예 유리잔세(Glass Tax)를 부과하게 된다. 유리병은 물론 유리로 된 와인 잔도 세금 징수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 이것으로 유리 업자들은 디자인을 변경한다. 두꺼운 유리 손잡이는 얇아지거나 속이 빈 상태의 제품으로 출시되었다. 그래서 와인 잔은 작아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제도는 1845년도까지 이어지게 된다. 덕분에 영국의 유리 산업은 발달이 늦어진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는 창문의 폭에 맞춰 세금을 징수했고, 네덜란드에는 집이 넓을수록 세금을 많이 내게 했는데 그 기준이 도로 폭에 맞춘 과세였다. 결국 폭은 좁게, 길이는 긴 네덜란드 스타일 들의 집이 완성된다. 프랑스 역시 창문의 폭이 좁아야 세금을 적게 낸 만큼, 좁고 긴 창문 스타일이 나오게 된다.
다만, 프랑스에서는 이 술잔 및 병에 유리세라는 개념은 없었다. 그래서 유리로 된 와인 및 샴페인이 본격적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제도는 와인 등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화 마리앙투아네트에 등장한 와인잔. 샴페인잔으로 보여지며, 지금보다 훨씬 넓은 볼을 가진 것이 특징. 자신의 유방 형태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투명함과 달걀 모양의 와인 잔은 언제?
1800년대의 와인 잔은 지금보다 작은 것도 있었지만 잔 표면에 장식이 참 많았다. 부의 상징이기도 했고, 장식의 역할도 했기 때문이다. 또 지금처럼 입구가 좁은 달걀 스타일보다는 넓은 나팔형 와인잔이 많았다. 특히 샴페인 잔은 넓고 얕은 잔에 따라 마시는 경우가 많았다. 잔이 넓으면 탄산이 빨리 사라져 트림 등이 나오지 않아 엘레강스하게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입구가 넓다 보니 따를 때 비교적 편했다. 우리가 막걸리를 사발로 마시는 개념과 비슷한 것이다. 지금도 백화점 등 전문 와인바에 가면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와인 잔을 빈티지 와인잔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현대와 같은 투명함을 추구한 달걀 모양의 와인잔은 언제였을까? 의외로 그 역사는 짧다. 1950년 대 오스트리아 유명 유리제조사 리델이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이탈리아에서 기존과 달리 와인이 많이 들어가는 참신한 스타일로 요청을 받았고, 고민한 리델사는 유리의 두터운 감촉이 술맛을 방해하지 않게 얇게 제작, 디자인 역시 서양배 및 계란을 상기시키는 향을 모아주는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와인잔을 얇게 만들기 위해서는 직접 사람이 불어서 만들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마케팅적 포인트도 성공가도를 달린다. 이 와인잔으로 마시면 '와인이 맛있어진다'라는 소문이 퍼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와인잔을 만들었다고 해서, 모든 생산자가 마음에 들어하지는 않았다. 특히 부르고뉴 지방에서 호평을 받은 와인 잔은 또 보르도의 생산자들에게는 혹평을 받기도 한다. 이에 각각의 생산자들과 의견을 맞춘 와인잔이 등장을 하게 된다.
생산자가 추구한 맛과 향을 최대한 이끌 수 있는 잔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와인 산지에 따른 프랑스 보르도 타입, 부르고뉴 타입, 와인 종류에 따라 화이트 와인 타입, 그리고 샴페인 타입 등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와인 잔은 맛과 향을 어떻게 느끼게 할까? 제조사에 따라 조금씩 다르기도 하지만 개인적 사견도 담아 리델사 제품을 중심으로 간단히 정리해 보았다.
왼쪽부터 보르도 타입 잔, 부르고뉴 타입, 화이트 와인. 출처 리델
깊고 진한 향을 느끼기 좋은 보르도 타입 와인 잔
와인을 넣는 부분을 보울(Bowl)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보울이 깊고 클수록 향을 맡기 좋다. 와인이 표면에 닿는 면적이 넓을수록 휘발성 물질이 증발하며 향을 더 일으키고, 코를 넣어 향을 맡기도 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을 최대한 이끌어 내면서 너무 무겁거나 크지 않게 만든 잔이 바로 보르도 타입의 와인 잔이다. 튤립 스타일이라고도 불리는 이 잔은 위 입구가 좁아지는 스타일로 향을 오래 머물게 할 수 있으며, 잔 자체가 긴 만큼 스월링(잔을 흔들며 향을 돋우는 것)이 용이하고, 코를 넣어 다양한 향을 맡기 쉽게 만들어졌다.
보르도가 원산지인 카베르네 쇼비뇽 및 해당 포도 품종을 브랜딩 한 제품이 어울린다고 하지만, 웬만한 레드와인이면 다 잘 어울린다. 전 세계적인 레드 와인의 추세가 대부분 이 보르도 스타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칠레, 호주산 대부분의 레드 와인에게 적용되는 스타일이다.
부드러운 향을 즐기기 위해 다소 짧고 넓은 부르고뉴 타입
진한 향보다는 부드러운 맛과 향을 느끼기 좋은 스타일로 부르고뉴 타입이 있다. 보드로 타입보다 둥근형 태지만 잔의 보울(Bowl) 자체는 다소 짧기 때문이다. 부르고뉴는 프랑스의 동중부에 있는 고급 와인 산지로 오직 피노누아라는 포도 품종으로 레드 와인을 만들고 있다. 주로 짙은 맛을 자랑하는 포도 품종인 카베르네 쇼비뇽과 달리 섬세한 산미와 과실 맛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날카로운 향보다는 부드러운 향미를 느끼게 하고자 둥근 형태로 만들었다. 다만, 보르도 타입이나 화이트 와인 타입보다는 범용성이 다소 떨어지며 가격도 높다.
화이트 와인 타입
화이트 와인잔은 보르도 타입과 비슷하나 다소 작다. 이렇게 다소 작은 이유는 화이트 와인의 음용온도가 레드 와인보다 낮기 때문. 레드 와인은 상온에서 마신다면, 화이트 와인은 10도 전후로 시원하게 마시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즉 작게 따르고 조금이라도 차가울 때 빨리 마시게 하기 위해 크기를 조절했다고 본다. 범용성이 높아서 레드 와인은 물론 전통주, 사케 잔으로도 많이 사용되고 있다.
파티를 위해 좁아진 샴페인 잔, 보울이 넓었던 예전 샴페인 잔. 출처 리델
파티를 위해 폭이 좁아진 와인 잔 '샴페인 플루트 잔'
샴페인 와인은 일반적으로 플루트(Flute) 잔이라고도 한다. 플루트와 같이 긴 형태를 가졌기 때문.
이 잔은 주로 스탠딩 파티에서 사용되기 위해 고안되었다. 샴페인 자체가 파티나 축제에 어울리는 것도 있지만, 파티 테이블 자체도 워낙 좁다 보니 많은 넓고 큰 잔을 놓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여기에 스탠딩 파티는 이동이 잦은데, 잔이 너무 크다 보면 부딪히기도 하여 잔의 폭도 얇게 줄인 이유도 있다. 또 잔 자체가 길다 보니 들고 다니더라도 잘 흘리지 않았다. 한마디로 북적거리는 공간에서 유효하게 쓰이기 위해 폭이 좁은 잔을 쓰게 된 것이다.
여기에 폭이 좁은 만큼 기포가 올라오는 곳을 집중시킬 수 있으며, 이로 인해 아름다운 기포가 눈에 잘 띄기도 한다. 다만, 잔 자체가 폭이 너무 좁은 나머지 잔을 돌려도 와인 자체가 잘 돌아가지 않으며, 그렇다 보니 향을 증폭시키기가 어렵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보완하고자 화이트 와인용 잔으로 샴페인을 테이스팅 하기도 하며, 진한 맛과 향을 그대로 즐기고자 보르도 와인잔으로 샴페인을 즐기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상황을 담아 보다 보울이 넓은 샴페인 잔을 만드는 곳도 있다.
최근에 유행인 스템리스 잔. 출처 리델
다리가 없는 스템리스 잔과 빈티지 샴페인 잔
또 와인잔에 스템이라는 다리가 번거롭다는 소비자도 있어서, 최근에는 스템 없는 와인 잔도 인기를 끌고 있다. 또 폭이 넓고 얕은 빈티지 잔은 향을 빨리 배출시켜 과한 숙성의 향을 가진 와인에게 잘 어울린다고 말을 한다.
최근에는 와인잔스러운 사케 전용 잔도 등장
일본의 사케 업체는 이러한 트렌드에 빠르게 움직이면서 사케 전용 잔도 계속 출시 중이다. 리델사와 협업한 제품으로 과실향이 풍부한 준마이 다이긴죠(도정률 50%의 고급 제품)와 준마이(쌀 맛이 나는 담백한 스타일)로 잔을 나눠 제작했다. 준마이 다이긴죠 스타일은 향이 잘 모아지게 화이트 와인 잔과 같은 스타일로 제작되었고, 준마이는 향보다는 담백한 맛을 즐길 수 있게 넓고 얇게 제작되었다. 한국의 전통주는 아쉽게도 이러한 부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국 와인을 즐기기 위한 것은 와인의 상태를 볼 수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잘 익은 와인인지, 산폐가 되지는 않았는지, 그래서 와인의 색과 투명도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것이 와인 잔에 중요한 포인트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와인잔의 모습에 비판적인 의견도 있다. 플라시보 효과이며 마케팅 수단이라고 보는 것이다.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상당히 맛이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진짜 맛이 다른지 안 다른지는 각자 개인이 판단할 몫이며, 잔 선택 또한 꼭 이 기준에 따를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