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술빚기를 알려준 백제인과 일본의 왕
한국 술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일본의 15대 왕, 응신일왕(오진텐노, 応神天皇)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에 따르면, 백제인 수수코리(須須許理)가 술을 빚어 응신일왕에게 바쳤고, 왕은 이를 마시고 크게 기뻐했다고 한다.
중국의 『위지왜인전(魏志倭人伝)』에도 일본인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이 있지만,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초의 술 이야기는 수수코리의 사례다. 즉, 일본인도 술을 마셨으나 백제로부터 양조 기술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으로 발전했다고 볼 수 있다. 『고사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노래가 남아 있다.
"수수코리가 빚은 술에 내가 취했네.
재앙을 물리치는 술, 웃음이 넘치는 즐거운 술에 내가 취했네."
이후 수수코리는 일본에서 술의 신으로 추앙받으며, 현재 사가 신사(佐牙神社)에 모셔져 있다. 일본에서는 수수코리를 통해 양조법이 전해졌다고 보고 있으며, 일부 학자들은 ‘사가(佐牙)’라는 지명이 일본어의 ‘사케(酒)’ 어원이라는 주장도 한다. 흥미로운 점은 ‘사가’가 한국어의 ‘삭았다’, ‘삭히다’와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 법정대가 출판한 『물질과 인간의 문화사(ものと人間の文化史)』에서는 ‘수수코리’라는 이름도 ‘술고리’에서 유래했다고 설명한다.
그렇다면, 왜 응신일왕은 백제인에게 술을 빚게 했을까?
백제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응신일왕
응신일왕은 한반도와 활발하게 교류한 군주였다. 백제, 신라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 백제에서 학자와 기술자를 초청해 일본의 문화 발전을 이끌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천자문』과 『논어』를 일본에 전파한 왕인(王仁)이다. 이를 통해 일본에 한자와 학문이 보급되었고, 응신일왕은 지식과 교양을 중시한 군주로 평가받는다.
뿐만 아니라 그는 대규모 토목 사업을 추진해 저수지를 만들고 관개시설을 확충했으며, 양잠 기술을 도입해 공예 발전을 촉진했다. 대형 선박을 건조해 교통과 무역을 활성화하고, 사회 조직을 정비하며 일본의 기틀을 다졌다. 이러한 공로로 인해 그의 치세는 일본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응신일왕, 백제 왕족 출신일까?
일부 연구자들은 응신일왕이 백제 왕족 출신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일본 역사학자 이시와타리 신이치로(石渡信一郎)는 저서 『백제에서 온 응신일왕, 기마민족 왕조의 성립(百済から渡来した応神天皇 - 騎馬民族王朝の成立)』에서 응신일왕이 백제에서 건너온 왕족일 가능성을 주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 21대 개로왕의 동생인 곤지왕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그가 개로왕의 아들이자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전해진다. 『일본서기』에서도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는 461년 일본에 파견되어 간사이 지방을 개척했으며, 이후 개로왕이 고구려 장수왕에게 살해되자 백제로 귀국해 내신좌평이라는 최고위 관직에 올랐다. 또한, 개로왕이 일본으로 떠날 당시 임신한 왕비를 곤지왕에게 맡겼고, 그 아들이 후일 백제의 무령왕이라는 주장도 있다.
백제 기술이 일본을 변화시키다
백제에서 건너간 기술자들은 일본의 문화와 산업에 큰 영향을 미쳤다. 6세기에는 불교를 일본에 전파했고, 백제의 건축 기술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이자 현존하는 최고(最古) 목조 건축물인 호류지(法隆寺)가 건립되었다. 한반도의 대장장이들이 전해준 철기 기술은 일본의 무기와 농기구 발전을 이끌었으며, 백제의 직물 기술은 일본 의복 문화에 기여했다. 행정과 재정 시스템 또한 백제의 영향을 받아 발전했고, 백제 출신 이주민들은 일본의 통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술의 기술법 역시 백제에서 전래되었으며, 백제 기술자들이 만든 저수지 중 하나가 ‘백제지(百済池)’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저수지가 신라인에 의해 만들어졌음에도 ‘백제’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백제인과 한반도 출신 이주민이 가장 많이 정착한 곳 중 하나가 교토의 후시미(伏見) 지역이다. 이곳은 한반도계 핫타(秦) 씨족의 거점이었으며, 이들이 세운 후시미 이나리 신사는 영화 『게이샤의 추억』에도 등장한다.
후시미에는 술의 신을 모시는 마츠오타이샤(松尾大社) 신사가 있으며, 오늘날 일본 최고의 사케(酒) 생산지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18곳의 양조장이 밀집해 있으며, 한국에서도 유명한 ‘월계관(月桂冠)’ 역시 이곳에서 탄생했다. 한반도 출신 이주민들은 단순히 술을 전파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농업 기술을 통해 쌀 생산력을 높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의 양조 문화를 정착시켰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역사 속에서 바라본 한일 관계
1500년 전의 역사를 통해 일본을 향한 우월감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러한 감정은 우리가 일본보다 못살던 시절에 필요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한국은 세계 무대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다. 단순한 문화 전파를 넘어 세계인과 공감대를 형성하는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응신일왕에 대한 논란은 여전히 많다. 그의 실존 여부조차 100% 확신할 수 없으며, 그가 신라계라는 주장도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술’이라는 단순한 매개체를 통해 이처럼 깊고 흥미로운 역사적 맥락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술 한 잔에 담긴 이야기가 단순히 마시고 취하는 것으로 끝나기엔, 그 역사적 의미가 너무 크고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