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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18. 2024

나 태평양이야

...되다

계획보다 일찍 떠나는 바람에 마리나 요금을 지불하지 못한 것 외에도, 우리가 놓친 또 다른 중요한 일이 있었다. 그레이스 하버 코스트가드에 미리 연락해서 도착 예정 시간의 바 상태를 문의하는 것이었다. 코스트가드는 6시간마다 바 상태 보고서를 업데이트하고, 전화나 VHF를 통해 요청할 수 있다. 가장 정확한 정보는 도착 시간 즈음에야 얻을 수 있겠지만, 적어도 항구가 폐쇄될 위험이 있는지 정도는 출항때 미리 파악할 수 있다. 혹시라도 항구 다 왔는데 바가 닫혀 있다면 낭패이므로, 라 푸시를 떠나기 전에 전화해 문의하는 게 안전했다. 그레이스 하버 코스트가드는 우리 전화번호를 묻더니, 곧 전화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참을 차트 테이블 주변에 앉아 전화를 기다렸다. 왜 전화가 늦어지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코스트가드가 우리 배의 정보를 입력하고, 누가 바 컨디션 리포트를 전달할지 결정하고, 구명조끼를 입고 리서치를 하느라 시간이 걸리는 걸까? 오늘은 특히 가야 할 길이 멀어 출항이 늦어지는 1분 1초가 안타까운데 기다리는 시간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있었다. 상황을 묻기 위해 다시 전화를 했으나 여전히 기다려 달라는 응답만 받았다.


코스트가드에 직접 연락하지 않고도 바 상태 보고서를 조회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직접 통화하면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파도 높이, 조수 시간, 바람 등의 데이터는 호라이즌스 호가 어떻게 생겼는지, 조종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리버리하고 처음 가 보는 항구 바 크로싱에 어떤 느낌을 가지고 있는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데이터들이다. 사실 라 푸시 코스트가드 에스코트도 전날의 통화가 없었다면 시도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화 통화로 미묘한 뉘앙스를 파악하려다 출항이 이렇게까지 지연되는 것은 명백하게 득 보다 실이 많다.


일단 출항 먼저 한 뒤 바다에서 전화를 받겠다고 생각할 즈음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의 코스트가드는 파도 높이, 조수 시간, 바람 등의 데이터를 읽어 주었지만 우리가 정말 궁금한 '주관적인 정보', 즉,

"그레이스 하버 바 크로싱은 그 동네 처음 가는 초보들이라도 무난하게 할 수 있을까요" 라든가

"우리 배는 잘해야 5노트 속도가 나올 텐데 그에 비해 그레이스 하버 조류는 어떤가요"와 같은 '니 생각은 어떻니' 류의 질문에는 어김없이 퇴짜를 놓았다. 바 상태 문의로 시작했다가 곧 심리 상담으로 넘어갔던 라 푸시 코스트가드와의 통화랑은 느낌이 많이 달랐다. 코스트가드도 장소마다 성향이 다른 것 같다.


여하튼 일찍 일어나 제시간에 떠날 준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시간이나 늦어진 출항 탓에 조바심을 안고 라 푸시를 떠났다.



무풍


어제부터 분다던 북풍은 아직도 자취가 없었다. 출항 직후 뱃머리 바람이나마 조금 부는 것 같아 얼른 세일부터 올렸으나 곧 이마저도 사그라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바람이 불어줘 도착 시간을 앞당길 수 있다면 정말 고마울텐데 우리는 5노트 엔진 항해 속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22:00가 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코스트가드의 도움으로 해낸 첫 번째 경험 다음으로 이제 겨우 두 번째 바 크로싱인데 다들 웬만하면 피하라던 오밤중 바 크로싱을 하게 생겼다.


라 푸시와 그레이스 하버 사이, 배가 닻 내릴 수 있을만한 곳이 있나 찾아보니 디스트럭션 아일랜드Destruction Island 라는 섬이 있었다. 태평양에서 불어오는 강풍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닻 내림 포인트로, 옛날에 어선들이 피항하던 곳이라고 한다. 그러나 온라인 리뷰를 읽어보니 응급 상황에나 고려할 닻 내림 포인트인 것 같았다. 게다가 야간 바 크로싱을 피할 목적으로 이곳에서 하룻밤 쉬기에는 여전히 그레이스 하버에서 너무 먼 곳이기도 했다.


다시 한번 '정거장 건너뛰고 야간 항해'의 가능성이 머리를 들었다. 해도를 통해 지형을 연구해 보았다. 날씨도 흐리고 추운데 이 동네 지명들은 더 추웠다. 디스트럭션 아일랜드(파멸의 섬) 뿐 아니라 그레이스 하버Grays Harbour는 왠지 잿빛(gray)의 황량한 항구일 것 같은 이름. 그 밑으로는, 남아프리카 희망봉Cape of Good Hope 에 다녀온 사람이 이름 붙인 듯한 케이프 디스어포인트먼트Cape Disappointment(실망봉)도 있다. 아스토리아 가기 직전에 지날 곳인데, 거기서 대체 무슨 실망을 하게 된다는 걸까?


"어엇!"


놀라 고개를 드니 선주가 급히 뱃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바다 한가운데 난데없는 그물이 뱃머리 앞에 가로놓여 있어 하마터면 정 중앙에 골 넣을 뻔했다. 우리는 해안에서 3마일이나 떨어져 항해하고 있었는데 게통발뿐 아니라 그물까지 만날 생각은 미처 못했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보니 그물의 양쪽 끝에 달린 부표가 작고 거의 보이지 않았다. 부표를 향해 바다수영하던 철인의 날카로운 눈 덕에 값비싼 예인 경험담을 얻을 위기는 모면했지만, 여길 밤에 지나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면 간담이 서늘했다. 정거장 건너뛰려다 해안 가까이에서 야간 항해를 하게 되는 상황은 웬만하면 피해야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광풍


노라도 저어 속도에 도움이 되고픈 안타까운 마음으로 엔진 항해를 한 지 일곱 시간 만에 드디어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한 가닥의 바람도 낭비하고 싶지 않은 심정으로 모든 세일을 활짝 열었다.


점차 배꼬리 쪽에서 부는 바람의 방향이 강해지면서 세일을 줄였지만 최소로 줄인 메인세일과 스테이세일만로도 6-7노트의 속도가 나왔다. 왜 중간은 없는 걸까? 이제는 너무 센 것 같았다. 파도도 '나 태평양이야' 하고 있으니 오토파일럿을 끄고 조타대를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미처 파도에 적응하지도 못한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발생하고 말았다. 스테이 세일 시트가 당겨지지도, 풀어지지도 않았다. 강풍에서 시트 조정이 안되다니 머리털이 쭈뼛 섰다.


바다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뱃머리에 나가 확인을 해야 했다. 칼과 플라이어를 허리춤에 차고 구명조끼에 안전줄을 연결한 뒤, 잭라인을 따라 몸을 숙이고 앞으로 나아갔다. 자꾸 배 안으로 들어오는 파도에 통기성 좋은 러닝화가 흠뻑 젖었다. 방수 부츠 같은 건 없다. 작은 가방 안에 미니멀한 디자인의 소가죽 밑창 패션 샌들과 조리 슬리퍼만 넣고 비행기에 올랐던 나는 밴쿠버 출항 직전에 그나마 이 러닝화라도 구매했다. 나는 무슨 생각으로 기본적인 장비도 없이 여기에 와 있는 걸까.


뱃머리에 도착해 보니, 스테이 세일 블록 도르래 바퀴에 해져서 풀린 폴리에스테르 줄 가닥이 끼어 있었다.



안일주의의 위험


붐 위로 접은 세일을 줄로 묶어 고정하는 일은 바다 위에서, 그것도 손이 모자란 상태에서 하기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 배의 이전 선주는 이탈리아에서 ‘돈벌레’라고 불리는 세일 묶는 시스템을 설치했었나 보다.


작은 세일링 요트에서 주로 보이는 시스템인데, 돈벌레 다리 같은 짧은 줄이 일정한 간격으로 항상 대롱대롱 달려 있게 하는 방식이다. 세일 묶는 줄이 항상 준비된 상태로 달려 있으니 작업이 빠르다. 다만 이 배의 경우 고무줄 대신 폴리에스테르 로프로 만들어져 있어 긴 줄이 항상 밑으로 늘어져 있었다. 이것이 메인세일에서는 큰 문제가 아닐 수 있지만 스테이세일은 밑단이 낮아서 늘어진 줄이 배 앞부분을 여기저기 쓸고 다니며 어딘가 걸릴 위험이 컸다. 그동안은 그래도 문제가 없었는데 거친 바다와 붐의 격렬한 움직임으로 끝부분이 닳아 가닥 풀린 줄 하나가 도르래 안으로 끼어들어갔나 보다. 불안했지만 지금껏 잘 작동했으니 문제가 없을 거라며 방치했던 부분이 하필 이런 안 좋은 상황에서 터져버렸다. 뱃사람 덕목 중 하나로, 지금까지 멀쩡하게 작동했던 것도 믿지 말고 경계하라는 말이 있는데, 딱 우리에게 필요한 충고였다.


이번엔 운이 좋았다. 뱃머리를 바람을 향하게 해서 세일에서 힘을 빼니 도르래에 끼인 가닥을 손 힘만으로 빼낼 수 있었다.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테이세일의 돈벌레 시스템 일체를 풀어 제거해 버렸다. 호라이즌스 호는 성난 황소처럼 격렬하게 요동쳤고, 뱃머리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몇 차례 몸이 공중으로 들렸다. 분명 쌀쌀한 날씨였는데 기어서 콕핏으로 돌아오고 나니 온 몸이 땀으로 젖어 있었다.


배의 최적 세팅은 그 배를 가장 많이 타는 선주가 가장 잘 알게 마련이다. 배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배 상태에 가장 크게 영향을 받는 사람이 선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인의 안전하고 편안한 세일링을 위해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는 기본적으로 합리적인 이유가 있을 것을 가정한다. 더군다나 이전 선주는 우리가 목표로 하는 멕시코에 다녀온 노련한 세일러라고 하니 웬만하면 그 설정을 그대로 유지하는 게 좋은 전략처럼 보였다. 그러나 콕핏으로 돌아와 메인세일 묶는 줄의 상태를 살펴보다 당황스러운 디테일을 발견했다:

물구나무 중(좌)

메인세일을 조정하는 시트에는 큰 하중이 걸리기 때문에 최소한의 저항으로 부드럽게 줄이 미끄러지도록 설계된다. 그런데 시트가 도르래 바퀴에 걸치지 않고 그 아래로 우회하며 나무와 금속에 쓸려 마찰을 일으키고 있었다. 콕핏에서 메인시트 조절이 안 되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배를 살 때 '절대로 메인 세일 2단계 축범해 놓은 것은 풀지 말라'는 경고를 들었다는 선주의 말이 떠올랐다. 블록에 잘못 걸린 시트 마찰력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들었다.



두 번째 바 크로싱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러나 단 둘이서 바람과 파도와 싸우고 있었으므로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오토파일럿을 몇 번 시도해 봤으나 번번이 포기했다. 강풍에 경로 유지를 하지 못해 수동 조타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레이스 하버가 멀지 않은 곳에서 세일을 내리는 순간까지도 바다는 가라앉지 않았다. 이 성난 배 위에서 세일을 내리는 데에 걸리는 시간 상당 부분이 세일을 묶는 시간이고, 위태롭게 서 있는 사람이 양손을 다 사용해야 하므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항구에 머무는 동안 이것도 뭔가 해결책을 마련해야 할 것 같았다.

남서쪽으로 뻗은 바 채널 끝까지 가지 않고 중간에 진입할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우리는 처음이니까 길이 멀더라도 정석을 따르기로 했다. 19:00 즈음에 그레이스 하버 바 입구를 가리키는 첫 번째 부표에 도착했다. 그리고 좌회전을 해 진입을 시작했다. 강풍 때문에 진은 좀 빠졌지만, 그래도 덕분에 아직 해가 있을 때 바 크로싱을 시작할 수 있어 다행이었다.




바 채널의 길이는 7.5해리, 밀물 덕에 6노트 이상의 속도가 나오고 있었다. 방파제 안으로 진입하니 이제 명백히 바다가 잔잔해졌다. 오늘 일몰 시간은 20:00, 운이 좋으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 채널은 라 푸시보다 훨씬 넓었다. 맞은편에서 바를 건너 출항을 하고 있는 세일링 요트 하나로부터 VHF 라디오로 연락이 왔다. 캐나다를 향해 가는 배였는데 우리 배에 캐나다 국기가 달린 것을 보고 연락했단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물었다:


"지금 바 크로싱 어땠어요?"

"별거 없어요!"


타이밍만 잘 맞추면 이렇게 평화롭게 건널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에 안심이 되었다. 다만 저들은 밀물 조류에 역행을 해서 나가고 있는 상태일 텐데 바 건너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렸을까 궁금했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나가는 건 오프쇼어로 나가기 때문인 것일까. 한동안 북풍이 분다고 하는데 강한 뱃머리 바람을 역행하며 가려는 것도 미스터리였다. 배 뒤쪽으로는 해가 지고 있는데 아직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았다.




어둠이 내리니 초조함이 가슴을 옥죄었다. 어느새 불 켜진 부표들과 플로터의 정보를 이중 체크하며 목적지인 그레이스 하버의 웨스트포트Westport 마리나를 향해 나아갔다. 이제 꽤 안쪽으로 들어왔는데도 바람은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낯선 마리나를 향해 가는 길은 더욱 막막하게 느껴졌다.


"새벽 세시에 엔진 없이도 입항해 봤어요."


불안해하는 선주를 안심시키기 위해 일부러 태연한척 했다. 엔진이 고장난 요트로 새벽 세 시에 세일 펴고 입항한 것은 내가 아니라 베테랑 스키퍼였고, 당시엔 다섯 명이나 승선해 있었다. 하지만 두려울 때 동지의 담담한 표정과 말 한마디가 얼마나 큰 안도감을 주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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