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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16. 2024

라푸시의 백마 탄 왕자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점점 악화되는 느낌인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는 걸까 막막했다. 다행히 긴 대기 시간 동안에도 통신은 끊기지 않고 이어졌다. 특별한 전달사항이 없을 때에도 코스트 가드는,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입니다.”


단순히 우리가 VHF 수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메시지를 보내곤 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을 해서 통신 대기 중임을 알렸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입니다. 듣고 있습니다" 


VHF통신을 할 때 이렇게 상대를 세 번 반복해 호명해야 하는데, 같은 단어를 반복하느라 혀 꼬임 현상을 피할 수 없었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가까이 도착하고 있습니다”


안개를 뚫고 코스트가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아.. 우린 대체 왜 작은 고무보트 하나가 나타나 앞장서며 길잡이 해주는 상상을 하고 있었던 것인가! 눈앞에는 제2차 세계대전 해전을 다룬 할리우드 대작 영화에 등장할 법한 웅장한 알루미늄 구명정이 있었다. 그 위에 남색 제복, 구명조끼에 쌍안경까지 든 대원들의 모습에 압도되었다. 위층 두 명 아래층 세 명 이렇게 다섯 명이나 줄을 맞추어 서 있었다. 우리가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것인가 순간 정신이 아찔했다. 무섭다는 말 한마디가 이 많은 사람들과 큰 배를 출동시키고 말았다.


코스트가드는 예인이 필요하지 않음을 다시 한번 확인한 뒤 앞장서 에스코트를 시작했다. 한 시간 가까이 흔들리는 배 위에서 불안에 휩싸여 있다가 코스트가드가 눈앞에 나타나니 단순한 안도감 이상의 어떤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우리 배와 부딪칠 듯 부딪칠 듯 접근하면서 우리 상태를 확인하고 다시 능숙하게 앞서 조타해 앞서 가는 코스트가드의 뒷모습이 마치 백마 탄 왕자 같아 보였다.


우리는 새끼 오리가 엄마 오리 따라가듯 코스트가드 배꼬리를 충실히 따라갔다. 현재 경로와 우리가 계획했던 경로를 비교하며 혼자였으면 어떻게 했을지 상상하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코스트가드는 VHF 통신을 통해 주변의 위험 요소를 알려주기도 했다. 예를 들어, 우리 오른쪽에서 해저를 파내고 있는 준설선에 대한 정보 같은 것이었다. 오른쪽을 돌아보니 조각배 위에서 작업하는 사람의 아련한 실루엣이 보였다. 인디언 마을의 원시적인 준설 작업에 감탄하고 있자니 그 앞으로 거대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현대식 준설선이었다. 좀 전의 조각배는 고기잡이 배였던 모양이다. 이 안갯속, 이 좁은 뱃길 안이라고 고기잡이 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사 입항


알루미늄 구명정은 마리나 안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해 주었다. 무사히 입항하자 이제 우리의 걱정은 라 푸시 마리나에 빈자리가 있을까였다. 며칠째 전화도 받지 않고 이메일도 답이 없어 예약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빈자리가 많아 가장 접근이 쉬워 보이는 선착장을 골랐다. 이곳은 주로 소형 낚시 보트들이 계류하는 마리나로, 레저 선박들은 큰 관심사가 아니며 운영하는 사람들이 좀 '느긋하다'는 리뷰가 많았다. 선착장에 접근하자 긴 금발머리를 뒤로 묶은 남자가 다가와 계류줄을 잡아주었다.


"여긴 기둥이 하나 빠져 있어 위험할 텐데요."


배를 대고 보니 정말로 선착장 한 귀퉁이가 기울어 있었다. 배에서 내린 뒤 줄 잡아준 남자에게 인사하고 감사를 표하는 사이 코스트가드 두 명이 호라이즌스 호에 승선했다. 함장으로 보이는 건장한 체격의 대원과 그 뒤를 서류철 들고 따르는 어린 대원의 등 뒤로 긴장한 선주의 얼굴이 보였다. 코스트가드 배를 뒤따라 오는 동안에도 선주는 걱정이 많았었다.


"에스코트받은 배는 코스트가드가 승선해서 배랑 안전장비 다 점검하고 뭐 하나 걸리면 벌금 크게 문다는 소리가 있던데."




다섯 명의 코스트가드가 승선한 구명정을 앞장세운 요란한 등장과 태연하게 계류줄을 받아 기울어진 선착장에 배를 묶어주는 금발머리의 여유로운 동작이 인지부조화를 일으켰다. 이 어색한 고요를 깨기 위해 그냥 물어봤다.


"바 크로싱 혼자 하신 거예요?"


늘 그렇듯, 배를 묶고 나자 바람은 잦아들고 있었다.


"아, 저는 여기 살아요."


전형적인 원주민 마을 라 푸시에서 계류줄 잡아준 사람이 푸른 눈에 금발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처럼 지나가는 세일러라고 생각했으나 이곳 주민이었다. 라 푸시가 좋아 몇 년 전 이사를 온 사람으로, 마리나에서 배를 고치고 있었다고 했다. 궁금하던 바 크로싱에 대해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그럼 밀물이 시작되기 전에 나가더라도 큰 문제가 없을까요?"


라 푸시와 그레이스 하버 사이의 항해는 항상 물음표로 남아 있었다. 항구들 사이 거리가 길기로 악명 높은 미국 북서부에서도 이 구간은 특히나 길다. 75 해리, 5 노트 속도를 잃지 않고 최적항로를 정확히 따라가다고 해도 무려 15시간이 소요되는 거리이다. 매일 한 시간씩 늦춰지는 조수 시간 때문에 내일 아침 바를 건너기에 이상적인 시간은 07:00이 훨씬 지나서야 오는 반면, 이제 해가 짧아져 일몰 시간은 20:00으로 당겨졌다. 날 밝을 때 그레이스 하버에 도착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출항 시간을 조금이라도 앞당길 수 있다면 해 지기 전에 도착할 수 있을 텐데..


그때 젊은 커플이 다가와 금발머리에게 인사했다. 이들도 멕시코까지 내려가는데, 라 푸시 마리나로 배송시킨 구명정을 기다리느라 발이 묶여 시간을 때우고 있다고 했다. 물어보니 어김없이 오프쇼어로 나갈 계획이라고 했다. VHF 라디오를 싣고 오지 않았던 우리 배도 모범 요트라고는 할 수 없지만, 구명정도 없이 출항을 하는 경우는 어떤 경우인 걸까 궁금했다.


마침 그때 선주와 함께 배 실내로 들어갔던 코스트가드들이 콕핏으로 올라오는 것이 보였다. 선주와 악수를 하고 배에서 내려 걸어오는 얼굴들이 밝게 빛났다. 강렬한 눈빛과 미소에, 나도 얼떨결에 악수를 하고 말았다. 선임 대원과 조수 대원 순서대로, 한 명씩. 자동 반사적으로 이런 말까지 뱉게 되었다:


"땡큐, 써Thank you, sir"


안전 검사를 무사히 통과한 것은 명확해 보이나, 어쩌다 코스트가드와 악수까지 하는 분위기인가 궁금해 배로 올라갔다. 선주가 명랑하게 말했다:


"내가 마지막에 그 말을 해서 그런 것 같아.. 젊은 대원 눈이 빛나더라고…"

"그 말이라뇨?"



두 번째 긴장의 순간


내가 밖에서 수다 떠느라 선주 혼자 맞이했던 배 안의 상황은 이랬다고 한다:


계류가 끝난 후에도 아무 소식이 없으니, 캐나다와 달리 미국에서는 안전검사가 없는 줄 알고 선주는 마음을 놓고 있었다. 그 순간 건장한 두 명의 군인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치 전쟁 영화 소품 같았던 웅장한 배와 코스트가드 출동 인원에 놀란 가슴을 달래기도 전에 군복에 부츠 신은 사람들을 배 위에 맞이하며 선주는 이렇게 생각했다고 한다.


“에스코트의 대가를 이렇게 치르는구나…”


대원들을 실내로 안내했더니, 요트 등록증과 선체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오수 탱크의 위치부터 물었다고 한다. 오수 탱크는 화장실 오물을 직접 바다에 배출하지 않고 저장하는 탱크이다. 대부분의 유럽 국가에서는 소형 레저 선박에는 의무 사항이 아니지만, 미국에서는 오수 탱크가 없거나 레버가 '배출' 방향으로 놓여 있으면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았다. 호라이즌스 호에는 오수 탱크가 있지만, 사용법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미국 해역 오염물질 배출 규정 안내 스티커 부착 여부, 소화기와 구명 장비 유효기간 등을 선임 대원이 차례로 묻고 하나하나 점검하면 어린 대원이 서류철에 기록했다. 그 모습을 보며 선주는 에스코트 요청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고 결정한 것 같다는 자책에 시달렸다. 스티커는 없었고 구명 장비 중 자기 점화등은 작동이 되지 않아 공포의 순간들은 이어졌다. 그런데 코스트가드는 오히려 '의례적인 절차'라며 불안해하는 선주를 안심시켜 주었다. 잘 보이는 곳에 붙이라며 오염물질 배출 규정 스티커를 주고 고장 난 자기 점화등 대신 자기발연 신호 비치를 권유하며 호의적인 분위기에서 안전검사를 끝내자, 선주는 이 고마운 사람들을 그냥 보낼 수 없었다고 한다.


"영화에서만 봤었는데 실제로 만나 보니 왜 코스트 가드를 영웅으로 생각하는지 알겠어요!"



달밤의 라 푸시


바람이 잦아든 뒤 건너편의 멀쩡한 선착장으로 배를 옮기는 데에도 금발머리가 나타나 도움을 주었다. 인터넷 리뷰가 칭찬 일색이었던 마리나 옆 식당에 대해서 묻자,


"뭐 식당이라고 그거 딱 하나니까요."


마리나 오피스 위치를 물어보니,


"가 봐도 소용없어요. 닫혀 있을걸."


이메일이나 전화 연락이 안 되던데 일찍 출항하는 배는 계류비를 어떻게 내는지 묻자,


"뭐 어쩔 수 없는 거죠. 그냥 가야지."


별로라고는 했지만 우리는 100% 원주민들이 운영한다는 식당에 큰 기대를 안고 있었다. 샤워는 아직 못했지만 오랜만에 깨끗한 재킷도 걸치고 문명인의 행색으로 식당에 도착하니, 줄이 건물 밖까지 늘어서 있었다. 식당 규모도 큰데 줄이 이렇게 길다니 배고픔과 함께 기대가 무르익었다.


그러나 긴 기다림 끝에 테이블을 배정받고 보니 대단한 해산물 정식은 간데없고 피시 앤 칩스, 크림 차우더 등의 간편 식사 메뉴밖에 없었다. 음식이 나오는 데에만 한 시간이 넘게 걸렸고, 그 사이 안타깝게도 해가 져 버렸다. 현지 주민의 조언을 들었으면 배에서 요리를 해 먹고 나와 멋진 곳에서 석양을 즐길 수 있었을 텐데.


식당을 나와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길을 걷다 오른쪽에서 들려오는 파도 소리를 따라갔다. 덤불을 빠져나오자 난데없이 너른 모래 해변이 펼쳐졌다. 휘영청 보름달이 떠 파도를 밝게 비추고 있고, 아직 붉은 기운이 남아 있는 수평선에는 마치 토템 같이 줄 맞추어 서 있는 바위섬들이 독특한 실루엣을 그리고 있었다. 저 바위들이 라 푸시 명물이라는 퀼류트 니들스Quillayute Needles 인 듯했다. 이 해변은 미국 북동부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 중 하나라고 하는데, 정말 꿈속에서나 만날 듯한 별나라 풍경이었다. 긴장 속의 새벽 출항부터 안개, 태평양 진입, 파도, 코스트 가드 에스코트까지 버라이어티 한 하루를 보낸 뒤의 피로도 우연히 마주친 아름다움에 녹아 사라졌다. 이틀 뒤부터 강풍이 예보되어 있어 라 푸시에 며칠 머물 계획이었다. 여유 있게 동네 탐험도 하고 오랜만에 달리기도 할 생각을 하니, 피로가 물러간 자리에 활력이 채워지는 것 같았다.


글로도, 사진으로도 표현하기 어려운 아름답고 신비로운 달밤의 해변에는 마치 거인나라 나무처럼 생긴, 희고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여기저기 누워 있었다. 인조물이나 문명의 흔적이 없는 이곳의 풍경은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 같았다. 유일한 차이점은 모래밭을 거니는 사람들이 주로 외지인이라는 점일 것이다. 가장 원시적인 교통수단을 타고 와 이런 곳을 방문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런 멋진 곳을 삶의 배경으로 삼았던 이 지역 아메리카 원주민들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는 것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다만 타인 관점의 판에 박힌 '인디언'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니아 베이나 라 푸시 모두 안개가 많고 서늘했는데, 날씨가 이런 이미지에 일조했을 수도 있다. 무의식 중에 '신비로운 인디언 마을'을 찾고 있었던 것이 어쩌면 '신비로운 동양'을 찾아 헤매는 서양 바보들과 같은 태도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혼이 깃들지 않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아름다운, 달리기 좋을만한 산책로도 있고 샤워할 수 있는 RV 캠핑장 위치도 확인해 놓은, 며칠 함께 지내며 좀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 친절한 현지인 친구도 벌써 만들어 놓은 라 푸시를, 그러나, 다음날 새벽 떠났다. 의도치 않게 무전 계류도 하게 되었다.


우리가 여태까지 머물렀던 곳 중 가장 아름다운 곳을 이렇게 밤 산책 한번 하고 아쉽게 떠나는 것이 옳은 결정인가 고민이 많았고, 어제 항해로 인한 피로도 여전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 떠나지 않으면 강풍 때문에 며칠 발이 묶일 상황이었다. 멕시코로 가는 좁은 시간의 문이 매일 작아지는 것 같아 부담이 되었다. 갈수록 늦어질 출항 바 크로싱 타임, 갈수록 당겨질 일몰 시간, 갈수록 커질 조바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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