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있을까
새벽부터 비바람이 몰아쳤다. 어제 위액이 올라올 정도로 과식을 했는데 그 탓인지 배도 묘하게 아팠다. 오늘 아침은 콕핏에도 나가지 않고 실내에서 잠옷 바람으로 바 크로싱 복습이나 하기로 했다. 선주와 나 둘 다 이해도가 낮은 상태이므로, 각자 조수와 날씨 정보를 조사한 뒤 결과물을 비교해 보기로 했다. 라 푸시 입항에 실패한다면 그레이스 하버까지 항해를 계속해야 하므로 내일 예보뿐 아니라 앞으로 며칠간의 추세도 살필 필요가 있었다.
케이프 플래터리를 지나면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리게 되므로 피해야 할 바람은 남풍인데, 오늘부터 잦아들고 내일부터 닷새 이상 북풍이 불 것으로 예보되어 있다. 오프쇼어로 나가는 알루미늄 배 친구들도 내일 아침에 출항할 것이다. 이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소위 '웨더 윈도우weather window'(알맞은 날씨가 연속되는 기간)가 내일부터 시작될 것 같다. 우리는 태평양에 처음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바람이 약한 날이 좋을 것 같다. 남풍에서 북풍으로 바뀐 직후인 내일이 딱 적당해 보인다.
어려운 부분은 조수, 즉 바다의 오르내림이다. 종류가 여러가지이고, 개념부터 매우 헷갈린다. 해수면이 가장 높을 때를 만조라고 한다. 해수면이 가장 낮을 때는 간조라고 한다. 썰물은 만조에서 간조로 물이 빠져나갈 때를 말하고, 밀물은 간조에서 만조로 물이 들어올 때를 말한다. 그 둘 사이 물이 들어오지도, 빠지지도 않고 잠시 멈추어 있는 게조라는 것도 있다. 배의 속도를 빠르게도 느리게도 하지 않고 조류의 영향이 최소가 되는 순간. 지난번 액티브 페스를 통과할 때는 단순히 게조 시간에 맞추면 되었지만 바 크로싱은 얘기가 좀 다르다.
책에서는 입항이나 출항 모두 바 크로싱을 밀물 시간에 해야 한다고 하지만, 직관적인 이해가 어렵다. 밀물이 배를 앞으로 밀어주는 입항은 몰라도, 출항도 들어오는 밀물을 거슬러 해야 한다니 뭔가 이상하다. 이 동네 조류 세기가 무섭던데, 호라이즌스 호의 엔진으로 아무리 전진해도 제자리걸음이지 않을까? 게다가 바 크로싱을 할 때 따라가야 하는 물길 안에서는 세일 올리는 것도 금지이다.
하지만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은 내 문제이고, 안전이 최우선이므로, 밀물에 입항한다는 전제 하에 라 푸시와 그레이스 하버 입구의 날짜별 간조와 만조 시간을 꼼꼼히 기록해 두었다. 같은 페이지에 간조와 만조 시간을 적고 보니, 이 시간들이 매일 한 시간씩 뒤로 밀리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예를 들어, 라 푸시의 내일 저녁 만조는 20:20인데 내일모레는 21:30, 그다음 날은 22:40이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입항할 수 있는 밀물 시간 역시 점점 뒤로 밀리고 있다는 말이었다.
반면, 이제 해는 날마다 눈에 띄게 짧아지고 있었다. 날 밝을 때 입항할 수 있는 날도 며칠 남지 않은 것 같은데, 책마다 바 크로싱은 야간에 하는 것을 피하라고 하니 혼란스러웠다. 다시 한번 겨울에 쫓기는 느낌에 휩싸였다. 멕시코로 가는 문이 매일매일 좁아지는 것 같아 조바심이 나기도, 이렇게 조바심을 내며 서두르다 위험한 상황에 빠지게 되는 건 아닐까 막연한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안개와 비도, 추운 이불 밖도 참 싫다. 햇볕 좋고 따뜻한 곳에 있고 싶은 마음은 간절한데, 비로소 온화한 기후가 시작될 캘리포니아는 여기서 너무나 멀다.
출항 전 중요한 숙제가 남았다. 내일 도착할 라 푸시 코스트가드에 전화해 예상 도착시간의 바 상태를 묻는 것이었다. 신호음이 울리자마자 금방 전화를 받는 수화기 너머 코스트 가드의 목소리가 매우 친절했다.
"태어나 처음 하는 바 크로싱이라 긴장이 돼요."
그래서 얼굴도 모르는 남의 나라 공무원한테 이런 심정도 토로하게 되었나 보다.
"정 불안하면 우리한테 에스코트를 요청해도 돼요."
와, 정말 이렇게 친절한 사람들이 있나. 아스토리아 친구들 말이 맞았다. 꼭 배가 침몰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코스트가드에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나 보다. 덕분에 라 푸시에서 바 크로싱에 실패한 뒤 그레이스 하버까지 한번에 가야 할 걱정은 사라졌다.
포트 앤젤레스에서도 연료를 꽉 채우고 출항하긴 했지만 오후 늦게 닻을 올려 주유소에도 다녀왔다. 며칠 쉰 배가 혹시나 시동이 또 안 걸릴까 걱정하는 마음도 있었고, 연료 소비에도 무슨 이상한 점이 있지 않을까 점검해야 했다. 주유 선착장은 우리가 닻 내린 곳에서 0.5 마일쯤 떨어져 있었다.
연료 탱크에 들어가는 디젤의 양과 마지막 주유 후 엔진을 사용한 시간을 비교해 보니 연료가 좀 많이 소진됐다. 호라이즌스 호와 비슷한 체급의 요트 시간당 연료를 3리터로 계산하는데 우리는 무려 3.85리터나 쓰면서 왔다. 다만, 시간당 연료 소모량을 정확하게 계산하려면 더 긴 시간을 기준으로 해야 하므로 항해수첩에 기록하고 나중에 찾아보기 쉽게 밑줄만 쳐 놓았다.
주유 후 원래 자리로 돌아와 다시 닻을 내리고 실내에 내려가니 또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엔진룸을 열어 보니 엔진룸 덮개 안쪽에 덕지덕지 검은 오염이 되어 있고, 엔진 아래쪽 액체 받이가 가득 차 있었다. 공식 기술고문 태민 씨에게 전화해 물어보니 엔진 벨트가 어딘가에서 마모되어 오염을 일으킨 것 같다고 했다. 포트앤젤레스에서 기술자들을 부르기 전, 우리가 엔진을 이리저리 만져보는 중에 건드린 적이 있는데 혹시 그 탓이 아닌지 모르겠다.
수많은 불확실성을 안고, 내일 드디어 나간다. 태평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