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SAILING Oct 07. 2024

환희의 니아 베이

아직도 믿기지 않아

선착장이 꽉 찼다. 막다른 끝까지 들어가 봤지만 빈자리가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배를 돌려 빠져나갈 만한 공간도 만만치 않았다. 호라이즌스 호의 풀킬이 물 빠져 진흙 위에 앉을 때야 유리하지만, 이렇게 좁은 공간에서 배를 돌려야 할 때에는 난감하다. 


프로펠러가 한 개 달린 배는 후진할 때 한쪽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있는데, 풀킬 요트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이 역시 조타가 어렵게 하는 원흉이지만, 반대로 이용할 수도 있다. 호라이즌스 호는 후진하면 시계 방향으로 배가 돌아가므로,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배를 시계 방향으로 돌리면 좁은 반경 안에서도 배를 돌릴 수 있다. 선착장의 막다른 끝에서 짧은 전진 후진을 반복하며 프로펠러 효과를 살려 배를 돌리는 동안 온 동네 선주들이 불안한 얼굴로 밖으로 뛰쳐나왔다. 대부분은 줄이라도 잡아주겠다는 친절한 사람들이었지만, 좁은 공간에서 배 돌리느라 진땀 빼고 있는 사람에게 


"지금 뭐 하겠다는 거예요?!" 


라며 소리 지르는 인간도 물론 있었다. 선입견을 갖고 싶지는 않지만, 이런 불쾌한 상황에는 어김없이 덩치 큰 플라이 브리지 파워요트가 연루되어 있다. 드넓은 바다에서 굳이 세일링 요트 가까이 지나가며 민폐성 파도를 남기고 가는 부류, 오토 파일럿을 돌려놓고 '알아서 피해라'는 무모한 태도로 전면 주시를 안 하기에, 우선권이 있는 세일링 요트도 안전을 위해 뱃머리를 돌리는 것이 나은 그 부류 말이다. 나는 이런 부류가 지중해에만 있는 줄 알았는데, 미국에서도 비슷한 무례함과 이기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간신히 자리를 찾아 배를 묶고 실내에 들어가니 기름 냄새가 진동을 했다. 이번엔 엔진 오일 밸브가 잠겨 있음에도 엔진 오일 압력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하얀 연기도 그렇고, 이전에는 없던 증세들이다. 이제는 선주가 매일 아침 엔진룸을 열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시 포트앤젤레스였다. 처음 여기에 들어왔을 때가 기억났다. 그땐 이렇게 오래 머물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제 여기가 집 같은 느낌이다.



두 번째 출항


여기 친구들에게 배운 팁이 항상 뱃머리가 출구를 향하게 묶어 두라-라는 것이었다. 뱃머리를 입구가 향하게 돌려 놓아야 비상 상황에 재빨리 항구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단기 체류 배들의 선착장은 길게 일자로 뻗어 있는데, 서쪽 끝의 입구에서 들어오면 반대쪽 끝은 막다른 곳이다. 그래서 뱃머리가 입구를 향하거나 입구를 등지거나 중에서 선택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호라이즌스 호는 없는 자리를 만들어 계류하느라 마리나 끝 막다른 곳에 입구와 90도를 이루고 묶을 수밖에 없었다.

이제야 비로소, 굳이 비상 상황이 아니더라도, 배가 쉽게 항구를 빠져나오기 쉽도록 계류해 놓지 않으면 나중에 애를 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몸소 체감했다. 이른 새벽 시간 출항하려는데, 서쪽의 입구 쪽에서부터 바람이 불고 있었다. 배를 선착장에 밀어 붙이는 강풍 속에서 배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간신히 주위 배와 부딪히지 않고 배를 돌려 막 빠져나가려는 찰나, 어제의 그 파워요트가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십 년 감수를 했다. 엔진 예열을 오랫동안 했고 배 돌리는 데에도 시간이 오래 걸렸기 때문에 우리가 곧 나간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을 텐데, 뱃머리 바로 앞에서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우리를 앞질러 나갔다. 가끔 내가 이 부류의 인간들에 대해 지나친 선입견을 가지고 있지는 않나 싶을 때도 있지만, 이런 소소한 경험들이 내 믿음을 더욱 확고하게 한다.


오늘은 하루 종일 서풍이 예보되어 있었다. 이 바람은 니아 베이까지 가는 내내 뱃머리에서 불어와 배의 속도를 느리게 할 참이었다. 어제는 출항하기 참 좋은 날이었는데 오늘은 안개도 있고 부슬부슬 이슬비까지 내렸다. 하지만 우리에겐 이제 설치형 VHF 라디오가 있다! 배 돌려 포트 앤젤레스에 돌아간 덕은 앞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기든 코스트 가드를 부를 수 있다고 생각하니 날씨가 궂어도 마음이 편했다. 출항 후 9시간쯤 지나 난데없이 짙은 안개 더미 속에 파묻혔을 때까지는.



피할 수 없는 안개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이 근방 세일링을 한 사람들의 후기를 읽을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어려움이 안개이다. 수평선이 보이지 않고 사방이 흑백 모노톤이었다. 선글라스 유리에는 계속해서 김이 맺혀 뿌옇게 되었다. 하지만 편광 선글라스를 쓰면 시야가 조금은 길어지는 것 같아 안경을 벗을 수도 없었다.


선주는 즉시 차트 테이블로 내려가 레이더부터 켰다. 호라이즌스 호는 준비된 오프쇼어 요트답게 레이더가 장착되어 있다. 레이더는 주위로 전파를 내보내 반사돼 되돌아오는 전파로 물체를 탐지하는 물건이다. 배만큼이나 오래된 호라이즌스 호의 레이더는 80년대 공상과학 영화에서 봤을법한 뚱뚱한 모니터가 붙어 있다. 이 모니터가 배 주변 물체들을 형광색 점으로 나타내 대략적인 크기나 움직임 등을 볼 수 있게 한다. 한 사람은 종종 아래에 내려가서 주위에 뭐가 있는지 레이더 화면으로 확인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레이더 화면의 점들로만 주위 배들의 이동 속도와 방향을 추적하고 있으려니 심장이 쫄깃해졌다. 가까이 다가오는 형광색 점을 향해서는 뿌앙- 하고 음향 신호도 보냈다. 우리가 신호를 보낸 뒤 경로를 바꾸는 형광 점도 있는 걸 목격한 뒤 사용이 잦아졌다. 뿌아앙- 뿌아앙- 뿌앙이라는 이름도 붙여줬다. 마치 특정 임무만 담당하는 보조 선원 하나가 더 탑승한 것처럼.


압축 공기 캔이 소진되면 버리는 물건이지만, 우리 뿌앙이는 에어 펌프로 재충전이 가능한 형식이라 무한대로 쓸 수 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에서도 콕핏은 분주했다. 한 사람은 조타하고, 한 사람은 연신 실내로 내려가 레이더 확인을 하거나 에어 펌프로 뿌앙이를 충전했다. 서서히 푸른 하늘색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느덧 안개가 걷혔나 싶더니, 이제는 맞바람이 불었다.



드디어 니아 베이


맞바람이긴 하나 정면의 바람은 아니라서 세일을 올린다면 속도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파도와 부딪혀 바닷물이 연신 배 안으로 들어오고 배는 크게 흔들리는데, 우린 아직 잭라인을 설치하지 않은 상태였다. 태평양에 나가기 전까지는 거친 바다를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본격적인 배 준비를 니아 베이로 미뤄두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간의 경험으로 볼 때, 호라이즌스 호는 세일을 올리고 내리는 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다. 지금의 지금 바다 상태로는 위험해 보였다.


대신, 이 배에서 유일하게 현대적인 세일 시스템인 제노아를 펼쳤다. 호라이즌스 호의 제노아는 사람이 데크로 나갈 필요 없이 콕핏 안에서 열고 닫는 게 가능하다. 제노아를 반 정도만 열고 역풍 항해를 해, 해 지기 전 오후 7시쯤 니아 베이에 접근했다. 안개가 걷히자, 물 위로 솟아오른 신비로운 바위가 보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콘크리트 인조 설치물이라고 생각했는데, 물개 바위라고 불리는 자연 암석이라고 한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정말 니아 베이에 도착했고, 곧 아름다운 원주민 마을을 탐험할 것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니아 베이는 미국 북서쪽 끝에 위치한 케이프 플래터리에서 불과 5해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곳은 수천 년 간 이 지역에 터를 잡고 살아온 마카 부족의 고향이다. 마카 박물관은 그 문화와 역사를 배우기에 좋은 곳이라고 들었다. 코로나 시기에는 항구가 폐쇄돼서 배들이 닻은 내릴 수 있었지만 상륙은 금지되었었다. 이제는 그 제한이 완화돼, 마을 방문도 가능해졌다. 여기까지 와서 육지에 못 내리고 지나가야 했다면 얼마나 서운했을까! 


설렘을 안고 방파제 안으로 들어서자 굉장히 넓은 닻 내림 구역이 펼쳐졌다. 하지만 피해야 할 해초 구역과 몇몇 난파선 잔해들이 있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이에 더해 꽤 많은 통발들이 떠 있어 바람이 바뀔 때 배가 안전하게 회전할 영역도 고려해야 했다. 바람이 세게 불 때는 뱃머리에서 닻 내리는 사람과 콕핏에서 조타하는 사람 사이 의사소통이 참 어렵다. 약간의 고함이 오고 간 뒤, 팀워크의 힘으로 닻을 내리는 데 성공했다. 심리적인 것인지 모르겠지만, 언제나 닻을 내린 직후 바람이 잦아드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넓은 닻 내림 구역 건너편에 우리보다 먼저 포트앤젤레스 마리나를 떠났던 친구들의 알루미늄 요트가 보였다. 믿을만한 VHF 라디오조차 없던 우리 배와 비교하면, 이 배는 모든 것이 완벽히 갖춰진 '엄친아' 요트였다. 오프쇼어로 나가기 전에 니아 베이에서 꽤 오래 기다리게 될 것 같으니, 우리가 엔진을 고치고 출항해서 다시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을 남기고 떠났었다. 고무보트도 내리지 않은 것을 보니 이 사람들, 며칠째 배 안에서 두문불출하고 있나 보다. 익숙한 친구 배가 눈에 들어오자 가슴이 또 벅차올랐다. 여정의 마지막이 될 줄 알았던 포트앤젤레스를 떠나 이 불안 불안한 엔진으로 안개를 뚫고 강풍과 파도를 뚫고 니아 베이에 드디어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오늘 밤엔 파티다!”


선주는 신이 나서 오랫동안 벼르고 벼른 파티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출항 직전 시장을 봐서 호라이즌스 호에는 신선한 음식과 와인이 가득했다. 광활한 닻 내림 구역에는 배가 몇 척 없어 다들 멀리 떨어져 닻을 내리고 있었고, 두 어리버리 세일러는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을 발산해야 했다. 이렇게 완벽한 상황에서 우리 항해가 다시 제 궤도를 찾은 것을 축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옛날 기름등도 꺼내 달고, 테이블을 펼친 뒤 블루투스 스피커 음악으로 콕핏을 채웠다. 이렇게 오랜만에 바다 한가운데에서 밤을 맞이하니 정말 좋았다. 정성 가득한 요리와 와인으로 차린 테이블 건너 멀리 보이는 마을은 안개로 덮여 있었는데 해안의 불빛으로 밝게 빛났다. 그리고 그 위로 맑은 밤하늘에 별과 은하수가 보여 숨 막히는 광경을 만들어냈다.


우리가 드디어 후앙 데 푸카 해협의 마지막 정거장, 니아 베이에 도착했다! 정말 최고의 밤이었다.

이전 07화 혹시... 다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