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항해는 재개되는 것인가
월요일 아침, 회의를 했다. 이제 리퍼 엔진이라는 확실한 카드가 생겼으니, 길 잃은 정비사들이 와서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는 데에 눈먼 돈을 쓸 필요가 없다는 데에 의견이 모였다.
릭과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다른 메카닉이 언제 봐도 멋진 공구 트레이를 끌고 배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팔짱을 끼고 머릿속으로 이미 오늘 출장 건을 취소하기 위한 말을 고르고 있었다. 하필 못 돼먹은 크리스가 아니라 인상 서글서글한 릭이 볼 발그레한 어린 친구와 함께 서 있으니 말을 꺼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확신하던 엔진 수리에 실패한 데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고, 이를 근거로 견적서의 가격도 깎아야 하므로 마음을 다잡았다.
릭은 배터리에 연결해 자동으로 블리딩을 시켜주는 펌프 설치를 제안했다. 이걸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펌프를 다시 떼 가져가겠다고 했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이미 은퇴한 짐의 리퍼 엔진에 가 있는 상황. 찬바람이 부는 우리 마음을 눈치챈 릭이 말했다.
"어쩔 수 없죠. 대신 계단 경첩 부러뜨린 건 고쳐도 되나요?"
릭이 내려가 계단 힌지를 교체하는 동안 어린 정비사는 콕핏에 앉아 기다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선주가,
"그냥 저거까지만 해 보게 할까?"라고 물었다.
"뭐? 네? 왜요?"
강렬하고 효과적인 클레임을 위한 논리를 한창 짜고 있었는데 갑자기 화해 모드라니 당황했다. 그러나 선주는, 여태까지 믿고 맡겼는데 실패하더라도 오늘 저들이 제안하는 작업까지는 해 보자고 했다.
릭이 엔진에 블리딩 펌프를 설치하는 동안, 우리는 콕핏에서 어린 정비사와 수다 꽃을 피웠다. 이 친구는 크리스를 대체할 비장의 전문가라기보다는 릭에게 공구를 건네주는 심부름을 하러 온 것 같았다. 금발에 푸른 눈이지만 할아버지가 아메리카 원주민이라 25% 지분 덕에 원주민 신분증을 가지고 있었다. 시즌 중에는 어부로 활동한다는데 이곳에서 그물을 써 어업을 할 수 있는 자격은 원주민에게만 주어진다고 한다.
며칠전 선착장의 어선에서 연어를 한 마리 사 맛있게 먹었는데, 그 어부 역시 긴 흑발에 구릿빛 피부를 가진 매력적인 원주민이었다. 포트 앤젤레스 근처에도 부족이 몇 있고, 니아 베이나 라푸시 같은 곳에 가면 좀 더 본격적인 아메리카 원주민 동네이다. 태어나 미국에 처음 와 본 나는, 대도시보다 이렇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존재감이 큰 곳에서 미국과 첫 만남을 가지는 것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도 하고 있지 않았지만 릭의 블리딩 펌프는 역시 게임 체인저가 되지 못했다.
케케케케케케케켕
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케켕
그런데 릭이 포기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시도했다. 어차피 견적서의 금액은 나중에 따질 것이므로 크게 신경 쓰지 않고 우리는 어린 정비사와 맘 편히 계속 수다나 떨었다. 그런데,
부르르릉!
이 무슨 일이지? 왜 시동이 걸리는 거야? 이제 아스토리아의 판토찌 세일러들은 정상적인 시동 소리에 화들짝 놀라게 되었다. 우리 호라이즌스 호 엔진에서 부르릉 소리가 난다는 것이 믿기지도 않았다. 하루에도 몇 차례씩 너무 오랫동안 메마른 엔진 소리를 들어왔으니 말이다.
릭이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담고 콕핏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블리딩 펌프도 소용없자, 혹시나 싶어 모든 연료 튜브 연결부와 필터들을 처음부터 다시 살폈다고 했다. 그러다 필터 하나에서 두 겹의 오링O-ring을 발견했다. 공기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필터 위아래에 끼우는 고무 링인데, 살펴보니 위쪽에 두 개가 겹쳐 있었던 것이다.
순간 포트 앤젤레스에서 처음 블리딩을 하던 때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선주는 이 필터를 교체하며,
"위쪽 오링이 없었어. 전에 내가 잘못 갈았었나 봐"라고 했었다.
알고 보니 그 오링은 필터 뚜껑에 달라붙어 있어서 보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새 오링을 필터에 끼워 두 개가 겹치자, 그 틈으로 공기가 계속 새어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이 작은 고무링 하나가 그간의 좌절과 분노와 회피성 과식, 과음과 까만 손톱의 원흉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판토찌 시리즈에 역대급 에피소드 하나를 더하게 되었다.
이렇게 끝나는 줄로만 알았던 항해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이 주 넘게 같은 자리에 묶여 있던 호라이즌스 호 선체에는 이제 해초가 자라나고 있었다. 이 멈추어 있던 집이 다시 움직이게 되었다니 그저 얼떨떨했다. 니아 베이, 라 푸시 등에 갈 수 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고 말로만 듣던 바 크로싱도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다른 것 보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도움을 준 친구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마른 엔진 소리가 마리나에 울려 퍼질 때마다 항의 대신 위로를 건네고 행운을 빌어주던 처음 보는 사람들, 대기자 명단이 길고 인기 있는 마리나임에도 우리에게 장기 계류 요율을 적용시켜 준 마리나의 라이언, 아름다운 장발의 폴과 다른 누구보다도 천사 같은 웨이드 할아버지. 감사를 표하며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하니, 웨이드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들을 만나고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게 내겐 영광이에요. 다른 세일러들한테 도움을 받기만 했다고 생각했거든요. 갚을 수 있는 기회를 줘 고마워요. 멕시코까지 크루즈가 평생 기억에 남는 경험이 되길 기원해요."
세일러들 사이의 동료애와 씨맨십이 느껴지는 한 마디였다. 연고 없는 곳에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지만 이런 친구들의 정서적 지지 덕분에 용기를 잃지 않고 버틸 수 있었다.
근처에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줄 수 있을까, 미국 사람들은 원래 이렇게 다들 착한가에 대해 선주와 얘기를 나누던 중 전화 한 통이 왔다. 오늘 릭과 어린 정비사를 대신 출장 보냈던 크리스였다. 오전에 보내온 거한 견적서보다도 더 높아진 금액을 지금 전화로 결제하라고 요구했다. 엔진이 고쳐졌으니 견적서의 요금을 깎기는 어려워졌지만 여전히 몇 가지 이의를 제기할 만한 부분은 있었다. 그래서 일단 새 견적서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자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이봐요.. 지금 당장 결제하거나 아니면 그냥 도망갈 거잖아요."
"뭐라고요????"
릭은 자신의 기지로 대실패에서 대성공으로 극적인 반전을 이뤄냈으니 분명 기분이 좋아 회사에 승전보를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크리스는 엔진이 고쳐졌으니 우리가 도망갈까 봐 걱정되었던 모양이다. 계산서를 먼저 보여달라는 합리적인 요청에 발끈하는 것도 어이없었지만, 계산서도 주지 않고 결제를 요구하면서 우리가 도망갈 의도가 있다고 암시하는 것은 더욱 무례했다. 역시 친절한 사람들을 몇 만났다고 이를 '미국인'으로 묶어 일반화하면 안 된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나도 언젠가 이 은혜를 도움이 필요한 다른 이에게 갚을 기회가 있을까 생각했다. 포트앤젤레스에서 지내는 동안 배는 멈추어 있었지만, 항해에 대한 내 생각은 구체적으로 발전했다. 나는 원래 선주가 원만하게 항해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한 달만 배를 함께 탄다는 약속으로 왔다. 계획대로라면 이제 돌아갈 시간이 다 되었다. 하지만 여기 발이 묶여 있는 동안 사람들에게 '멕시코까지 간다'는 얘기를 너무 많이 한 탓인지, 이제는 이 항해의 끝까지 함께해 멕시코에 가야겠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매일 아침 "오늘은 뭐 하며 시간을 때울까" 하며 일어나곤 했는데, 갑자기 바빠졌다. 이제 한동안 큰 도시는 만나기 어려울 것이므로 여기 큰 슈퍼마켓에서 식료품 장을 보고 코인 세탁기에서 빨래를 하고 마리나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도 해야 했다.
릭이 있을 때 단 한 번 시동이 걸린 것일 뿐이므로 근처에 시범 운항도 다녀왔다.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닻을 내리고 점심을 먹고 돌아왔는데 아직도 시동이 걸리고 배가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다만 두 가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엔진 시동이 걸리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리고 흰 연기가 많아진 것 같았다.
출항 전날 밤은 마리나 입구 근처에서 해산물 가공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친구들과 보냈다. 며칠 전 마리나 코인 샤워실에서 우연히 만난 사이였다. 늦은 밤이었고, 나는 칸막이가 없는 2인용 샤워실에서 혼자 샤워를 하고 있었는데 누군가 한국어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여기 누구 사람 있나 봐요. 누구 사람 있나 봐!"
이런 곳에서 한국말이라니..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니 그 시간대에 대부분 비어 있는 마리나 샤워실을 이용하던 근처 해산물 공장의 한국 아주머니였다.
그동안 한국 음식과 김치도 얻어먹고, 마리나에 들고 날 때마다 인사도 하며 지냈는데 출항 전날 마지막 샤워를 하고 나오다가 또 마주쳤다. 내일 아침 이른 출항을 계획하고 있긴 했지만 와인 한 잔 안 할 수 없었다. 두 명이서 세일링 요트를 타고 멕시코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다들 걱정이 태산인 듯했다. 음식을 가득 싣고 출항하는 데에다 대부분 항구에 들어가 배를 묶을 계획인데도 역시 한국 동포들은 먹거리 걱정이 가장 컸다. 물 빠질 때 해안에서 미역 따는 법, 먹을 수 있는 해초 종류, 주로 잡히는 물고기 등 우리가 조난을 당해도 생존할 수 있을 만큼의 미국 서해안 수산물 정보를 얻었다.
새벽 5시 40분. 웬일로 번쩍 눈이 떠졌다. 정보에 의하면 후앙 데 푸카는 조류의 영향이 커서 그 타이밍에 잘 맞추어 출항하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오늘은 이른 시간에 떠날수록 조류 덕을 많이 볼 수 있는 날. 날 밝자마자 출항한다는 계획이었으나 실제 출항까지는 한 시간이나 더 걸렸다. 불안한 마음에 엔진룸 덮개를 연 뒤 어제 보충했던 엔진오일을 또 보충하고 어제 충전한 부동액도 또 확인했다. 프로펠러가 즉시 돌아가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어 트랜스미션 오일까지 보충을 하고도 배가 묶인 상태로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가 보고야 마음을 놓고 계류줄을 풀었다.
물에 반사되는 아침노을과 떼 지어 앉아있다 날아오르는 물새들. 정들었던 포트 앤젤레스 마리나를 떠나 항해를 재개하다니 가슴이 벅차올랐다. 오늘은 바람이 거의 없는 날. 하지만 계산대로라면, 서쪽으로 흐르는 썰물 조류가 강한 아침 시간에 진도를 많이 빼놓으면 늦지 않은 시간에 니아 베이에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앙 데 푸카 해협은 짙은 안개로 악명이 높은데 오늘은 운 좋게 안개도 많지 않았다. 엔진은 아직 불안 불안하지만 평균 속도 5노트 이상이 나왔다.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을 가르는 후앙 데 푸카 해협을 따라 항해하는 동안, '미국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와 '캐나다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로밍 안내 문자가 연신 번갈아 왔다. 그 와중에 선주가 핸드폰에서 무슨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눈빛이 흔들렸다. 경험상 이것은 불안한 신호.
"VHF 라디오 오늘 마리나로 배송된대..."
VHF 라디오는 우리가 출항한 직후 밴쿠버로 배송되어 있었다. 엔진 수리로 포트 앤젤레스 체류가 일주일 더 연장된다는 걸 알게 된 날, 바로 VHF 라디오를 포트앤젤레스 마리나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통관 문제로 세관에 계속해 묶여 있었고, 특송 업체에 전화해 확인한 결과 통관에 45일에서 90일 사이가 소요된다는 최종 확답을 받았다. 그래서 다시 밴쿠버로 반송 요청을 했는데, 뭔가의 오류로 하필이면 오늘 라디오가 포트 앤젤레스 마리나로 배송된다는 것이다. 하필 오늘.
니아 베이를 향해 이미 상당한 거리를 항해한 이런 완벽한 날에, 이를 어찌하나 고민에 빠졌다. 배송을 취소하고 원래 계획대로 캐나다로 돌려보내거나, 아니면 포트 앤젤레스 마리나에 배송이 된 VHF 라디오를 니아 베이에 닻 내린 후 버스 타고 가서 찾아오는 방법도 있었다. 후자의 경우 버스를 갈아타며 왕복 다섯 시간이 걸리는데, 낯선 곳에서 그렇게 오래 배를 홀로 놔두어도 되는지 몰라 불안했다. 그래서 결국, 배를 돌렸다.
항해 중인 모든 배는 VHF 라디오에서 16번 채널을 모니터링해야 하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까지 항해하는 동안 라디오에 그리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핸드폰이 터지지 않는 아주 외진 데 갈 때가 아니라면 입항할 때나 존재감을 느꼈을 뿐이다. 하지만, 포트 앤젤레스 마리나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곳에서는 안전 항해를 위해 없어서는 안 되는 생명줄이 VHF 라디오인 듯했다. 모르면 모를까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상 라디오 없이 휴대용 무전기만으로는 무서워서 항해를 못할 것 같았다. 버스 갈아타며 찾으러 갈 바엔 우리 배로 가자-하고 배를 180도 돌리기로 결정했다.
방향을 돌리자 5노트 속력이 갑자기 3노트로 급감했다.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만 같은 느낌. 아... 우리 엔진의 성능이 수리 후 갑자기 좋아진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누리던 조류의 '이득'이 그만큼의 '손실'로 돌아온 것이었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마리나 사무실 문 닫기 전에 도착할 수는 있을까 걱정되었다.
그러나 뒤에서 바람이 조금 불기 시작하는 것 같아 제노아만 열었는데도 속도가 나아졌다. 노라도 젓고 싶은 답답한 심정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단 1노트 차이가 얼마나 크던지! 덕분에 엔진을 무리해 가동하지 않고도 오피스가 닫기 전 마리나 입구에 도착하는 데에 성공했다.
이제 이곳은 마치 우리의 모항처럼 익숙했다. 오늘도 떠나지 못한 포트 앤젤레스. 내일은 정말로 이곳을 떠날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