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ASYSAILING Oct 14. 2024

도와줘요 코스트가드!

이 아름다운 날에

원래 이른 시간에 출항할 계획이었으나, 8시가 다 되어서야 니아 베이를 떠났다. 태민씨가 언급했던 엔진벨트의 잠재적 문제가 아무래도 신경 쓰여 출항 직전 교체를 결정했던 것이다.


며칠 내내 걷힐 줄 모르던 안개가 오늘은 웬일로 괜찮았다. 그저께 절정에 달한 후 이제 점차 걷히는 추세인 줄 알고 안심했는데, 한 시간쯤 지나자 또다시 짙은 안개 속에 파묻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제는 실내에 내려가 항해장비 전원을 켜고 뿌앙이를 가지고 올라오는 동작이 매끄러웠다. 게다가 레이더에 더해 AIS까지 완비가 된 상태이니 한결 든든했다. 더 이상 파자마 차림으로 놀라 뛰어나올만한 이웃도 없을 것이므로 뿌앙이도 마음 놓고 울렸다.


AIS에서 주로 보이는 배는 화물선 같은 대형 선박이었다. 속도가 우리 배보다 월등히 빠른 큰 배들이 AIS를 통해 우리를 볼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마음 놓이는 일이었다. 반면, 레이더는 항해장비를 갖추지 않은 작은 배들도 빠짐없이 탐지해 낼수 있다. 다만, 지정하는 범위에 따라 물체가 보이지 않을 수 있어 부지런히 확대 축소를 해가며 확인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번은 레이더에서 놓친 작은 보트가 뱃머리 오른쪽에 갑자기 나타나는 바람에 간담이 서늘했다. 짙은 안개 속 사람들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우리를 주시하며 낚싯대 두 개가 달린 배꼬리를 가리키며 서 있었다. 낚싯대를 늘이고 있으니 피해 가라는 뜻이었다. 이 경우 보트의 뱃머리쪽으로 돌아가야 했지만 당황한 나머지 타이밍을 놓치고 그대로 항로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로지 운이 좋아 낚시줄에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배가 지나가는 순간 이들이 방향을 바꾸어 손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니 반대쪽에도 또다른 소형 낚시배가 있었다. 함께 낚시 온 그룹인 것 같았다.


뱃머리 몇 피트 앞이 보이지 않는 안개 속, 통행량도 많은 해협 한 가운데에서 저렇게 배 띄워놓고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낚시를 하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이 동네에서는 이 정도의 안개가 그냥 일상이었던 걸까.



더 빅 레프트 턴


뱃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캐나다와 미국 사이, 강처럼 좁은 바다 후앙 데 푸카 해협의 끝에 이르면 땅끝마을 케이프 플래터리에 이른다. 케이프 플래터리와 타투시 섬Tattoosh island 사이를 지나 뱃머리를 이제 왼쪽으로 틀면 태평양, 그때부터 남하를 시작하게 된다.


등대가 있고 이국적인 풍경을 자랑한다는 타투시 섬. 바로 그 앞을 지나쳤지만 희미한 실루엣으로 섬이 있다는것 정도만 감지할 뿐이었다. 안개가 이 정도면 육지와 섬 사이가 아니라 섬 바깥쪽으로 크게 돌았어야 했던 것이 아닌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앙 데 푸카 해협이 태평양과 만나는 지점에서 바다는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큰 바위들과 부딛혀 거칠고 험악해진다. 바닷물은 좁은 물길을 통과하려고 몸부림치는 듯 격렬하게 움직였다. 혹시라도 배가 물살에 휘말려 바위 근처로 밀리지 않을까 주의하면서, 드디어,

긴장 속에,

더 빅 레프트 턴!


조타대를 왼쪽으로 꺾자 호라이즌스 호가 왼쪽으로 따라 돌아갔다. 이제 우리는 공식적으로 태평양에 진입했다. 이 때가 이 항로로 여행을 하는 세일러들에게 가장 가슴 벅찬 순간이라고 한다. 뻥 뚫린 대양으로 처음 나가는 순간의 극적인 감동은 안개 때문에 놓쳤지만, 일단 파도의 차이는 확실히 체감할 수 있었다.



스웰 스웰 스웰


배가 크게 흔들려 오토파일럿을 해제하고 조타대를 잡았다. 오늘은 예보에 파도가 심하지 않은 날이었음에도, 역시 태평양의 파도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묘한 타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엔진 항해 뒤 나던 기름 냄새와도 다르고, 배꼬리에서 나오는 하얀 배기 가스와도 관련이 없는것 같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냄새가 더 강렬해지면서, 이것이 플라스틱 타는 냄새임을 깨달았다. 엔진룸과 통하는 콕핏 벤치를 열어보니 탄 냄새가 확 올라왔다. 호라이즌스 호는 엔진룸이 독립된 공간이 아니라 배꼬리쪽 실내 공간을 통해 콕핏 벤치 밑의 수납 공간까지 연결이 되어 있다. 뭔가 생각나는 게 있는지 선주가 엔진룸에 내려갔다. 그리고 변속기 오일 교체 도구를 담아놓은 맥주 박스가 엔진에 붙어 버린 것을 발견했다.


맥주상자는 그동안 아무 문제가 없이 이렇게 놓고 썼는데, 배를 칵테일 흔들듯 하는 파도를 견디지 못했던 것 같다. 평소 문제가 없던 실내의 물건들도 다 튀어나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과연 태평양의 파도에는 물건들을 고정하는 방법도 다시 생각해야 할 일이었다.




정오가 지나자 바람이 점차 뚜렷해져 세일을 올렸다. 예보상 어제 남풍이 잦아들고 오늘 오후부터 북풍이 시작된다고 했으나, 아직 바람은 뱃머리 쪽에서 불어왔다. 다행히 각도가 좋아 모든 세일을 펼치자 속도가 7노트에 육박했다. 세일의 힘으로 항해하니 배의 안정성도 높아져 파도로 인한 흔들림이 줄었다. 이제 호라이즌스 호의 미친 듯한 춤사위가 잦아들고, 비로소 콕핏에 앉아있는 것이 편안해졌다.


다만, 세일을 여는 데에만 15분이 소요된 것은 문제였다. 한 사람은 조타대를 지키고 한 사람은 데크로 나가 세일을 열었는데, 데크 시스템이 효율적이지 않아 콕핏 안과 밖을 몇 차례 왕복해야만 세일을 열 수 있었다. 구명조끼를 입고 잭라인에 안전줄을 매단 채 말이다. 체력 소모도 문제이지만, 황소처럼 날뛰는 배 위에서 사람이 이렇게 긴 시간 작업을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인것 같았다. 더군다나 호라이즌스 호는 메인세일 뿐 아니라 헤드세일 밑단에도 알루미늄 붐이 달려있어, 붐을 제대로 고정하는지 않거나 파도를 잘못 맞으면 사람이 홈런 맞아 날아갈 위험도 커 보였다.


비상 상황이 닥치면 돛줄을 풀어 세일을 한 번에 내릴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호라이즌스 호에는 세일이 내려오면서 붐 위에 모이게 돕는 장치가 없었다. 갑자기 세일을 떨어뜨려 내리면 데크를 덮으며 퍼져 위험할 수 있다. 또다른 문제는, 메인 시트가 너무 뻑뻑해서 콕핏에서 조정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배가 지나치게 기울면 메인 시트를 빠르게 풀어 세일의 바람을 빼야 하는데, 이걸 못 한다고 생각하니 호라이즌스 호가 좀 기우는듯 할 때마다 간이 쪼그라들었다.



큰 파도 덕분에 배 안의 수납도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고, 데크 시스템의 문제도 명확히 깨닫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바다는 이보다 나을 가능성이 없으므로, 어떻게 개선을 해야 할지 고민이 필요했다.



무섭습니다


니 베이를 떠나 39 해리(약 72킬로미터). 다이나믹한 항해였지만 긴 거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제, 올 것이 왔다. 호라이즌스 호는 라 푸시에 접근하고 있었다!


실은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이미 코스트 가드에게 도움을 요청할 마음을 먹고 있었다. 바 크로싱 첫 경험이라 혹시나 우리가 뭔가를 놓치고 실수를 했을 우려(누적된 데이터에 기반한 합리적인 우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코스트가드가 에스코트를 해 준다면 어떤 절차로 일이 진행되는지 알아 두는 것도 앞으로 도움이 될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우리가 바 채널 입구에 도착했을 때, 바다에 인상깊은 맥주거품이 떠 있는 것을 제외하면 상황이 너무나 평온했다. 우리는 바를 통과할 최적 타이밍 밀물 때에 있었고, 하늘은 푸르렀으며, 라 푸시 근처에 오니 파도마저 잠잠해진 터였다. 이런 평화로운 상황에서 코스트가드에 연락을 하기가 참 겸연쩍었으나 눈을 꾹 감고 VHF 16번으로 호출했다:


호라이즌스: "라 푸시 코스트가드, 라 푸시 코스트가드, 라 푸시 코스트가드, 여기는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입니다. 오버."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여기는 미합중국 코스트가드입니다. 듣고 있습니다. 오버."


코스트 가드는 22A 채널로 옮겨 통신을 계속하기를 요청했으나 아직 사용법을 터득하지 못한 우리 라디오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은 채널이었다. 그래서 16번에서 대화를 이어갔다. 즉, 라디오 전파 범위 내에 있는 모든 배들이 우리 통신을 듣고 있다는 의미였다. 푸른 하늘 아래 평화로운 오후의 라 푸시와 어울리지 않는, 잔뜩 긴장한 목소리가 VHF 16번 채널에서 이어졌다: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라 푸시 바 크로싱을 하는 데에 에스코트를 부탁합니다. 오버"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현재 바 크로싱을 하는 데에 특별한 장애 사항이 있습니까? 오버"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아뇨 없습니다! 오버"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배 동력에 문제가 있습니까? 오버"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아뇨 없습니다.”

우리는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그러나 라 푸시가 처음인 데에다 바 크로싱도 해본 적이 없어서... 무섭습니다!"


코스트가드는 현재 배 좌표, 최종 목적지, 승선 인원, 배 유형과 치수 등의 정보를 확인하기 위해 계속해서 질문을 했다.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승선한 모든 사람들이 구명조끼를 입었습니까? 오버"

호라이즌스: "미합중국 코스트가드, 세일보트 호라이즌스, 물론입니다! 오버" 구명조끼를 꽉 조였다.


오버over, 카피copy, 로저roger... 영어로 처음 해 보는 VHF 통신이라 용어도 헷갈리는 데에다 흥분한 상태라 혀마저 마구 꼬였다. 바보같은 데에다 길기까지 한 VHF 통신은 16번 채널에서 실시간으로 방송되고 있어, 이 필수 비상 채널을 모니터링하는 모든 사람이 듣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황스러운 가운데 우리가 코스트가드를 부르기로 한 것이 잘한 결정이었을까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사실 지금 같은 조건이면 그냥 우리끼리 입항을 했어도 괜찮을 상황이었는데, 남의 나라에서 괜한 행정력 낭비를 초래한 것만 같았다.




코스트가드가 우리 좌표를 파악하고, 누가 출동할 지 결정하고, 구명조끼를 착용하고, 배에 시동을 걸고 우리에게 오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는 없다는 점은 이해한다. 하지만, 우리가 호출을 한지 이미 50분이 지나고 있었다. 그 사이 점차 안개가 시야를 덮고 바다가 점점 거칠어져, 배는 파도와 바람에 자꾸 떠밀려 내려갔다. 가능하면 신고한 좌표에서 멀어지지 말라는 지시에 가끔씩 기어를 넣어 원 위치로 돌아가려 하지만 쉽지 않았다. 멈춰서 떠 있는 배에서 맞는 파도는 움직이는 배에서 만날 때와 또 다르다. 원하던 바는 아니었지만 이제 출동한 코스트가드를 맞이하기에 덜 민망한 환경이 되어 버렸다.


오늘 운이 좋아 최고의 타이밍에 좋은 바 컨디션으로 바 입구에 도착했었는데 괜히 오버하다가 이런 상황에 놓였구나 후회가 막심했다. 이제 자력으로 바 크로싱을 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고, 민망함과 당황스러움은 두려움으로 바뀌고 있었다. 라 푸시 앞바다를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이 에스코트를 해 준다는 사실은 마음이 놓이지만, 이 거친 바다에서 우리가 바를 안전하게 건너고 좁은 채널을 따라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