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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21. 2024

이 고생의 이유는 무엇인가

왜 시작했을까

지는 해를 등 뒤로 하고 조바심 속에 한 시간 반 동안 바를 건넜다. 웨스트포트 마리나에 접근할 즈음엔 이미 칠흑 같은 밤이었다. 일찌감치 바다에서 전화로 예약해 선착장 자리를 지정받았으나, 이 어둠 속에 제자리까지 찾아갈 욕심은 일찌감치 포기하고 그냥 제일 쉬운 자리에 일단 계류하기로 했다. 마리나는 바람을 막아주는 지형에만 짓는 것인 줄 알았는데 포트 앤젤레스도 그렇고 이곳 역시 마리나 안으로도 강풍이 들어온다.


이 어둠 속에서 바 채널의 경계를 표시하고 마리나 입구를 알려주는 것은 오직 불빛뿐이다. 이 표시등은 국제 해상 신호 표준을 따르는데, 세계적으로 두 가지 시스템이 쓰이고 있다. 유럽에선 왼쪽 빨간 불, 오른쪽이 녹색 불인데 미국에선 정반대다. 나도 모르게 왼쪽 빨간불, 오른쪽에 초록불을 찾게 되어 혼란스러웠다. 기왕에 전 세계 해상 신호를 통일하려면 끝까지 하지 왜 하다 만 것인가.


입구를 통과하자마자 재빨리 세일링 요트 마스트부터 찾았다. 세일링 요트들이 많이 계류하는 곳은 수심이나 선착장 시설 등에 리스크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계류를 도와줄 마리나 직원들이 나와 있다면 참 든든할 텐데, 이 밤중에는 지나가다 줄 잡아줄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다. 심란한 바람 소리와 그보다 더 요란하게 윙윙거리는 풍력 발전기 소리가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비어 있는 자리에 후진으로 계류를 하려다 실패해, 급히 엔진 가속을 해 빠져나왔다. 호라이즌스 호로 후진할 때마다 불안감에 짓눌리고, 엉뚱한 방향으로 가는 경험이 반복되면서 조타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 갔다. 풀킬 요트라는 차이도 있지만 호라이즌스 호 배꼬리에 붙어 있는 풍향 조타 장치와 보조 러더 때문에 배가 제멋대로 간다는 생각에 신경이 곤두서 침착을 잃으려는 찰나, 선주가 조타대를 넘겨받더니 전진으로 계류에 성공했다. 배를 멀리 떨어뜨린 후 단순히 기어를 중립에 두고, 멈춘 배를 바람이 밀어주도록 했다고 말했다. 나는 극도의 불안과 흥분에 휘둘리는데, 선주는 어디서 도 닦다 배 타러 온 사람 같을 때가 있다.


배를 묶고 한숨을 돌리자마자 앞뒤 따지지 말고 샤워부터 하고 싶었다. 니아 베이 마을에 방문했을 때 단 한 번 샤워한 이후, 라 푸시에서는 식당에서 기다리느라 샤워 기회를 놓쳤다. 그리고 오늘은 아침에 즉흥적으로 출항하느라 이 시간에야 육지를 밟게 된 것이다. 점심은 배에 있는 음식으로 대충 때웠고, 저녁은 굶었으며, 신발은 소금물에 젖었는데 갈아 신을 신발이 없어서 양말과 함께 꾸덕하게 염장이 된 상태. 갑자기 울화가 치밀었다. 왜 세일링이 이런 고생이 되어야 하나. 왜 즐거운 놀이가 아니라 견뎌야 할 불편함, 극복해야 할 고난만 있는 것인가. 나도 모르게 하루 종일 지중해에서의 즐거운 크루징과 이 고생을 비교하고 있었다.



결사 샤워


무슨 일이 있어도 오늘 밤엔 샤워를 하고야 말겠다는 나의 강한 의지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한 선주는 저녁 요리 계획을 접고 오밤중에 웨스트포트 샤워 시설을 찾아 나서는 나의 순례에 동참했다.


가이드북에서 근처에 RV 캠핑장 샤워 시설이 있다는 정보를 확인하고, 구글 맵에서 RV 캠핑장을 검색했다. 샤워 준비물을 들고 조리 슬리퍼를 끌며 깜깜하고 썰렁한 아스팔트 도로를 20분 넘게 걸어 RV 캠프장에 도착했다. 하지만 샤워장에는 자물쇠가 채워져 있고 관리인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절박했다. 이런 동네에서 어떻게 샤워를 해낼 것인가 고민을 하다 호텔 숙박에 생각이 이르렀다. 뜨거운 물로 샤워도 하고, 드라이로 머리도 말리고, 오랜만에 깨끗하고 편안한 침대에서 하루 푹 쉬는 상상만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루만 묵어도 이 피로가 말끔히 풀릴 것 같았다.


다시 아스팔트 길을 걸어 마리나 근처의 호텔로 돌아갔으나, 리셉션이 닫혀 있었고, 문에 붙어 있는 전화번호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발을 동동 구르며 주위를 서성이다 보니, 호텔 바로 뒤쪽에 RV 캠핑이 하나 보였다. 애초에 가이드북이 말하던 RV캠핑장이 여기였던 것 같다. 이미 밤늦은 시간이라 RV 캠핑 리셉션 역시 불이 꺼져 있었다. 그런데 문에 붙어 있는 메시지가 범상치 않았다:


"내가 사무실에 없는 동안 당신을 놓쳐서 매우 안타까워요. 내 전화번호는 XXXXX이고 혹시나 연락이 안 되면 비키의 전화 XXXXX로도 해 보세요. 아니면 초인종을 한번 눌러보세요. 혹시나 내가 안에 있다면 문을 열고 나올 수도 있으니까요. - 조 -"


늦은 밤이었고, 사무실은 불이 꺼져 있었지만, 초인종을 누를 용기를 주는 메시지였다. 동시에, 이런 안내문을 문에 붙여놓을 사람이라면 우리의 딱한 처지를 듣고 샤워를 하게끔 도와줄 것 같기도 했다. 초인종을 울리자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곧 사무실 불이 켜지고 큰 개를 앞세운 남자가 나타났다. 심슨가족의 호머 심슨과 매우 닮았고, 목소리마저 똑같았다. 나중에 물어보니 선주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종일 배 타고 오늘 밤 도착해 샤워를 할 수 있는 곳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며 사정을 설명했다. 돈을 지불하고 캠핑장의 샤워실을 사용할 수 있냐고 물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우리는 그대로 사무실 앞에 삼십 분 이상 서 있게 되었다. 조가 퇴역한 군인이고, 은퇴 후 부인과 이 시설을 운영하고 있으며, 이곳에 오는 손님들은 모두 조의 친구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신상 정보와 약간의 사업 홍보 이외에도 컴투웨스트포트 닷 컴 웹사이트에 가면 미국 서부 해안의 최신 바 컨디션 리포트를 한 번에 모아 볼 수 있으며 가장 정확한 정보는 해안에서 수 마일 떨어진 노란색의 웨더 부이weather buoy 가 수집하는 정보로, 실시간 바다 사진까지 볼 수 있는데 그레이스 하버의 웨더 부이 번호는 46211번이라는 전문적인 해양 정보까지 쏟아졌다.


"웹사이트 주소가 뭐라고요?"

"어.. 웰컴투웨스트포트 닷 컴이었나요?"

"컴투웨스트포트 닷 컴입니다."


세탁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으나 조의 코인 세탁기들은 모두 새 기계이며 그렇기에 가루나 액상이 아닌 고체 세제를 조에게서 직접 사서 쓰게 하는 정책이라는 정보를 듣던 중 갑자기 일시정지. 느닷없는 정적에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고 있으려니 멀리서 미세한 소리가 들렸다.


"들리나요? 파도에 부이가 움직이면 종이 울리는데 여기까지 들리죠. 저 종은 XX번 부이입니다."


조는 퇴역 해군이거나, 최소한 열성적인 레저 보트 애호가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확실한 점은, 내가 지금까지 만난 모든 세일러 중에서 이만큼 말하는 것에 진정한 열정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드디어 조의 샤워실은 쿼터 동전을 넣으면 작동이 되며, 여타 코인 샤워들이 2분 30초의 시간을 주는 것에 비해 조의 샤워실 동전 주입기에는 '1 쿼터에 3분'이라고 쓰여 있는데 실제로는 3분 30초간 작동이 되기 때문에 코인을 두 개 넣는다면 무려 7분 동안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는 정보에 이르게 되었다. 기쁜 마음으로 조의 뒤를 따라 샤워장을 향한 발걸음을 떼자마자


"아, 근데 내가 진짜 쿨한 거 보여줄까요?"


그렇게 하여 샤워실 뒤에 있는 야외 생선 정리대에 방문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최첨단 생선 정리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듣기 시작했다.



웰컴 투 웨스트포트


아침. 귀신 나올 것 같은 바람 소리는 여전하나 현창을 통해 배 안으로 화창한 햇볕이 들어왔다. 콕핏에 나가 보니 어젯밤의 선착장과 느낌이 180도 다른 아침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렇게 다를 수 있을까? 어쩌면 오랜만에 맞이하는 햇볕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안개와 흐린 날씨 때문에 어두워져 있던 마음이 환하게 개는 것 같았다. 예보에 의하면 사흘간 강풍이 이어지다가 파도와 바람이 만만해지는 때가 토요일인 것 같았다. 토요일을 잠정 출항일로 정하자 마치 사흘간의 휴가가 생긴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피로도 좀 풀고, 데크 시스템도 좀 살펴보고, 코스트가드에게 지적받은 안전장비도 갖추기에 넉넉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선은 동네 구경부터 하기 위해 배에서 내렸다.


웨스트포트는 넓은 공간에 층 낮은 건물들이 여유 있게 퍼져 있어서인지 안정감을 주었다. 해안을 따라 선착장 입구들이 줄지어 있고, 마리나 앞으로 난 큰길 맞은편에는 재미있게 생긴 2층 건물들이 일렬로 늘어서 있었다. 해산물 식당도 많고 술 마실 데도 많았다. 또한 이곳에 정박하는 어선들의 위치, 연락처와 주로 잡는 어종 정보를 담은 게시판도 발견했다. 여기서는 생선을 사고 싶으면 고기잡이 배를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이곳은 게가 가장 유명하지만 참치와 연어도 많이 잡히는 것 같았다. 동네 한 바퀴를 돌며 요트용품 샵 사전 답사도 했다. 밴쿠버 이후로 처음 만난 제대로 된 샵이었다. 출항 후에야 필요를 깨닫게 된 물건들도 있고, 특히나 데크 시스템을 손보려면 사야 할 것들이 많았다. 이렇게 규모가 크고 잘 갖추어진 샵이 있어 마음이 든든했다. 뼛속까지 스미는 으스스한 추위가 없는 쾌적한 날씨도 딱 마음에 들었다. 온 동네를 정밀 스캔한 뒤 고른 식당에서 현지 맥주와 함께 느긋하게 점심 식사를 하며 이곳은 참 기분 좋은 동네구나 생각했다. 가장 좋은 것은 시야의 반을 차지하는 새파란 하늘과 기분 좋은 바람! 배 타고 하루 항해해서 상륙하면 이렇게 전혀 다른 동네가 쨘하고 나오는 게 참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한 선착장 입구 앞을 지나고 있는데 사람들이 주차한 트럭에 무언가를 싣고 있는 것이 보였다. 놀랍기도 죄다 참치였다! 어선이 조금 전 정박한 모양이었다. 통통한 참치 한 마리를 손에 들고 배에 돌아온 우리는 이 녀석을 어디서 손질해야 할지 이미 알고 있었다.




미국이 깃발의 민족이라는 얘기는 들었지만 조의 RV 캠핑 입구에는 대체 몇 개의 성조기가 휘날리고 있는 건지 셀 수가 없었다. 군인 출신이라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스타일이 확고한 사람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조의 허락을 받고 선주가 생선 정리대에서 참치를 해체하기 시작했다.


트럭에 실린 참치 중 가장 작은 사이즈이긴 했지만 삶아 먹고 지져 먹고 라면에 넣어 먹어도 둘이 먹기엔 너무 컸다. 하지만 참치 한 마리를 사기로 맘먹었을 때는 이미 조와 비키에게도 선물할 요량이었다. 다만 생선을 잘 다루는 줄 알았던 선주가 아담한 과도를 들고 정리하는 참치는 시간이 갈수록 생선 주물럭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나마 상태가 나은 첫 번째 참치 조각을 들고 가 어제의 친절함에 감사하자, 조는 적잖이 감동한 눈치였다.


"무슨 일이든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요."



이 고생의 이유


밤과 낮의 대조만큼이나 어젯밤과 오늘 웨스트포트의 인상도, 내 기분도 참으로 극과 극이었다. 오늘은 하루 종일 이 새로운 동네를 누비고 다니며 '행복하다'는 생각에 젖어 있었다. 물론 쾌청한 날씨도 한몫했지만, 어제의 고생과 어드밴처가 있었기에 오늘의 안락함이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느껴졌다.


어렸을 때 하던 배낭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설렘이었다. 밤기차를 타고 아침에 새로운 도시에 내려 전날과 다른 사람들, 다른 언어, 다른 음식을 탐험하며 느끼던 즐거움을 우리는 이제 항해를 통해 만끽하고 있었다. 예전엔 25kg 배낭에 모든 소지품을 담아 등에 매고 걸어 다녔지만, 이제는 움직이는 집을 조종해 여행하고 있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배낭여행처럼 자유로운 특성 덕분에, 배를 타지 않았으면 올 일이 없었을 웨스트포트라는 기분 좋은 동네를 발견하고, 배 타고 오지 않았으면 만날 일도 없었을 조 같은 재미있는 친구도 알게 되었다. 일정이 정해진 패키지 투어 중이었다면 이 모든 것을 놓쳤을 것이다. 완벽함의 보호막 안에 있지 못하고 항상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한 처지에 있는 것도, 그 때문에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배낭여행과 참 비슷한 것 같다. 하버 호핑을 하는 것이 안전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이제 보니 중간 기항지들을 건너뛰고 빠른 시간에 남하하는 오프쇼어 루트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는 것 같다.


하버 호핑 항해를 하기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진 매력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지중해에서는 주로 한 지역을 선정해 그 안에서 길지 않은 거리의 세일링을 반복하며 비슷한 환경과 문화권 안에 머무는 크루즈를 주로 한다. 장거리 항해로 전혀 새로운 장소에 상륙하는 경우, 언어가 달라지고 인프라 시스템이 전혀 달라 번번이 적응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미국은 '합중국'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같은 언어, 같은 통신사, 같은 코스트가드 등 동일한 나라의 틀 안에 각 지역이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점이 참 재미있다. 후안데푸카 해협과 태평양 북서부 도시들 간의 차이는 말할 것도 없고, 하루 항해 거리의 도시들조차 분위기와 문화가 달라 마치 다른 나라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남쪽으로 갈수록 분위기가 또 어떻게 바뀔지 기대가 되었다. 단 한 가지 다양하지 않은 점이라면 음식이다. 어딜 가나 획일적인 이놈의 피시 앤 칩스와 햄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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