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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23. 2024

코스트가드 현장학습

그동안 공구샵 한 구석의 마린 코너만 샅샅이 훑고 다녔는데 번듯한 요트용품 샵이 있으니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유럽의 허름한 아시아 마트에서 신라면, 초코파이, 청포도 캔디만 사던 사람이 한국 이마트에 카트를 끌고 입장할 때의 웅장함과 같다고나 할까. 


샵에 여러 차례 다녀오며 코스트가드가 권장한 안전장비도 구매하고, 구상대로 데크 시스템 수정도 완성했다. 이제 세일을 올리고 내리는 시간을 줄일 수 있고, 호라이즌스 호의 몇 가지 미스터리했던 부분도 원인을 찾아 해결했다. 소금에 절어 딱딱해진 시트는 죄다 교체하고, 헌 시트는 물에 불려 세탁한 후 보관해 두었다. 이로써 배의 하드웨어적인 중간 점검은 된 것 같으나 소프트웨어적인(?) 점검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도 조류와 바 크로싱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레이스 하버에 입항했을 때처럼 모든 조건을 완벽히 맞출 수 있다면 한번 성공한 방식을 그대로 반복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 원리라도 이해해야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원리를 어디서 배울까? 웨스트포트에서 무슨 일이든 필요할 때 어디로 가야 할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느지막한 시간, 조의 캠핑장에 가서 인사를 나눴다. 참치를 나누어 준 것이 당연한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했는데 조는 벼르고 있었던 것 같다. 비키가 손수 구웠다는 블루베리 파이가 종이 접시에 얌전히 담긴 채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파이는 아직 완벽하지 않았다. 조의 마지막 한마디가 더해지기 전에는:


"파이의 정수가 무엇인지 아나요? 그것은 크러스트입니다. 이 파이의 크러스트가 얼마나 환상적인지 한번 느껴보세요."

파이가 든 종이 접시를 손에 든 채 이번에도 삼십 분 넘게 캠핑 리셉션 앞에 서 있었지만, 당최 바 크로싱의 원리는 깨우치지 못했다. 혹시 조도 이 바다의 난제 앞에서 난감해하고 있었던 걸까. 하지만 그 대신 중요한 조언을 얻었다. 어찌됐든 웨스트포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해결책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우리의 로컬 멘토 조일 것이다.


"웨스트포트 코스트가드에 물어보세요. 그 사람들은 밤낮으로 그 연구만 하는 사람들이거든요. 신분증지참하고 코스트가드 기지에 방문하면 친절하게 모든 것을 설명해 줄 거예요."


어느새 해가 지고 밤이 왔지만, 내일이면 이 오래된 불확실성을 마침내 해결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해졌다. 든든한 동네 터줏대감 친구 조는 웨스트포트에서 가장 특색 있는 바가 어딘지도 알려주었다. 작별 인사를 하고 그곳에서 술이나 한잔 하기 위해 자리를 뜨려니,


"그런데 다음에 오면 내가 생선 자르는 법은 좀 가르쳐 줄게요."



코스트가드 기지


용모 단정하게 하고 필기도구를 겨드랑이에 낀 채 코스트가드 기지로 향했다. 세금도 안 내는 미국에 와서 코스트가드의 은혜를 자주 입는 것 같아 좀 미안했다. 지도에 표시된 대로 마리나 앞 큰길을 따라 내려가니 코스트가드 기지로 보이는 건물이 나왔다.


입구는 철조망으로 막혀 있고 초인종도 없었다. 팔을 휘저어 주의를 끌어 보려고도 했지만, 건물은 입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고 주변에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전화를 걸어 우리가 문 닫힌 입구 앞에 서 있다고 하니 이미 카메라로 우리를 보고 있었지만 기지에 방문하려는 줄은 몰랐다고 했다.


두 개의 철조망 문이 우리 앞에서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차 두 대가 동시에 지나가도 될 만한 큰 문이었다. 필기도구를 겨드랑이에 끼고 카메라를 의식하며 광활한 입구 안으로 걸어 들어섰다. 판토찌와 지난 실수들이 떠오르며 뭔가 익숙한 위기감에 휩싸였다.


한 대원이 우리를 맞이하며 방명록에 날짜와 이름 연락처를 적으라고 하는 동안, 다른 한 명은 문 열린 사무실에서 벽을 가득 채운 모니터들을 주시하다 뒤돌아 우리를 발했다. 둘 다 뭔가 준비가 되지 않은 표정이었다. 조의 말을 듣고 현장학습 가는 초등학생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왔건만, 이곳은 일반인이 방문해서 조류와 바 크로싱의 관계 따위를 배우는 곳이 아닌 것 같다는 강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저.. 우리는 37피트 세일보트로 항해를 하고 있는데요, 조류에 대해 알고 싶어 왔습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화면 앞의 대원은 주의 깊게 우리 얘기를 들어주었다. 심지어 부하로 보이는 사람에게 우리가 말하는 정보를 자세히 기록하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일반인을 위한 쉽고 체계적인 설명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문답식의 대화를 통해 드디어 왜 바 크로싱을 밀물에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그 이유는 대양에서 밀려 들어오는 물과 조수 차로 인한 물의 흐름이 같은 방향으로 일어나는 시점이 밀물이기 때문이다. 밀물은 파도를 눌러주어 수면이 더 평온해지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녜?


기왕 현장학습 분위기가 조성된 김에 평소 궁금했던 것도 하나 더 물어보았다. 아침 밀물 시간이 날마다 늦춰지는 바람에 저녁에 바를 건널 수 있는 시간도 점점 뒤로 밀리는 고민이 있었다. 이러다간 해가 중천에 뜬 뒤에야 출항을 할 수 있을 날이 머지않은 것 같았다. 하루에 두 번 있는 만조 시간이 매일 늦어지니, 전날 밤 밀물이 다음날 이른 새벽 시간으로 넘어갈 때까지 좀 쉬며 기다린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 선주도 2주간 개인 용무가 있으니, 일정만 잘 맞추면 개인 일정과 항해를 매끄럽게 연결시킬 수도 있을 묘수였다. 그런데 우리의 질문이 물음표를 마저 찍기도 전에 코스트가드가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때는 바다가 매우 거칠어져서 위험할 텐데요."


펜과 노트를 든 자세 그대로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몇 초 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시즌이.. 끝난다고?


코스트가드는 이 지역에서 기후가 안정적인 기간은 9월 말이면 끝난다고 했다. 10월부터는 바다가 위험한 날이 많고 변화가 급작스러워 미리 대응하는 것도 쉽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간 우리 마음 한편에 '너무 늦은 게 아닐까'라는,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안이 있었기에 코스트가드의 핵심을 찌르는 한마디가 비수처럼 와 꽂혔다.




각종 유용한 연락처와 정보를 한 보따리 안고 코스트가드 기지를 나서는 우리 가슴에는, 그러나, 돌덩이가 앉았다. 촉박한 시간 제약의 압박감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항해하기 좋은 시기는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나마 2주는 배를 남겨둔 채 비행기를 타고 미국 밖에 다녀와야 했다. 이 휴식 기간이 밀물 타이밍을 건너뛸 찬스일 수도 있다고 맘대로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걸림돌이었다. 오늘 조의 말을 듣고 코스트가드를 찾아가지 않았다면 또 우리는 무슨 엉뚱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을 것인가.


선착장까지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2주 후 배로 돌아오면 현지 코스트가드가 비추하는 바다를 항해하며 더욱 짧아진 일조 시간에 조마조마해할 것이 뻔했다. 밴쿠버와 포트 앤젤레스에서 지체되지만 않았어도 지금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 있었을 텐데, 그렇다면 상황이 달랐을 수도 있었다.


하버 호핑 항해가 우리 스타일과 잘 맞는다며 큰 만족을 느끼자마자 진도를 빨리 빼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오프쇼어로 나가야 하는 것인가. 하지만 출항때마다 점검하는 게 강박으로 자리 잡은 불안한 엔진은? 파도가 높아지면 일찌감치 퇴근해 버리는 오토 파일럿은? 무엇보다도 여전히 어리버리한 세일러 둘은 준비가 되어있기는 한 걸까.



메리와 데이브


혼란한 마음을 달래려 과식을 한 뒤, 졸음이 쏟아져 배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누군가 밖에서 부르는 듯한 소리가 들린 듯했으나, 우릴 찾아올 만한 사람도 없고 계류줄도 잘 매어두었다는 생각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잠의 늪에 빠졌다.


늦은 오후, 데크에서 작업을 하는데 누군가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선주가 속한 크루즈 협회 회원이었다. 호라이즌스 호에 달려 있는 협회 배너를 알아본 것이었다. 알고 보니 아까 비몽사몽간에 들었던 소리도 우리 배를 부르는 소리가 맞았다. 웨스트포트에서는 다른 세일러들을 만나지 못해 아쉽던 차에 반가워 얼른 배 안에 있던 선주도 불러냈다. 같은 길을 항해해 온 세일러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믿음직한 동료를 만난 것 같은 든든한 느낌이 있다. 눈앞의 푸근한 60대 아줌마 아저씨의 항해 이야기를 들을수록 딱히 우리와 같은 부류라고 보기는 어렵겠구나 생각하게 되었지만. 메리와 데이브는 캐나다에서 출발해 포트앤젤레스에서 통관을 마치고는 그레이스하버까지 쉬지 않고 한 번에 항해해 왔다. 이제 여기서 좋은 날씨가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샌디에고까지 또다시 한 호흡에 가서 11월 멕시코 태풍 시즌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예정이라고 했다. 미 서부 해안을 단 두 번의 항해로 주파하는 여정이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범상치 않은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다. 직접 건조한 요트로 세계 일주를 한 베테랑 세일러 부부였다. 오프쇼어 항해를 고민하기 시작하자마자 이렇게 오프쇼어 장인들을 만나다니, 이것은 운명인가 싶었다.


메리와 데이브는 20여 년 전, 직접 배를 만들어 집까지 팔고 일생일대의 항해를 시작했고, 어린 아이들과 4년간 바닷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았다. 그  뒤 캐나다로 돌아가 정상인(?)의 삶을 살다가 은퇴와 동시에 바다의 부름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항해를 시작하는 참이었다. 어느 각도로 보아도 평범한 아줌마 아저씨의 실루엣을 가진 두 사람은 어떻게 그 어려운 일을 해냈고 60이 넘은 나이에 또다시 바다로 나오게 됐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일터에서 만난 프로 세일러들의 오프쇼어 항해 이야기는 정말 멋졌지만, 내겐 저 멀리 동화 속 이야기 같았다. 하지만 메리와 데이브의 항해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동안 내가 너무 주눅 들어 미리 겁을 먹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되었다.


메리와 데이브는 며칠 동안 외로이 바다와 싸우다 들어온 마리나에서 낯익은 깃발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찾아왔겠지만, 오늘 임자 제대로 만났다. 우리는 궁금한 것들을 죄다 물어봤다. 해안에서 100마일쯤 떨어지면 파도는 얼마나 더 높아지는지, 야간 항해에서 혼자 당번을 서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은지, 오프쇼어에서 문제가 생기면 육지까지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는지.. 우리의 질문은 끝이 없었다. 우리는 내일 일찍 출항할 예정이지만 메리와 데이브는 며칠 날씨의 추이를 살펴본다고 했다. 샌디에고에서 다시 접선하기로 하고 연락처를 주고받았다. 그들이 떠난 후 오프쇼어 루트에 대한 생각은 점점 깊어졌다.


웨스트포트 도착 직후 확인했던 일기예보가 바뀌었고, 내일이 생각만큼 만만한 날은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내일 출항하지 못하면 며칠 더 지연될 수 있고, 조금이라도 빨리 남하할 방법을 도모해야 하는 처지에 마음의 여유는 없었다. 10월에 바다가 험하다고 해도, 마리나에서 기다리며 좋은 날만 골라 게릴라처럼 출항하는 방법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그때라고 지금과 같은 조바심이 없을 리가 없다.


또다시 퍼질 위기에 처한 항해, 이번에도 솟아날 구멍을 찾아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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