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40년 전 세일링의 세계로 이끈 친구가 말하길, 컬럼비아 강이 해안 밖으로 100마일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하더군요. 컬럼비아 강의 바 사진들을 본 뒤로는 그 말에 의심이 싹 사라졌어요. 이건 오프 더 레코드인데.. 내 딸 친구 하나가 자기 남친 데리고 실망봉으로 주말여행을 갔는데.. 그 남자애를 차 버리려고 일부러 그런 거래요."
"코스트가드가 알려주는 바 컨디션을 다 믿지는 마세요. 한 번은 친구 부탁으로 46피트 파워보트를 포틀랜드에서 시애틀까지 옮기느라 컬럼비아 강어귀를 빠져나가야 했어요. 바에 도착하기 전에 코스트가드에 전화해 바 컨디션을 물어봤더니 '보통'이래요. 망할, 그게 '보통'이면 보통 이하는 평생 절대 볼 일이 없었으면 좋겠어요!"
세일링 커뮤니티 포럼에 올라온 바 크로싱 관련 토론의 일부이다.
지구별에서 가장 큰 바다 태평양과 태평양으로 흘러들어 가는 가장 큰 강 컬럼비아 강이 만나는 곳. 1792년 이래로 컬럼비아 강 바에서 2,000척 이상의 선박이 침몰했고 7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엄청난 유량과 유속을 자랑하는 컬럼비아 강과 태평하지 않은 태평양이라는 조합이 일으킨 수많은 조난 사건 때문에 '태평양의 공동묘지Graveyard of the Pacific'라는 불길한 악명을 얻게 되었다. 현대의 공학 기술로 위험한 강 하구를 개선했지만 강한 물살과 끊임없이 변화하는 해저 모래톱의 위치 때문에 컬럼비아 강의 바를 건너는 것은 여전히 위험하다고 한다.
가이드 북과 태평양 북서부를 따라 항해한 후기들을 반복해 읽고, 원리를 생각해 보고, 심지어 코스트가드를 직접 만나 현장학습까지.. 드디어 바 크로싱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여전히 조심스럽지만, 가장 악명 높은 바에도 도전해 볼 준비가 된 것 같았다. 우리의 다음 정거장인 아스토리아는 바로 그 컬럼비아 강에 있다.
시간의 압박이 아니었다면, 아침의 강풍을 보고 출항을 미룰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울부짖는 돌풍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렇게 강한 바람에서는 엔진 기어 먼저 넣어 바람에 대항하게 한 뒤 계류줄을 풀어주는 것이 정석이다. 하지만 지난번 정박 실패로 인한 자신감 상실로, 선주가 성공했던 '초저속 정박' 방식을 따라 하려다 뱃머리가 금세 돌아가 버렸다. 다행히 주변에 다른 배가 없어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웨스트포트를 떠나 바를 건너기 시작하면서, 아쉬움에 항구를 몇 번이나 돌아보았다. 그레이스 하버, 칙칙한 잿빛 항구인 줄 알았더니 더없이 유쾌한 곳이었다. 언제 다시 올 일이 있을까.
오늘의 목적지는 아스토리아. 컬럼비아 강어귀까지 47해리를 항해한 뒤, 바를 건너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일와코Ilwaco 나 해먼드Hammond 같은 마리나가 강어귀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지만, 코스트가드는 아스토리아 마리나를 추천했다. 뱃길이 넓고 큰 다리 밑에 있어 찾기 쉽다는 설명이었다. 밀물 시간 맞추느라 출항을 좀 늦게 했지만, 컬럼비아 바를 저녁 밀물 시간 맞추어 건너고 깜깜해지기 전에 입항하는 데에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바 채널 방파제 밖으로 나서자 파도가 호라이즌스 호를 도발하기 시작했다.
사흘 전 일기예보는 오늘 온화한 북서풍이 분다고 했었다. 항해 거리가 비교적 짧은 오늘 약한 바람이 딱 좋아 보였는데, 계속해서 강한 북동풍이 불고 있었다. 호라이즌스 호가 속도를 내면서 바람은 동쪽에 더 가까워졌다. 최소로 줄인 메인세일과 스테이세일, 일부만 편 제노아로 빠르고 안정적으로 달리고 있었다.
"엔진 한번 꺼볼까요?"
정지 스위치에 손가락이 닿으려는 찰나, 언제나처럼 찾아오는 그 불안한 예감: 과연 다시 켜질 것인가… 그러나 두려움을 물리치고 버튼을 눌렀다. 태평양으로 진입한 이후 항해 중에 처음으로 엔진을 꺼 보는 것이었다. 이전에는 엔진의 기여도가 아무리 낮아도 엔진을 끄지 못했다. 항상 날이 어두워지기 전에 도착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항해 거리가 짧아 여유가 있으니 엔진을 끄면서 잃는 약간의 속도가 불안하지 않았다.
당당당당 머리를 울리던 요란한 디젤 엔진 소리가 사라지니 마치 가쁜 숨이 느리고 깊게 쉬어지는 느낌이었다. 콕핏은 명상센터만큼 고요하고 안정적인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이번 항해의 어려운 부분으로 장시간의 조타와 거친 바다도 있겠지만, 그보다 엔진 소리가 더 지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에 열 시간 이상씩 쉼 없는 소음에 시달리다 보면 진이 다 빠지는 느낌이었다.
점점 세지는 바람에 플로터에 항해 속도가 7노트를 넘어 8노트까지 찍혔지만 긴장이 되지 않았다. 엔진을 껐으므로 배터리를 아끼기 위해 오토파일럿 없이 교대로 조타를 했지만 오히려 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엔진 소리 대신 바닷소리를 들으며 항해하니, 마치 좋은 배경음악을 깔아 둔 것처럼 금세 평온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게 신기했다.
언제부터인가 시야가 점차 나빠져서 안개인가 싶었다. 하지만 익숙한 안개와 달리 색깔이 누렇고 공기가 답답한 느낌이 있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도 해 질 녘 하늘빛이 나는 것이 꼭 한국에서 미세먼지가 심한 날 하늘 같았다. 그러나 북미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에 미세먼지가?
시야에 가득한 노란 하늘과 바다, 세일을 가득 채우는 바람, 정면으로 응시해도 눈부시지 않은 희미한 해.. 암울한 SF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이 독특한 분위기를 사진으로 찍어 SNS에 공유하려는데 오레건주 북서부의 대형 화재 소식이 보였다. 주민들도 연기 때문에 밖에 못 나가고 있다고 했다. 2년 전에 대규모 산불이 발생한 지역인데 또 불났나 보네- 혀를 차다가 생각해 보니 오늘 도착할 아스토리아가 바로 그 오레건주 북서부. 그럼 이 노란 안개의 정체가 그 연기였단 말인가!
뉴스를 찾아보니 돌풍과 낮은 습도로 산불이 급속히 퍼지는 중이라고 했다. 여기까지 연기가 자욱한 것을 보면 정말 큰 불인 것 같았다. 바다에 나오면 항상 바람이 차가웠는데 오늘은 때때로 후끈한 바람이 훅 불기도 했다. 이 열기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산불의 열기라고 생각하니 오싹했다.
상황이 악화될까 걱정했던 것과 달리,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누런 연기는 점차 옅어졌다. 물론 도착할 항구가 불길에 휩싸여 있을 거라는 극단적인 상상은 하지 않았지만, 이 답답한 연기가 오레건주 북쪽 일대를 한동안 덮을 각오는 하고 있었는데, 다행이었다. 오후 6시 반에 바 채널 입구 첫 부표에 도착했다.
아- 드디어 도착이다 환호하며 바 채널의 첫 번째 부표를 돌아 진입한 뒤로 벌써 몇 시간이 지난 건지 가물가물했다. 무의식 중에 바 크로싱을 항해의 끝처럼 생각했던 우리는 바를 건넌 이후 마리나까지 거리가 쉽사리 줄어들지 않자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등 뒤로는 해가 지고 말았다.
호라이즌스 호는 2노트 전후의 속도로 전진하다가 때때로 1노트까지 속도가 떨어졌다. 이런 속도로 오늘 안에 마리나에 도착할 수는 있는 것인지조차 의심이 가기 시작했다.
바 채널 입구에서 마리나까지 거리가 14마일이나 떨어져 있긴 했지만, 거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우리는 엄청난 유량과 유속으로 유명한 컬럼비아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던 것이다. 강물은 항상 하류로 흐른다는,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다니. 게다가 이곳은 무려 컬럼비아 강. 호라이즌스 호는 전진인 듯 전진 아닌 전진 같은 속도밖에 나지 않았다.
플로터로 항로를 시뮬레이션하면 자동으로 배 속도 5노트로 계산하므로 오늘 여정이 짧고 여유로워 보였을 수밖에 없다. 아까 세일 항해 중에 배가 느려진다 싶었을 때 일찌감치 엔진을 켰어야 하는데, 오랜만의 웰빙 항해를 너무 오래 만끽한 탓도 있었다. 지금까지 문제없이 잘 작동해 준 엔진을 믿고 rpm을 더 올려 보았다.
해가 진 뒤 항해의 문제는 두 가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당연하지만 깜깜한 시야였다. 채널을 따라 줄지어 선 수많은 부표들의 불빛은 원근 구분 없이 똑같아 보이기 때문에 조타할 기준점을 찾기 어려웠다. 플로터에서 부표를 하나하나 찍어 몇 초 간격으로 깜빡이는지를 확인하며 목표로 할 다음 부표의 불빛을 찾았다. 1초 간격으로 깜빡이는 부이 다음 부이는 2.5초 간격, 그다음은 4초...
컬럼비아 강의 교통혼잡도 난이도를 높였다. 보름달이 뜬 하늘을 배경으로 검은 실루엣이 나타날 때마다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요트 면허 시험 준비할 때 초딩 시절 구구단 외우듯 암기해 둔 항해등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소해정(수중 지뢰 제거선)이나 그물을 던지고 있는 트롤 어선과 같은 크리스마스트리 급의 항해등은 망각의 언덕 너머로 사라진 지 오래이지만, 최소한 마주 오는 배의 진행 방향만 항해등으로 파악해도 위험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우리는 분명 강에서 항해하고 있는데 놀랍도록 큰 선박들이 스쳐 지나갔다. 데크에 건물 같은 게 서 있는 실루엣도 지나가고 마치 다리 같이 보이는 실루엣도 지나갔다. 이런 대형 선박을 이렇게 가까이 지나치는 건 처음이다. 높이 솟은 검은 실루엣 뒤로 휘영청 뜬 보름달과 달빛을 반사하는 구름이 한눈에 보이니 뭔가 공상과학 영화의 한 장면 같기도 했다.
추위도 문제였다. 겨울용 오리털 파카 위에 오일스킨 상하의를 덧입어 무장하고 있었으나 이가 덜덜덜 떨렸다. 예상 못한 밤 항해이긴 했으나, 어떤 경우든 내복, 양말, 부츠, 털모자 등 제대로 된 방한 장비를 준비했어야 했다. 수차례 부엌에 내려가 차를 끓여 마시며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노력하지만 너무나 추웠다. 시간은 이미 23:00을 가리켰고 추위는 점점 더해갔다.
코스트가드가 말한 대로 아스토리아 마리나를 찾아 들어가는 것은 쉬웠다. 마리나 안에는 바람도 불지 않아 비교적 수월하게 계류할 수 있었다. 추위에 덜덜 떨다 따뜻한 실내로 들어오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가장 짧을 줄 알았던 오늘 항해는 결국 열다섯 시간의 고된 여정이 되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건너뛰었으므로 잘 익은 파인애플로 허기를 달래고 얼른 잠자리에 들었다. 길고도 힘든 항해 끝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서 감사했다. 오늘밤 조용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는 생각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도 미세한 물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지만 평소보다 높은 rpm으로 장시간 달리다 막 꺼진 엔진에서 냉각수나 엔진오일 정도가 떨어지는 소리려니 했다. 포트 앤젤레스의 크리스와 릭이 '온갖 새는 곳을 다 조였다'라고 했지만 이 오래된 엔진의 고질적인 누수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였다.
한밤중에 별 이유 없이 잠에서 깼다. 고요한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있는데 물소리가 들렸다. 아직도..? 혹시나 하고 엔진룸에 다가가 귀를 가까이 대 보았다. 틀림없었다.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선주를 깨우고 엔진룸 뚜껑을 여니 아찔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잠이 확 깨는 오밤중의 충격이었다. 엔진 냉각용 해수 호스에 난 구멍으로 바닷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호스에 엔진 벨트가 마찰되어 구멍이 난 것이었다. 바닥 마루판을 열어 보니 빌지가 물로 가득 차 있었다.
언제부터 물이 새고 있었던 걸까? 왜 빌지 펌프는 활성화가 되지 않았던 것일까? 우연히 잠에서 깨지 않았고 내일 아침에야 발견했다면? 그보다 최악의 가정은, 만약 우리가 오프쇼어 항해를 하던 중에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