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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ASYSAILING Oct 28. 2024

아스토리아

여기서 멈춰!

"아스토리아는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있는 고기잡이 마을이었습니다. 지금은 낚시 중독에 시달리는 알코올 마을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컬럼비아 강변을 따라 달리는 아스토리아의 유서 깊은 트람에 타고 있었다. 관광객을 위해 여름에만 운행하는 트람에는 100년 전 트람 기사의 복장을 한 백발의 할아버지가 창 밖으로 보이는 아스토리아 풍경을 설명해 주었다. 강을 따라 큰 양조장들이 늘어서 있고 강 위에 나무 말뚝을 박고 세운 건물들이 많았다. 컬럼비아 강은 볼 때마다 참 크면서도 역동적인 강이라고 생각했다.


오랜만에 큰 도시에 오니 졸지에 시골쥐 두 마리가 된 느낌이었다. 차와 사람으로 붐비는 중심가와 웅장한 석조 건물들도, 식당과 바의 규모도 새삼 신기해 두리번거리게 되었다. 두 마리 시골쥐보다 조금 더 객관적인 시점을 가진 사람들은 '전형적인 컬럼비아 강의 작은 마을'이라고 하겠지만, 우리에게는 밴쿠버를 떠난 이후 처음 방문하는 제대로 된 '도시'이고 미국에서 방문한 곳 중에서는 압도적인 최대 규모였다. 대중교통으로 방문 가능한 유명 스포츠 브랜드 아웃렛도 있었다. 그러나 내복, 털모자 등 방한용품을 장만하러 아웃렛에 갈지 말지 결정을 못하고 있었다. 여기 온 날 밤 배 위에서 오들오들 떨면서는 육지에 도착하는 대로 기념품 가게에 쳐들어가서라도 내복을 사고야 말 테다 다짐했지만, 우리는 지금 항해를 계속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초반에만 항해에 동참하려 했지만, 완주로 계획을 바꾸면서 일정을 조율해 시간을 비워 두었다. 매번 항해가 이어질 때마다 북미 서부 태평양에 대한 배움도 경험도 늘어 자신감도 늘어갔다. 이 기세를 몰아 올 겨울 멕시코에 도착한 뒤, 마침내 따뜻한 바다에서 놀다가 호라이즌스 호를 저렴한 마리나에 두고 복귀하면 딱 완벽할 그림이었다. 예상 밖 시즌 종료라는 복병이 나타나긴 했지만, 우리는 이제 오프쇼어 항해를 진지하게 고려하기 시작한 만큼 늦어진 시간을 회복하고 멕시코까지 완주를 할 가능성도 있었다. 가장 어렵다던 컬럼비아 바 크로싱에 성공하면서는 이제 시범 삼아 1박 2일 밤 항해에 도전할 자신감도 생겼고, 그 뒤엔 본격적으로 오프쇼어 항해를 시작하게 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바닥 마루판을 열자마자 시야에 들어온 빛이 내 헤드라이트를 반사하고 있는 빌지의 물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희망 회로가 파괴되고 말았다. 이 항해를 하면서 닻 내린 배에 옆으로 부는 바람, 배 속도를 무력화하는 조류, 배를 공중부양시키는 안개 등 당황스러운 상황들을 많이 겪었다. 하지만, 배에 차 있는 물은 웃음기를 완전히 뺀 충격을 안겨줬다. 항구에 안전하게 묶인 배에서 목격했음에도 충격이 컸다. 만약 강풍에 기울어 항해하는 배의 마루 한 구석에서 배에 물이 찬 걸 발견했다면 어땠을까. 항해 중엔 물소리를 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물이 바닥 위로 올라온 뒤에야 발견했을 것이다. 맛을 봐 짠 물이면 선체에 구멍이 났다고 생각했을 것이 틀림없다. 육지 방향으로 뱃머리를 돌린 뒤에도 하루 종일 항해할 바다가 남았고 조난신호 외에는 통신도 안 되는 곳이었다면 우리가 패닉에 빠지지 않았을 가능성은 얼마였을까? 정신줄을 놓친 우리가 이성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고 이것이 큰 실수로 이어졌을 때 그 위험의 범위는?



쿨 레이서 할아버지


머릿속에 경고음이 울리면서 오프쇼어를 향해 달리던 마음이 급정거한 뒤로 괴로운 고민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엎어질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번번이 솟아날 구멍을 찾아 용케 이어지고 있는 항해를 외부 요인이 아닌 자의로 중단하는 것도 쉬운 결정은 아니었다.


선주와 나는 각자의 리소스를 통해 조언을 구했다. 북미파 베테랑 세일러는 "시즌이 조금 늦었지만 해봐라", 지중해파 베테랑 세일러는 "조심하는 게 좋다"라는, 상반된 조언을 했다. 이런 차이는 북미인과 유럽인의 태도 차이일 수도 있고, 최근 지중해가 겪은 심각한 이상기후의 영향일 수도 있다. 북극곰만큼이나 지구 온난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취약 생물종이 세일러인데, 지중해 세일러들은 최근 몇 년 극심한 기상을 경험하고 있다.


항해를 계속하기로 하는 것과 중단하기로 하는 것 모두 옳은 선택일 것도 같고 동시에 둘 다 후회스러운 선택일 것 같기도 했다. 아름다운 멕시코의 옥색 바다에서 모히토를 마시며 "그때 중단했으면 어쩔 뻔했어" 생각할 수도 있지만, 물이 차오르고 있는 배를 보며 "그때 왜 경고음을 무시했을까"라고 후회할 수도 있다. 우리는 결정을 미룬 채, 구멍 난 해수 호스를 교체하고 데크를 점검하며 출항에 대비했다. 동시에 배에 비축한 식량 소비를 늘리며 항해 중단에도 대비했다. 이날도 배에 있는 음식으로 요리한 점심을 준비하는데 선착장을 지나던 누군가 말을 건넸다.


"그 풍력 발전기 써 보니 어때요?"


워낙 배에 이것저것 달려 있는 게 많아 그중 하나에 관심 있는 행인이 물어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태양열 패널에 비해 기여도는 낮으면서 돌아가는 소리가 너무 심란해요."


선착장에 서 있는 사람은 대머리이면서 동시에 산발이 가능한 헤어스타일의 할아버지였다. 비슷한 연령대의 세일러이지만 포트 앤젤레스의 웨이드 할아버지와는 느낌이 많이 달랐다. 마음대로 흩트러진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에 고집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듯한 인상. 여태까지 만난 세일러들과 항해의 목적이나 여정도 많이 달랐다. 우리는 이 범상치 않은 룩의 할아버지가 여기까지 온 이야기에 빠져들어 점심 준비하던 것도 잊었다.




할아버지는 젊었을 때 오프쇼어 경기를 하던 열혈 세일러였지만 아내가 요트를 너무 싫어해 그만둬야 했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몇 년 전, 다시 요트를 구입해 항해를 시작했다. 어느 날 은퇴 후 비어있던 오레곤 집에 도둑이 들었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보통의 지구인이라면 이런 경우 비행기를 탔을 텐데 할아버지는 홀로 배를 끌고 출발했다.


항해 중에 포어스테이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간신히 할야드로 마스트를 고정하고 항해를 계속했다. 문제는 포어스테이 없이 역풍 항해를 제대로 할 수 없다는 점. 큰 각도로 태킹을 하며 올라오느라 시간이 많이 걸려 힘든 항해가 되었나보다. 항해 내내 알람 시계를 목에 걸고 20분마다 콕핏에 나와 주위를 살핀 뒤 다시 실내에 들어가기를 반복하며 왔다고 한다.


할아버지의 요트는 선체가 낮고 배꼬리가 넓으면서 배 바닥이 평평한, 전형적인 레이스 요트였다. 어떻게 저런 배로 태평양 오프쇼어를, 그것도 70대 노인이 혼자 항해해 올라왔을까? 혼자 세일링 중이었고 포어스테이가 터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도 가장 가까운 항구로 뱃머리를 돌리지 않고 목적지까지 항해를 완료할 결정을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할아버지에게는 장거리 오프쇼어 항해도, 리깅 파손도, 길어진 항해 시간도 다 제어 가능한 범위의 사건들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제3의 마리나에서 요트가 수리될 때까지 발이 묶이는 것보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도 소위 '쿨 헤드'를 유지하는 것은 능숙한 세일러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인 것 같다. 한 이탈리아 세일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나는 항해를 하면서 기술의 정점에 이르면 그만큼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이뤄낼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나는 내복만 장만하면 항해를 계속할 준비가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우리에게 부족했던 것은 내복 뿐이 아니었다. 잘못 설치한 엔진 벨트에 마모된 호스에서 흐른 물은 우리를 패닉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착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점이 우리와 할아버지의 결정적 차이였다. 우리는 아직 불안 요소들을 안고 출항하기에 충분한 쿨 헤드를 갖추지 못했다. 이탈리아 세일러의 말처럼 기술의 부족 때문일 수도 있고, 쉽게 패닉에 빠지는 우리의 타고난 성향 때문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이런 한계를 안고 예측 불가한 10월의 바다에서 오프쇼어 항해를 하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다.


그날 저녁 우리는 항해 중단을 결정했다.



동면 준비


항해를 잠시 쉬고 내년 항해 가능한 시즌 시작에 돌아오기로 결정했다. 시즌 2는 촉박한 시간으로 인한 조바심과 여전히 신비주의를 고수하는 엔진 등 개선 가능한 위험 요소들을 제한하고 좀 더 제대로 준비를 해서 시작할 것이다. 이제 신속하게 요트의 겨울잠 준비에 착수할 시간이었다.


물가가 저렴한 멕시코가 아닌 미국에서 장기 계류를 하게 된 만큼, 우선 저렴한 마리나를 찾는 것이 첫 번째 과제였다. 아스토리아 마리나는 육상 계류가 수중 계류 비용의 두 배가 넘었는데, 배는 물 밖에서 겨울을 나는 것이 좋지만 가격 차이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스토리아 마리나에서 1년 계약으로 수중 계류하는 것이 가장 좋은 선택이었지만, 저렴한 마리나들이 늘 그렇듯 대기 명단이 길었다. 인근 다른 마리나들도 비슷한 상황이거나 외국(캐나다) 보험에 가입했다는 이유로 연간 계약을 거절했다. 그래도 캘리포니아처럼 비싼 주에서 항해가 중단되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호라이즌스 호의 웰빙을 위한 투자라 생각하고 육상 계류를 선택했다.


배 올리는 날짜를 예약하고 나니 갑자기 할 일이 산더미처럼 밀려왔다. 우선 세탁실을 수차례 오가며 밀린 빨래를 해치웠고 배에 남길 물건과 챙겨갈 물건을 분류했다. 호라이즌스 호의 내부와 외부도 구석구석 청소했다. 피난식량만큼 배에 비축해 둔 음식을 최대한 소비하려 매끼마다 창의적인 레시피를 고안해 냈다. 방울방울 아껴 쓰던 물탱크의 단물도 콸콸콸 비워 버렸다. 겨울철 습기에 대비해 곳곳에 방습제를 설치하고, 연료 탱크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연료도 가득 채웠다. 정리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져 근처에 나가 닻 내리고 세일을 내릴 시간이 없었지만, 뱃머리에서 약풍이 부는 타이밍을 노려 세일도 제거해 접어 두었다. 그리고 이제 해가 졌다. 호라이즌스 호에서 지내는 마지막 밤이었다.



내년에 만나자, 호라이즌스


배에 있는 음식을 최대한 소비한다는 목표 아래 아침부터 과식을 하고 남은 음식으로 도시락까지 쌌다. 그리고 배를 육지로 올리는 시설로 향했다. 안개낀 컬럼비아 강을 바라보며 다음 여름에는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았다. 이제 호라이즌스 호를 떠날 준비가 되었다. 배를 올리고, 배 길이를 측정해 계약을 했다.


호라이즌스 호를 다시 한번 돌아보며 작별 인사를 했다. 밴쿠버에서 이끼 끼고 더러운 모습으로 처음 만났던 호라이즌스 호는 틈틈이 세척하고 정성껏 관리한 덕에 말끔해졌다. 아스토리아는 얼음이 얼지는 않지만 비가 많이 온다던데 내년엔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오랜 시간 우리의 날개이자 둥지가 되어 준 배를 떠나는 느낌이 이상했다.


이제 배와 떨어져 있는 동안 고질적인 엔진 문제를 어떻게 근본적으로 개선할지, 안전 항해를 위해 어떤 것들을 보충해야 할지 생각해 봐야 했다. 무엇보다도 어리버리 세일러 둘은 어떤 점들을 업그레이드해 돌아와야 할까. 이렇게 여정을 시즌으로 나누면 우리도 노련한seasoned 세일러가 되는걸까.


다른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자 보는 깨끗한 시트 깔린 침대의 느낌은 어떨지, 시계 볼 필요가 없는 무제한 샤워는 얼마나 좋을지, 기상 예보와 담쌓고 사는 일상은 또 얼마나 마음 편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제 육지에서의 생활이 신나는 모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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