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은 천지개벽의 충격이다. 우리는 스스로 문맹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부분적으로 문맹이다. 특히 프랑스어는 일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모르는 세계'이다. 늘 곁에 있었지만 몰랐기 때문에 존재하지 않던 세계. 프랑스어를 배우면 흔히 말하고 듣던 각종 브랜드 이름이며 데자뷔, 앙가주망, 프레타포르테 등 우리 생활 속의 프랑스어부터 다른 음악으로 들리기 시작한다. 이미 여러 번 봤던 프랑스 영화도, 좋아하던 프랑스 음악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로 변하는 신비로운 경험도 하게 된다.
좌충우돌 프랑스어를 알아가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지만 시작은 이탈리아다. 십육 년간 애증의 이탈리아 사람들과 치고받고 싸우고 협력하거나 다정하게 지내다 보니 이제 외국에서 이탈리아 말이 들리면 동향인을 만난 듯 반가운 지경에 이르렀다. 학교에서 수동적으로 배운 영어와 달리 이탈리아어는 성인이 되어, 내 의지로 배운 언어였다. 의식적인 전략과 시도들의 실패와 성취의 경험으로 쌓인 노하우들은 자산으로 남았다. 이 때문인지 또 다른 언어에 접근하는 데에는 그다지 큰 결심이 필요하지 않았다.
수년 전 런던의 한 프랑스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나 빼고 모두 프랑스인이었는데 내가 스튜디오에 들어가고 나오는 순간 사용 언어가 실시간으로 바뀌곤 했다. 근무하던 사우스 켄싱턴 구역에는 프랑스 학교, 프랑스 샌드위치 집, 프랑스 커피숍 등이 모여 있었는데 하나같이 프랑스어로 먼저 말을 시작했다. 이렇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환경은 기어이 서점에서 프랑스어 기초 문법책을 하나 사 들고 나오게 했다. 이것이 퇴사 후에도 간헐적 독학으로 이어지다가 2018년 프랑스 한달살이의 좋은 핑계가 되었다. 짬짬이 '이론'인 듯 공부하던 언어가 길을 찾아주고 궁금함을 해소해 주고 더 나아가 새로운 친구까지 사귀게 해 주었다. 마치 이탈리아에 처음 도착했을 때처럼.
나는 프랑스어 전공자가 아니고 아직도 프랑스어로 명함을 내밀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비슷한 이탈리아어를 터득하며 만든 배움의 틀을 프랑스어에 적용해 비교적 손쉽게 프랑스어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새롭고 재미있는 도시에서 한 달을 사는 경험,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던 문맹이 점차 기역자가 보이기 시작하는 과정을 기록한 글을 통해 즐거웠던 파리 한달살이의 경험을 공유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