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를 좋아한다. 드라마로 알게 된 그가 쓴 에세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는 엄마를 만나러 가는 전철에서 처음 읽었다. 작가의 엄마 이야기에 기습 공격을 당했다.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속수무책이었다. 전철에 앉아 책을 적시며 펑펑 울고 말았다. 엄마에 관해 쓰기로 했을 때 이 책처럼 눈물 쏟게 하는 사모곡 같은 건 쓰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책을 출근 전철 타며 다시 읽는다. 몇 년 사이 개정판이 나와 있었다. 엄마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 회한을 읽으며 눈물 콧물. 다음엔 아버지와 화해하는 이야기였다. 어쩔 수 없이 내 아버지를 떠올렸다. 오늘은 괜찮겠지, 방심하는 찰나 또 눈물이 왈칵. 나는 아버지와 화해 같은 건 하지 않을 테다. 책을 덮고 내 아버지의 생을 떠올린다. 여태껏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던 한 사람의 삶을 수많은 사람이 함께 흔들리고 있는 전철 안에서 그려본다.
엄마에게 인정받고 싶던 둘째 아들. 형에게 밀린 열등감에 찌들어 있던, 자신이 더 잘났다는 걸 증명하지 못해 자존심이 상했던 젊은이. 자신이 꾸린 가족보다 자신이 먼저였고 가족에게 폭력적 언어로 모멸감을 주며 가장의 권위를 얻으려 했다. 짧았던 화양연화가 지난 뒤 찰나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과거에 매달렸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독기를 품고 살다가 제풀에 쓰러진 뒤로 집에 들어앉아 가족들에게 독설을 내뿜는 일로 생을 낭비했다. 뭐라도 해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고 가족들조차 그냥 아무 일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결국 그토록 깔보던 아내에게 인생 후반을 의지하다 아내가 세상을 떠난 뒤 생을 마감했다.
말하자면 허세 가득한 자신감에 자기애가 지나쳤던 게 죄라면 죄였다. 나는 그렇게 자기밖에 모르는 아버지를 무던히도 미워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서도 엄마에게 서슬이 퍼렇게 욕을 퍼붓던 아버지는 내가 전화를 걸면 받아 엄마에게 바꿔주면서 말했다. 여보, 사랑하는 큰딸. 그 말을 전화 건너편으로부터 들을 때마다 나는 역겹다고 생각했다. 마음에 1도 없는 소리를 잘도 하는구나 속으로 비웃기도 했다. 인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래. 그럴 거였으면 진즉에 잘하지.
내 주위에는 딸에게 다정한 아빠들이 있었다. 밤이 늦었다고 데리러 나온다는 아빠도, 생일이라고 선물을 사줬다는 아빠도. 나와 같은 대학에 간 친구는 아빠에게 칭찬을 들었다. 나는 대학에 들어가고 아버지에게 비난을 받았는데. 그런 얘기를 들을 때 나는 신기했었다. 세상에 그런 아빠도 있구나. 너희 부모님은 정말 너를 사랑하시는구나. 어릴 때부터 기억을 샅샅이 뒤져도 아버지의 사랑 같은 걸 느껴보지 못한 내가 이제야 사랑하는 딸이라고 부른다고 금방 감동에 빠지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오랫동안 아버지의 사랑을 기다렸기에 더 단단한 앙금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얘기를 할 줄은 몰랐다. 누가 아버지 얘기를 꺼내면 나는 할 말이 하나도 없었다. 행여 내게 물어보면 미운 말을 할까 봐 조용히 있곤 했는데. 기분 나쁜 기억으로 뒤덮인 아버지라는 과거는 묻어버리고 싶었는데. 하지만 사랑하는 큰 딸이라던 말이 겉치레라도 아버지의 노력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진심까지는 아니지만 적어도 백기를 들고 화해하고 싶다는 신호였을지도. 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책 한 권 읽고 난 뒤에 갑자기 내 마음이 몰랑몰랑해지고 아버지에 대한 사랑 같은 게 하루아침에 생겨난 건 아니다. 그동안 꽁꽁 묶어두었던 상처들을 글로 풀어쓰면서 하나씩 꺼내자 엄마 아버지의 삶이 보였기 때문이다. 누구의 부모로서가 아니라 각자 자신의 생, 당신들의 삶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았을 거며 누구도 그런 삶을 원치 않았으리란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입에 발린 말로라도 표현하려던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간단히 묵살해 버렸다. 그게 진짜 사랑이라 섣불리 넘겨짚지 않지만 아버지와 나, 서로에게 속죄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렸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라고, 노희경 작가가 진즉에 경고했는데 나는 기회가 가버리는 걸 방관했다. 아직 시간이 남은 사람들에게 유죄 선고를 피할 기회를 잡으라고 얘기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