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2013년 1월 4일 아침. 엄마가 돌아가셨다. 불과 몇 시간 전 엄마에게 또 오겠다고 말하고 집에 왔는데. 그날은 작은 아이의 초등학교 예비소집 일이었다. 오빠의 전화를 받고 나는 집에서 5분 거리의 시댁에 전화를 걸어 아이들을 맡길 수 있는지 물었다. 친하게 지내던 아이 친구 집으로 가 예비소집 서류를 전하고 대신 제출해 달라고 부탁했다. 해야 할 일을 차근차근 침착하게 하고 있었지만,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오빠에게 전화해 엄마는 좀 어떠시냐고 재차 물었다는 걸 나중에야 들었다.
처음엔 화초 이야기를 할 생각이었다. 요즘 반려 식물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는데. 화초 키우기 선수였던 엄마의 화초를 떠올렸다. 곁들여 내가 살리고 죽인 많은 식물의 이야기도.
먼저 나를 스쳐 간 화분을 생각나는 대로 썼다. 빛나는 초록의 율마, 너무 잘 자라 나눔 했던 자주 달개비, 봄바람에 부러진 해피트리, 꽃 지고 말라버린 철쭉, 혼자 겨울난 벤저민 고무나무, 얼어버린 돈 나무, 두 번째 꽃 피운 다육이, 오래 사는 개운죽, 자배기에 담긴 금붕어와 단짝 부레옥잠, 외로워도 슬퍼도 잘 자라는 염자, 무관심 장수 꽃기린.
나열하고 보니 내 화초들의 이야기는 화려하게 꾸민 제목 안에 내용이 뻔히 보인다. 아무리 궁리해도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화초는 글로 쓸 만큼 명확한 이미지를 갖고 있지 못했다. 엄마의 화초들은 싱싱했고 잎이 반짝반짝하게 빛났다는 것뿐. 뭉뚱그려진 화초를 하나하나 그려보다 떠오른 건 엄마와의 소소한 기억이었다. 의도적으로 지워버렸던 아픈 엄마의 시간. 떠난 엄마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작정했고 얘기한 적도 없지만, 그동안 내가 썼던 글에는 엄마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엄마 얘기를 하려고 한 게 아닌데. 내 삶에 녹아 있던 엄마의 모든 게 자연스레 묻어났다. 애먼 화초 이야기를 끄집어낸 것도 그런 이유 아니었을까.
뒤늦게 엄마의 투병 생활 함께했던 시간을 기록해 본다. 엄마가 수술받은 뒤에 항암치료를 하러 다니는 동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엄마가 어떻게 다녔고 어떤 고통 속에 있었는지 나는 알 수 없다. 더 방법이 없다는 의사의 선고 후에 요양병원으로 집으로 옮겨 다니던 엄마와의 단편적인 기록일 뿐이다. 희미해진 기억은 내 주관적 해석으로 얼룩져 있을 것이고 기억의 선후가 어떻게 되는지 나도 모른다. 다만 그사이 문득문득 선명한 순간을 담았다.
그와 함께 그동안 써 두었던 얘기 조각들도 함께 모았다. 절대 먼저 꺼내지 않던 아빠의 이야기와 엄마가 투병할 당시에 적어 두었던 날것의 감정들까지. 언젠가 이 시간을 부끄러워할 때가 올지 모르겠다. 그래도 지금은 여기 집중해 보려고 한다. 엄마 살아계실 때 하지 못한 이야기들에 천천히.
이 책은 애끊는 사모곡이 아니다. 다정한 엄마와 딸의 이야기도 아니다. 엄마에게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던, 나는 엄마와 별개라 생각하며 살았던 흔한 딸의 이야기, 여전히 엄마의 그늘 속에 있다는 걸 엄마가 돌아가시고도 한참 지난 뒤에야 알게 된 어리석은 나의 이야기다. 벌써 7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이제는 조용히 엄마의 기억을 떠올려보아도 좋으리라 생각했다. 그걸 더는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다 파헤치고 꺼내어 한껏 원망이라도 하려고 했다. 생각과 달리 멀어지려고 내디딘 발걸음은 점점 엄마에게 다가가게 한다. 나는 정말 엄마를 몰랐구나, 뒤늦은 아쉬움과 미안함. 엄마도 나를 잘 몰랐다는 서운함. 나는 나이가 들어도 관심이 필요하고 칭찬에 목마른 아이였다는 걸, 엄마도 딸의 따뜻한 말 한마디에 목말라했다는 걸 우리는 서로 몰랐다.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돌이켜보면 사랑보다 원망이 컸다. 보통의 딸과 엄마처럼. 사랑하거나 미워하거나, 원망하면서도 사랑하거나. 끔찍이 사랑하지 못했고 미워한 적도 많았지만 이렇게라도 내 엄마여서 고마웠다고 말할 수 있음에 감사한다. 납골묘 석판에 새겨진 이름만이 아니라 엄마가 살아온 흔적을 남길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이게 지금 내가 엄마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것 같다.
아직 엄마 곁에 있는 당신도, 이미 엄마를 잃은 당신도 엄마에 대한 기억이 사라지기 전에 당신만의 방법으로 기록하면 어떨지 조심스레 권한다. 내가 모르는 엄마의 계절을 상상해 본다. 엄마와 함께하지 못하는 새로운 계절에 엄마를 더 잘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정말로 엄마 얘기를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