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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유 Aug 04. 2020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무계획은 나의 힘

힙한 곳은 다 갈 거야?!



모처럼만의 여행을 알차게 보내기 위해서 대만 4박 5일 여행코스, 부산 가볼만한 곳, 군산 맛집 등을 찾아보곤 했다. 꼭 가봐야 할 곳, 동선 짜임 좋은 여행코스, 실패 확률이 낮은 맛집을 검색하는 이유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멋진 휴가를 보냈다고 스스로 뽐내고 우쭐하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누가 다녀와서 SNS에 올렸더니 멋지더라, 누가 여기서 먹었는데 맛있대, 여기는 힙한 곳이니까 기념사진은 꼭 남겨줘야지... 하면서 나의 취향은 무뎌졌다. 대신 만족도는 떨어지지만 맛집 앞에서 줄을 서며, 인증샷과 도장깨기에 열을 올렸다. 빠듯하게 계획을 세워야 여기 저기 거기 다 가볼 수 있다면서 핫스팟만 찍고 다니니, 사진만 보면 엄청 '알찬' 여행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속 빈 강정 같은 허무한 여행이었다.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한 여행에서 되려 피로도가 쌓이던 순간, 가장 나답게 여행을 했던 나의 첫 해외여행이 떠올랐다.



무계획 즉흥성은 나의 힘!



대학 1학년이던 2001년, 알바해서 모은 돈을 가지고 한 달 동안 인도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류시화 님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을 읽고 인도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무수한 젊은이 중 하나가 바로 나야 나, 나야 나! 다음 카페의 인도 여행 후기와 여행서적을 참고하며 홀로 어렵게 다녀온 내 첫 해외여행, 그때는 지금처럼 여행정보와 인터넷상의 공유가 많지 않은 시절이었다. 여행서의 제목은 '세계를 간다'였지만 업데이트가 느린 탓에 "세계를 헤맨다"로 바꿔 부를 정도로 페이지 채우기식의 정보가 다수였다. 신규 정보로 빠른 개정을 했다고 하더라도 각도기로 잰 것처럼  여행 시간과 동선을 맞출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인도라는 것을 인도 여행자들은 모두 잘 알고 있다. 도착해야 할 기차가 몇 시간이 지나도록 오지 않아도, 좌불안석하며 빈 선로만 쳐다보는 이는 나뿐이었다. 모두들 그러려니, 인생의 달관자. 참 구루(guru)가 옷깃에 스칠 정도로 많은 나라가 바로 인도이다.


지금 생각하면 무모하고 대책 없이 떠난 나의 첫 여행이다. 뭄바이 in - 뭄바이 out이었으므로 대충 가고 싶은 도시 몇 곳만 점찍어두었을 뿐, 숙소 예약 같은 것은 1도 없었다. 가려고 짜둔 흐릿한 동선도 몸 컨디션이 나빠지면서 대폭 바뀌기도 했다. 한 달이라는 여행기간은 어찌 보면 길지만 인도 배낭여행자들에겐 짧게 느껴진다. 그런데 그중 무려 일주일을 할애, 계획에도 없이 푸쉬카르 호수만 바라보고 앉아있기도 했다. 우리 돈으로 따지면 1,000원 정도 되려나? 저렴하고 허름한 방을 급히 잡아 며칠 묵기도 하고, 기차 도착시간이 새벽이라 날이 밝을 때까지 기차역에서 노숙 아닌 노숙을 하기도 했다.

2017. 01. 19  푸쉬카르 호수

알람 따위는 없이 내가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고, 무언가를 생각하고... 누구에게 보이기 위한 여행이 아니라 나 스스로를 위한 여행은 그때뿐이었나 보다. 그 후로 2002년에 인도 배낭여행을 다녀온 전남친 (현남편)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2017년에는 아이와 함께 다시 인도 여행을 떠났다. 모든 숙소와 루트는 계획되어 있었고 전보다 좋은 등급의 항공편과 기차 칸을 이용했지만 첫 여행만큼의 감흥은 느끼지 못했다. 꼭 가봐야 할 곳, 먹어야 할 음식, 쇼핑리스트처럼 체크를 하면서 만족도를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2001년 인도 여행을 다녀온 여자는 2002년 인도에 다녀온 남자를 2003년 힌디어를 배우는 모임에서 만났다. 공통된 화제가 있어서 대화는 잘 통했는데, 계획성 있고 깔끔한 성향의 남자는 즉흥적이고 대충 그러한 여자의 여행담을 의아해 하기도 했다. 특히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하고 왔다는 저 여자가 제정신이 맞는가 싶기도 했다고 나중에 고백했다.

갠지스강은 인도 사람들에게 굉장히 성스러운 장소이다. 이 강물에 목욕재계하면 모든 죄를 면할 수 있으며, 그 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고도 하고, 죽은 뒤에 이 강물에 뼛가루를 흘려보내면 극락에 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강물은 육안으로 보아도 흙탕물이며 배설물이 동동 떠있는 것이 보이기도 하고, 목욕하는 바로 옆에서는 빨래를 하고 있기도 한다. 코로나 시국이 아니더라도 제정신 박힌 사람이라면 굳이 똥물에 목욕할 필요는 없다는 것. 하물며 힌두교도도 아니면서 왜 때문에?






무계획 여행이었지만, 스프링 노트 한 권을 빼곡히 채울 정도로 열심히 기록했다. 매일 먹은 것과 지출내역을 빠짐없이 적어놓았다. 하루에 일기를 오전, 오후 두세 번씩 쓰기도 했는데 스마트폰이 없을 때라 사색하며 글을 쓰기 좋았던 시절이다. 일기의 내용은 20대 오글 감성이고 생각나는 대로 막 써 내려간 글이라 앞뒤 문맥이 이상하기도 하지만 대충 그날의 기록을 옮겨보자면 다음과 같다.

 


2001. 8. 3. 금 11:40 (AM)


7시 30분쯤 일어났다. 몸 상태는 찌뿌둥했으나 어제보다는 많이 나아진 듯싶었다. 8시쯤 숙소 앞에서 "만수"를 기다렸으나 만수는 오지 않았다. 혼자서 가트에 갔다. 가트에서 발만 조금 적셨다.

2001. 8. 3. 바라나시 강가 (गंगा, 갠지스강)

다른 가트에 갔다. 목욕을 하고 싶었으나 카메라 때문에 망설여졌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가 옆에다 두고 물속으로 첨벙 들어갔다. 목까지 다 적셨다. 보기에는 혼탁해 보이는 강가였으나 막상 들어가 보니 상쾌한 게 제법 좋았다. 옆에 있는 모녀 셋과 손을 이어 잡고 연신 몸을 푹 담갔다. 어제 산 펀자브 수트가 흠뻑 젖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인 여행객을 만났다. 그 남자에게 화장터 가는 길을 알려달라고 했더니 친절히 안내해주었다. 샨티 게스트 하우스는 화장터 근방에 있기 때문에 한평생을 힘겹게 살다가 재가 되어 사라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불과 10미터 남짓의 거리 앞에서 한 줌의 재로 인생을 마감하는 육체를 보노라니 기분이 묘했다. 1시간 넘게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연기에 눈이 매웠으나 개의치 않았다. 주황과 금색을 띤 천을 덮고 들것에 실려온 주검은 내 허벅지만 한 나무 더미 위에 놓여 이내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었다. 정말이지 잊히지 않는, 아니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지금은 화장품도 많이 가지고 다니고, 신발도 여러 켤레에 옷도 여러 벌, 드라이기와 고데기는 여행 필수품이다. 하지만 2001년의 풋풋한 나는 선크림도 안 바르고 다니고, 옷은 두 벌 돌아가며 빨아 입는 등 혼자 배낭여행 다니던 짐이 이스트 백팩 하나뿐일 정도로 단출했다. 계획 없이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벼운 짐과 어지럽지 않은 생각은 오히려 나를 주체적인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다.

매일 접하는 무수한 SNS 피드와 포털 사이트 메인을 장식하는 현란한 제목의 콘텐츠는 나도 그러한 여행루트와 그러한 삶을 따라가야 '보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내가 가고 싶은 여행지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적당히 널브러져 휴식을 취하며 1박 2일 또는 2박 3일을 보내면 돈값 못하는 텅 빈 여행을 하고 왔다는 소리 없는 질책이 들리는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진짜 여행은 무계획과 즉흥성에 있다. 진짜 여행을 해야 다시 '나다워' 질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다시 갠지스강에서 목욕을 할 수 있을까?






(덧붙임) 2001. 8. 3. 갠지스강에서 찍은 사진의 제 모습만 가림 처리했습니다. 저는 (늙기는 했지만) 저 때와 동일한 자연인의 모습이라 혹시라도 알아보는 분이 있을까 봐 비겁하게 제 얼굴만 스티커로 가리고 말았네요. 20년 전이고, 참 구루 같은 제 첫 목욕 친구분들이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리고 이 '죄'는 언젠가 갠지스강에서 목욕하며 씻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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