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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에서 유서 쓰기

하늘 위에서 바라본 알프스

by 새벽나무

생애 두 번째 유서를 썼다. 유서,라고 정직한 제목을 쓰고 나니 괜히 비장해졌다. 사실 죽음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고 쓴 단어인데도 복잡한 심경이 되었다. 나무로 된 스툴에 앉은 채 몸을 들썩였다. 오래된 나무 바닥의 벌어진 틈새가 내는 마찰음이 울렸다.


스위스에서 선택한 숙소는 인터라켄에서 기차로 한 정거장 더 와야 있는 곳이었다. 오래된 호텔 건물을 한국인 사장님이 싼 값에 구입해 맨 위층을 게스트하우스로 개조한 곳이었다. 아래층은 여전히 호텔로 운영하고 있어 내가 묵는 나흘 동안도 외국인 게스트들을 간간히 마주쳤다.


첫 여행지였던 런던에서 길 잃고 울고불고하던 겁쟁이는 이후 파리와 프라하, 오스트리아를 돌아다니며 금세 담대해졌다. 어차피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만, 하곤 자신만만하게 아무 곳이나 아무렇게나 돌아다녔고 심지어는 숙소도 구해놓지 않은 채 스위스까지 온 거였다.


기차에서 보이는 한국인에게 다짜고짜 오늘 어디서 묵냐고 물었다. J는 나보다 열 살이 많은 언니였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고 후련한 마음으로 떠나온 그녀는 아주 넉넉한 마음으로 웃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다.


그렇게 한 푼이 아쉬운 학생들은 쉬이 알기 힘든 숙소에 짐을 풀었다. 맨 위층까지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건 불편한 일이긴 했지만 원래 호텔이었던 만큼 1층 라운지와 식당이 넓었다. 옥탑방 신세인 한국인 게스트들은 숙소 건너에 있는 작은 마트에서 빵이나 요거트를 사와 테이블 가득 둘러앉아 시답잖은 농을 나누는 것으로 매일 아침을 열었다.


데스크에 있던 남자 직원 역시 한국인이었다. 그는 체크인한 뒤 주방에 내려와 물은 어디 있냐고 묻는 나를 깔깔 비웃었다.


“여기가 한국인 줄 알아?”


나는 컵을 들어 어색하게 싱크대 수도에서 흘러나오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는 스위스에서는 길가 눈을 퍼먹어도 서울에서 먹는 생수보다 깨끗할 거라고 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나는 서울에서도 함박눈 퍼먹길 좋아하는 괴랄한 식성의 소유자였으니까.


“새벽나무는 여행 준비도 안 하고 스위스에 온 거야?”


전날 나를 숙소로 끌고 와 준 J가 아침식사 자리에서 물었다. 어김없이 우리는 마트에서 사온 요거트와 사과, 빵을 우물우물 먹고 있었다.


“딱 하나 미리 예약해둔 게 있어요.”

“뭔데?”

“스카이다이빙.”


나는 짐짓 비장하게 목소리를 깔며 말했다. 내 예상대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심지어 옆 테이블에 있던 외국인 부부까지 와우, 하며 호들갑에 동참했다.


“내일이에요.”

“날씨가 좋아야 할 텐데.”


스위스는 그 거대한 풍광이 지나치게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이었지만 사실 하늘과 가까워질수록 날씨가 변덕스럽게 오락가락하는 곳이기도 했다. 때문에 융프라우에 오르는 일 역시 여행자들마다의 운에 맡겨 두어야 하는 일이었다.


내 목표는 융프라우가 아니었다. 한국에서 온 여행객들은 유독 그 위에 올라 얼큰한 컵라면 먹는 걸 좋아했다. 나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라면 한 봉지도 다 먹지 못하는ㅡ위에 말했듯ㅡ괴랄한 식성의 소유자였다. 꼭 융프라우가 아니더라도 스위스는 맘만 먹으면 오를 수 있는 동산이 많았다. 어디를 올라 어디를 보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나는 융프라우에 오르지 않겠다. 대신 융프라우 위로 뛰어내리리라. 나는 남들과 다른 노선을 생각해 낸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우습게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스스로를 아주 잘 알고 내린 결정이었다. 나의 둔감함은 때때로 지극히 현실적인 감각을 떨어뜨리고 오로지 몽상만을 향해 달리기도 했다.


그때도 마찬가지.


“내일이라고? 유서 쓰고 가.”


한국인 사장님이 무심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둘러앉은 한국인 직원과 여행객들이 사장님 잔인하다며 한소리씩 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웃으며 그 말을 되새겼다. 그리고 괜히 진지해졌다.


“그래야겠어요.”


그렇게 그날의 여행을 끝내고 돌아와 맨 위층 게스트하우스 복도에 놓인 공용 컴퓨터 앞에 앉아 쓰는 유서였다.


'내일과 다음 생 중에 어느 것이 먼저 찾아올지 우리는 결코 알 수가 없다.' - 티베트 속담

모르지, 내가 기대했던 것이 오지 않을 수도.
그래도 스위스에서 죽는다면, 나는 만족해.

혼으로라도 베네치아에 다녀오지 뭐.


융프라우로 다이빙하는 건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환상적인 일이었다. 그 어떤 순간보다 자유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하늘에 두둥실 떠서 날았다. 무자비하게 뺨을 밀어내는 차가운 바람마저 상쾌했다. 360도 몸을 빙글 돌려보아도 시야를 가리는 것 하나 없었다. 나는 하늘 위에서 알프스를 만끽했다.


운 좋게도 살아서 다시 숙소의 문을 열었다. 머릿속으로 그린 그림은 아주 당찬 걸음으로 문을 열어젖히고 들어가 호쾌하게 인사하는 거였는데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도통 마음먹은 대로 되질 않았다. 게다가 사실 그 애매한 시간에 숙소에 남아있는 여행객은 없었다. 나는 데스크 직원과 주방 크루들의 조촐한 박수세례를 받으며 식당 테이블을 짚고 자리에 앉았다.


“배고파.”

“그럴 만도 하지.”


아침에 출발해서 돌아온 시간은 어느덧 오후 3시였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시간은 고작 40초인데 봉고차에 용감한 스카이다이버들을 싣고 마을을 한 바퀴 돈 뒤 경비행기가 모인 비행장에 도착해 안내 서류에 사인을 하고, 안전 수칙을 듣고, 옷을 갈아입고, 날씨를 살펴보다 최적의 순간이 왔을 때 비행기에 올랐다. 죽을 수도 있다고 적힌 서류에 사인을 하는 순간 다시 한번 침을 꿀꺽 삼켰다. 어제 유서 쓰기 잘했다, 고 생각하며.


유럽의 다른 도시에서도 컵라면을 제외한 한식 먹기는 힘든 일이긴 했지만 스위스는 더 악독했다. 유난히 비쌌고 심지어 맛도 없었다. 때문에 입에 잘 맞지 않는 퐁듀니 요거트니 빵 쪼가리만 먹는 중이었다. 한국인 사장님이 운영하는 호텔 식당에는 당연히 한국인 주방장이 있었다. 때문에 한식 메뉴도 몇 개 있었는데 죄다 비싸서 먹어볼 엄두를 못 내었다.


하지만 그날은 달랐다. 죽음의 가능성을 뚫고 하늘에서 떨어진 날이었다. 나는 비장하게 손을 들고 말했다.


“된장찌개 정식 주세요.”


까만 뚝배기에 보글보글 끓는 채로 나온 된장찌개는 3만 원의 위용치곤 한없이 초라한 밑반찬과 함께였다. 나는 아직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갈 퍼서 얼른 입에 넣었다. 입천장이 뜯어지건 말건 허기가 먼저였다. 국과 밥을 몇 번 번갈아 먹고 씹고 나니 뒤늦게 맛이 느껴졌다. 된장찌개는 밍밍했고 밥은 푸슬푸슬 알알이 흩어졌다. 나는 배추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었다.


“배 많이 고팠구나.”


주방장 아저씨가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밥을 한 입 더 떠 넣으며 3만 원 받을 거면 좀 더 맛있게 만들 수 없어요, 라는 말을 꾸욱 삼켰다. 대신 웃으며 말했다.


“살아있는 건 배 고픈 일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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