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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Jun 24. 2022

양귀자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현대소설

양귀자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양귀자 작가는 나에겐 가깝고도 먼 작가다. 학창 시절 읽었었던, 지금은 파편적으로만 기억나는 <원미동 사람들>을 제외하곤 양귀자 작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1년 사이에 2권이나 읽게 될 줄이야. 신기하다. <모순> 그리고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2권 모두 굉장한 몰입감을 주었지만, 이번에 읽은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은 좀 더 특별한 경험이었다.


작게는 나의 상상과 다른 문체를 만났다는 것. 몇 권 읽진 않았지만 내 기억 속의 양귀자 작가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문체의 소유자였는데.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베일 것 같은 냉소적이고 날카로운 문체로 전개된다. 예상과 다른 문체에 낯설기도 했지만, 작가의 또 다른 모습을 본 것 같은 신선함이 더 컸다. 게다가 글의 소재나 분위기에도 날카로운 문체가 더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면서, 책을 읽어나갈수록 글이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크게는 평소와 다른 방식으로 읽은 책이라는 것. 보통 나는 책의 내용을 나름대로 해석하고, 그 의미를 확장하며 책을 읽는다. 그렇기에 특정 세대 혹은 시대를 보여주는 <호밀밭의 파수꾼>이나 <위대한 개츠비>같은 소설은 내겐 가장 어려운류의 책들이었다. 소설 속에서 보여주는 장면이 그 자체로 의미가 있는데, 난 나도 모르게 숨겨진 의미를 찾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역시 이와 비슷한 글이란 생각이 든다. 물론 최근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존재하지만. 그렇기에 이번엔 단순히 책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을 넘어, 책에 담긴 고통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싶었다. 얼마 전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읽고 팟캐스트 멤버들과 대화를 하며 경험하지 못한 세상을 나의 경험만으로 이해하고, 그 크기를 상상하는 것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위나 명예에 초월한 담백한 지적탐구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었다.
알고 보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알아야 할 것'들을 그냥 지나치고 있는가.
알아야 할 것에 비하면 알고 있는 것은 얼마나 작고 초라한가.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삶이란 신이 인간에게 내린 절망의 텍스트다




소설은 남성의 폭력에 노출된 채 정신적 수동성에 내던져지는 여성의 모습과 이런 폭력이 당연시되는 사회에 염세를 느낀 엘리트 여성 '강민주'가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인 '백승하'를 납치하는 일련의 과정을 그린다. 지성과 이성을 무기 삼아 우리 사회에 뿌리내린 문제를 해결하려는 강민주는 얼핏 소시오패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소시오패스가 개인의 성공을 위해 행동한다면, 강민주는 자신의 희생으로 사회에 존재하는 유·무형의 폭력을 해결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말이다.


강민주는 여성 문제 상담소에서 일하며 남성 혹은 사회의 폭력에 피해를 입은 여성을 상담해 준다. 하지만 강민주에게 이 여성들은 폭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심한 존재들로, 자신에게 필요한 정보를 주는 소스일 뿐이다. 구조적 폭력에 관한 정보를 모은 강민주는 자신이 이 굴레를 깰 적임자(?)라 생각하며 다소 극단적인 계획을 세운다. 앞서 말했듯 최고의 미남 배우이자, 여성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백승하를 납치하는 것. 그리고 여성이란 이유만으로 여성에게 행해진 구조적 폭력을, 가장 대중적이면서 이상적인 남성인 백승하에게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이 문제를 공론화 시키는 것. 마침내 강민주는 자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황남기의 도움을 받아 백승하를 납치하는데 성공한다.




그럼에도 나는 순례를 시작한다. 이유는 하나뿐, 길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내가 지나간 가시덤불들, 그것을 사람들은 훗날 '길'이라 부를 것이다.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납치 이후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내용은 미러링에 가깝다. 강민주는 백승하를 감금하고, 황남기를 시켜 폭력을 가하는 등 강압적인 태도로 그를 억압한다. 그 후엔 가짜 뉴스를 퍼트려 백승하를 쓰레기로 만들고, 언론에 여성을 향한 구조적 폭력을 지적하는 선언문을 보내 공론화에 성공한다. 차질 없이 진행되던 강민주의 계획은 다름 아닌 그녀의 통제하에 있는 백승하 때문에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바로 백승하가 강민주의 상상이상으로 괜찮은 남성이었던 것이다. 이유 없는 폭력에도 그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백승하의 모습에 강민주는 사랑(혹은 호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이 사랑이 에로스와 아가페 중 어디에 가까운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사랑을 느낀 강민주가 아들을 보고 싶어 하는 백승하를 위해 아들을 납치 장소로 데려오고, 그와 둘만의 연극을 준비하는 등 백승하의 감정과 상황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변화의 끝엔 비극이 기다리고 있었다. 꼬리가 길면 잡힌다고, 백승하의 아들을 몰래 데려오는 과정에서 그녀를 스토킹하는 김인수(김연수)에게 뒤를 밟히고 만 것이다. 게다가 그녀를 우상화했던 황남기는 백승하에게 사랑을 느끼며 변하는 강민주의 모습에 그녀를 죽일 계획을 세운다. 그리고 김인수(김연수)의 신고로 경찰이 들이닥치기 직전, 황남기는 백승하와 마지막 연극을 시연하는 강민주를 총으로 쏴 죽인다. 후에 경찰에 붙잡힌 황남기는 강민주가 평범한 여성이 되는 것 같아 두려(?)웠다며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죽였다고 진술한다.






고르디우스의 매듭




폭력을 해결하는 수단으로 폭력을 선택한 강민주의 선택을 비극으로 그림으로써 작가는 우리 사회의 문제가 결코 폭력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물론 수천 년간 이어져 온 남성 중심의 사회는 쉽게 바뀌지 않은 채, 오랜 시간 변화의 과도기 상태에 머물고 있다. 이 상황이 오래 지속되는 이유가 단순히 우리의 의식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관습이라는 문화적 문제와 산업의 대대적인 변화라는 경제적 불안정성, 이 두 개의 커다란 구조적 문제가 동시에 대두됐기 때문은 아닐까. 여기에 정치, 사회 등 수많은 요소들이 추가로 얽히고설키면서 문제는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하는 우린 문제들 간에 (동의되지 않은) 우선순위를 메기기 시작했다. 그 결과는 어느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서로의 문제만을 지적하는 악순환의 반복이다. 물론 이 세상에 풀 수 없는 문제는 없다. 인간은 언제나 답을 찾았고, 지금의 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지속된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사람들이 결국 선택한 답은 폭력이었고, 그 결과는 건강한 갈등이 아닌 분열과 혐오다. 분열과 혐오로 가득 찬 사회라면 문제가 해결되더라도 그 끝은 이 소설처럼 비극이지 않을까?



그전까지는 인간이란 모두가 자기 자신의 문제에만 매달려
작은 것에도 싸우고 할퀴는 보잘것없는 미물이라고 믿었으니까요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누구나 메시지의 전달자가 될 수 있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있다. 애초에 사실과 진실을 구분할 수 있을까란 의문은 있었지만, 더 이상 이것을 구분하는 것은 의미가 없는 듯하다. 확증편향과 가짜 뉴스로 사람들은 자기 확신에 빠졌고, 다름은 틀림이 돼 맹목적인 비난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리터러시가 중요하다 외치는 언론 역시 별반 다르지 않다. 강민주의 가짜 뉴스를 대서특필하고, 강민주의 언변에 매료된 후에야 구조적 폭력을 문제 삼기 시작했지만 결국 이슈용에 불과했던 소설 속 언론의 모습이 어딘가 익숙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 아닐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진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담소 시간을 잠시 즐겁게 해줄 가십거리를 더 원한다는 사실을
백승하는 이제야 터득하기 시작한 것이다.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中



이 책의 주제를 처음부터 알았던 것은 아니다. 처음엔 그저 누군가의 강렬한 소망을 다룬 글이라 생각했고, 글을 읽기 직전에서야 여성소설이란 것을 알았다. 하지만 양귀자 작가의 말처럼 이 소설은 여성소설의 범주를 넘어서 우리 사회에 큰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수많은 유·무형의 폭력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은 사랑과 나를 뛰어넘는 공감이라는... 개인적인 존재이지만 혼자서는 생존할 수 없어 사회를 구성한 인간이 갈등을 더 나은 미래로 나아갈 자양분으로 삼기 위해선 서로를 향한 애정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나와 다른 이에게 관심을 갖고, 그 사람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그럼에도 이 소설이 여성소설에 조금 더 가까운 이유는 아무리 뛰어난 강민주라는 여성조차, 김인수라는 이름으로 접근한 남성의 스토킹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건이 마무리된 후 언론에 김연수로 등장하는 이 남성의 모습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조금씩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지만, 너무 늦기 전에 모두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존중받으며 살아갈 수 있는 사회로 다가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나는 가능하면 이 소설이 여성소설의 범주에서만 읽히지 않고
세상의 온갖 불합리와 유형무형의 폭력에 반대하는
모든 사람에게 함께 읽히기를 감히 소망한다.
그것이 삶을 대하는 진정한 예의라고 믿는다.

- 작가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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