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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name Aug 02. 2022

마쓰이에 마사시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현대소설

마쓰이에 마사시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하늘은 파랗고 햇살이 강한 날들의 연속이다. 빨강, 분홍, 노랑. 색색의 꽃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뽐내던 덕수궁 돌담길의 짧았던 봄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왔다. 뭐가 그리 급했는지 돌담길이 초록색으로 옷을 갈아입기까지 걸린 시간은 일주일이 채 걸리지 않았다. 화려하진 않지만, 은은함과 편안함을 주는 초록빛 거리에선 또 다른 매력이 느껴졌다. 날도 점점 더워지는 것이 자연스레 걸음은 느려졌고 가끔 불어오는 바람은 그 어느 때보다 시원했다. 예전엔 그저 덥기만 했던 여름의 다른 모습을 본 듯한 기분이었다. 돌담길의 여름은 삶에 치여 잊고 지냈던 일과 삶에 대한 질문을 떠오르게 했다.


감자를 감싸고 있던 부드러운 흙은 여름의 아침 햇살을 받아 금방 하얗게 말라간다.
오랜 시간 양지바른 곳에서 볕을 쪼이고 있던 새끼 곰 등에 얼굴을 가까이 갖다 대면
이런 향기로운 냄새가 날 것 같았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中



마쓰이에 마사시의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는 한 건축 사무소에 갓 취업한 주인공과 건축 장인 '무라이' 선생을 중심으로, 여름 한철 시골의 고급 빌라에서 대형 건축 프로젝트를 준비하는 사람들의 일상을 그린다. 이들의 일상은 평범하다. 매일 아침 커피로 하루를 시작하고, 끊임없이 좋은 구조와 가구의 설계를 고민할 뿐이다. 하지만 그 평범함 속에 절묘하게 녹아있는 건축 장인의 철학과 그 길을 함께 걷는 직원들의 모습은 전혀 평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느리지만 명확한 목표를 갖고 '주변에 녹아드는 소박하면서 편안한 건축물'을 만드는 것. 단순히 건물을 짓는 것이 아닌, 그 안에서 생활할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


좋은 설계도를 위해선 하루에 몇 자루의 연필을 사용해야 할까? 열 자루다. 더 많은 연필은 난폭하거나 서두르고 있다는 것으로, 생각 없이 일하고 있다는 증거다. 더 적은 연필은 너무 느긋한, 결국 누군가가 사는 공간을 만드는 건축의 기본을 저버린 것이다. 딱 열 자루 정도의 연필이 일의 정확성도 지키면서 연필도 정성스레 다루는 것이다. 이처럼 건축 설계 과정과 한여름 시골 풍경의 세밀한 묘사는 마치 내가 소설 속 공간에서 등장인물들과 함께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침실은 너무 넓지 않은 쪽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숙면을 도와.
천장도 높지 않은 편이 좋아.
천장까지의 공간이 너무 넓으면 유령이 떠돌 여지가 생기거든.”
우스갯소리를 하듯 말했다.

“침대와 벽 사이는 말이야. 한밤에 잠이 깨서 화장실에 갈 때,
한 손을 가볍게 내밀면 바로 닿을 만한 거리가 좋아.
캄캄해도 벽을 따라서 문까지 갈 수 있고 말이지.
다이닝 키친의 경우, 요리하는 냄새가 좋은 것은
식사하기 전까지만이고 식사가 끝나면 바로 싫어지지.
주방의 천장높이와 가스풍로, 환기통 위치가 냄새를 컨트롤하는 결정적인 수단이야.”
장인이 전달하는 비법 비슷했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中



갓생. 워라밸. 워라블. 우린 더 나은 삶, 더 좋은 삶을 꿈꾼다. 그 삶의 모습과 삶을 이뤄나가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하지만 잊을만하면 찾아와 우릴 고민에 빠뜨리는 질문들은 비슷할 것이다. '어떤 삶이 좋은 삶일까?', '우리는 왜 그리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할까?' 닿을 수 없는 이상 같은, 추상적인 이 질문들은 언제나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 우린 그저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질 뿐이다. 문제는 삶에 치여 질문 그 자체를 잊고 돌이킬 수 없는, 잘못된 선택을 한다는 것이다. 초보 건축가였지만 조금씩 성장하는 주인공의 모습으로 우리가 '잊었다'라고 말하는, 일과 삶을 향한 질문의 답일지도 모르는 있는 열쇠를 일러주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가 좋은 이유다. 


소수 정예로 구성된 사무소에서 주인공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지 않다. 프로젝트를 제때에 마무리 하려면 모두가 1인분의 몫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건축 설계는 서두른다고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한번 틀어진 설계는 되돌리는데 수십 배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처음부터 제대로 해야 한다. (그럼에도 수정은 피할 수 없지만.) 자신의 어설픔과 부담감을 두려워하던 주인공은, 여름이 주는 여유와 계절의 변화 속에서 어엿한 건축가로 성장한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한 충분한 고민을 하면서 말이다. 프로젝트 신청 직전, 무사이 선생이 뇌출혈로 쓰러지면서 소설의 분위기는 급변한다.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소설의 여유와 편안함이다. 그 여유 속에서 인물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만남, 이별, 죽음. 그들이 마주하는 다양한 상황은 우리 삶의 중요한 것은 어쩌면 특별함이 아닌 평범함에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잘 다루지 못하는 새 노를 손에 들고,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채,
나는 작은 보트를 젓기 시작하고 있었다.
곁눈질하다가는 금방 밸런스를 잃고 말 것이다.
보트는 어느 틈엔지 온화한 만을 빠져나가 망망한 큰 바다의 일렁임 속에서
어설프게 앞으로 나아가려고 하고 있었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中



최근 날카로워진 신경과 조급해진 마음으로 선택한 일들이 있다. 과연 다른 상황이었다면 다른 선택을 했을지는 모르겠다. 날 힘들게 한 것은 길을 잃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의 부족함이 크게 느껴져서. 방법이 아닌 방향이 잘못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마음은 더 조급해졌고, 머리는 굳기 시작했다. 그때 만나서일까. 여름의 여유가 어느 때보다 크게 느껴졌다. 또 언제 사라질지 모르지만, 이 여유를 조금은 더 오래 간직하고 싶다. <나의 아저씨> 이선균의 마지막 대사가 떠오르는 밤이다.


'지안, 편안함에 이르렀나.'



무언가 뒤집혔을 때 작업이 단순하면 단순할수록 그것이 확실하게 구원이 된다.
"당황하지 않아도 돼. 아직 시간은 충분하니 천천히 하면 돼"
그렇게 말하고 선생님은 거실로 내려갔다.

-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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