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민 Aug 23. 2019

게스트하우스 ‘인싸’ 할머니와 양말 도난 사건

비 오는 파리의 밤

파리에서 주어진 시간은 나흘뿐이었다. 말이 좋아 나흘이지, 밤에 도착해 이틀 관광하고 새벽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몽마르트 근처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몽마르트 언덕은 가보지도 못했다. 다른 관광지를 찾아다니느라 바빴기 때문에. (몽마르트 언덕은 숙소에서 걸어서 10분이었는데도 굳이 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 작은 에피소드도 있었다. 게스트하우스에서 Y의 양말을 도둑맞은 것이었다. 숙소에 머문 둘째 날 4인실 객실에 새로운 투숙객이 들어왔다. 미국에서 온 것으로 보이는 할머니 두 분이었는데, 무척 흥이 많고 시끄러웠던 것으로 기억한다. 게스트 하우스에 투숙하기에는 조금 나이가 많아 보였음에도 그들은 개의치 않고 게스트하우스 생활을 즐겼다. 조금 유난스러워 보이긴 했지만, 할머니들의 인상이 나쁘지는 않았다. 그런데 Y와 내가 외출한 사이, 또 다른 투숙객이었던 할머니들이 Y가 빨아서 말려 놓은 양말 두 짝을 슬쩍했다. 


사건의 경위는 이렇다. 외출을 마치고 숙소에 돌아온 Y는 자신의 침대를 두리번거리며 양말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Y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외출하기 전, 나 역시 Y의 침대 난간에 걸려있는 축축한 양말을 보았기 때문에 그저 양말 두 짝이 침대 밑으로 떨어졌겠거니 생각했다. 누군가 빨랫감으로 널어놓은 양말을 훔쳐 갈 것이라곤 전혀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내가 샤워를 마치고 나오니 Y가 격앙된 목소리로 나에게 소리쳤다. “언니! 아무래도 이 할머니들이 제 양말을 훔친 것 같아요!” 아니 훔칠 게 없어서 남이 신던 양말을 훔치다니…. 좀 황당했지만, Y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Y는 두 할머니가 머물던 2층 침대 한 켠,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할머니들의 베개 밑에서 잃어버렸던 양말 두 짝을 발견했다. Y가 2층을, 할머니들이 1층을 사용하고 있었다면 Y의 양말이 할머니들의 침대 위에서 발견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Y와 나는 긴 여행 동안 2층 침대는 꽤 불편한 자리임을 깨달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줄곧 1층만 사용하게 됐다. 발이 달린 것도 아닌데, 1층에 있던 양말이 2층 침대 베개 밑까지 들어가다니….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이건 충분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양말을 되찾자 나는 갑자기 2층 침대에서 양말을 발견한 Y가 놀라웠다. 그래서 Y에게 어떻게 2층 침대를 둘러볼 생각을 했냐고 물었다. Y는 내가 샤워하는 동안 양말이 혹시 침대 밑으로 들어간 것은 아닌지 이곳저곳을 살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베개 옆으로 수줍게 삐져나온 양말을 발견했고, 베개 밑에 숨겨진 양말이 자신의 양말임을 확신했다고. 역시 사람의 촉이란 무서운 것이다.


도난당한 것은 겨우 신던 양말뿐이었지만, 양말 사건에 대해 할머니들에게 충분히 따져 물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흥이 넘치는 할머니들은 클럽에 가느라 밤늦게까지 숙소에 들어오지 않았고, 우리는 그렇게 전후 사정을 따져 물을 타이밍을 놓쳤다. 또 온순한 성품의 Y는 시간이 지나자, 양말을 되찾았으니 굳이 따질 필요도 없을 것 같다며 너그럽게 양말 사건을 종결지었다. 나였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