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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민 Aug 22. 2019

베르사유 궁전에서 만난 노인

다시 생각해보면, 파리의 첫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없는 살림에 여행하느라 여행 중간중간 굴욕감을 맛봐야 했지만, 우리의 여행이 나쁘다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상황은 점점 안 좋아졌다.


파리에서 머문 지 이삼일 정도 됐을 무렵, Y와 나는 아침 일찍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우리가 묵었던 게스트하우스는 욕실이 딸린 4인실이었는데 첫날은 투숙객이 없어서 Y와 나, 단둘이 머물렀다.) 이날은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전에 갈 예정이었으므로,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서둘렀다. 숙소 근처에서 환승역으로, 환승역에서 또 베르사유 궁전으로 향하는 노선으로 메트로를 갈아타고 한참을 달리자 한 역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렸다. 우리와 목적지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Y와 나도 그들을 따라 하차했다. 그리고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한 걸음 한 걸음 이동했다. 역에서 베르사유 궁전까지는 꽤 걸어야 했다. 그러나 무리 지어 가는 사람들을 따라가면 길을 잃을 일은 없었다.


우리는 역 근처 패스트푸드점에서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그리고 높은 가로수와 고풍스러운 건물이 줄지어 있는 동네를 지나 베르사유 궁전 입구에 도착했다. 버킹엄 궁전이 가장 아름다운 줄 알았는데, 베르사유 궁전은 버킹엄 궁전과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입구는 버킹엄 궁전과 매우 비슷했으나, 건물과 정원 등에서 프랑스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관광객 무리를 따라 도착한 베르사유 궁전
아름다운 정원으로도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

유명 관광지다 보니, 입장권을 사는데도 꽤 오래 걸렸다. Y와 나는 기다랗게 늘어선 입장 줄로 향했다. 그리고 줄이 줄어들기를 무한정 기다리고 있는데, 한 한국인 할아버지가 말을 걸어왔다. 은퇴하고 여기저기 발 닿는 대로 돌아다닌다는 그 할아버지는 배낭 하나를 달랑 메고 유럽 곳곳을 여행하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노인이었지만, 초롱초롱한 눈빛과 열정만큼은 청년 못지않았다. 그는 Y와 나에게 놀라운 이야기를 전했다. 할아버지는 비행기를 타고 유럽 다른 나라에서 프랑스까지 왔다고 했다. 그런데 그가 탄 비행기가 조금 특별했다. 그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기 위해 연습하고 있는 예비 파일럿의 비행기를 타고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목숨을 담보로 해야 하지만, 덕분에 저렴하게 올 수 있었다고 자랑하듯 말했다. 보통 그 나이가 되면 편안한 여행을 하기 마련인데….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입구가 가까워지자 우리의 대화도 자연스럽게 마무리되어 갔다. 무슨 대화를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체로 할아버지가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 Y와 나는 예의에 어긋나지 않을 정도로 짤막한 답변을 했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우리가 이 대화에 흥미를 느끼든, 느끼지 않든 상관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그저 우리의 청춘이, 젊음이 부러워 자꾸 말을 걸었던 것 같다. 대화가 끝날 때쯤 “돈이 있다면, 너희와 내 나이를 바꾸고 싶다”고 말한 걸 보면. 


비수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베르사유 궁전은 관광객들로 가득 찼다. Y와 나는 마치 기차놀이를 하듯, 사람들의 뒤를 쫓아 베르사유 궁전 여기저기를 이동해 다녔다. 오후가 다 돼서야 우리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시내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가기 전, Y와 나는 시내에 있는 슈퍼마켓에 들렸는데, 냉동식품으로 저녁을 해결해 한 푼이라도 아껴볼 생각이었다. 우리의 여행은 대부분 이런 식이었다. 아끼고, 또 아끼는. 이토록 근검절약한 여행이었지만, Y와 내가 아끼지 않고 돈을 펑펑 쓰는 곳이 있었다. 바로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스타벅스다. 본격적인 유럽 여행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각 나라의 시티 텀블러를 모으기 시작했다. Y와 나는 새로운 도시에 도착하면 강박적으로 스타벅스를 찾았고 각 나라와 그 도시의 상징물이 새겨진 텀블러를 사고 괜히 뿌듯해했다.

루브르 박물관 입장을 기다리며
루브르 박물관 뒤편 광장의 모습

파리를 여행하는 동안, 우리는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도 들렸다. 여행 둘째 날에 갔는지, 셋째 날에 갔는지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우리는 마치 유리 온실같이 생긴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꽤 오래 줄을 선 기억이 있다. 지하 출입구로 가면 더 빨리 입장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땐 왠지 정식 출입구로 입장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알다시피, 루브르 박물관을 하루 안에 다 둘러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며칠은 봐야 전시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느 관광객들처럼 루브르 박물관에 왔다는 데 큰 의의를 뒀다. 그리고 모나리자 같은 주요 전시품을 중점적으로 보며 두세 시간 내에 루브르 박물관 관광을 마쳤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우리가 신기했던 것은 모나리자 그림이 생각보다 작았다는 것. 그리고 그 앞에만 관광객들이 몰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을 보는지 사람들의 뒤통수를 보는 건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Y와 나는 오르세 미술관으로 이동했다. 지금은 전시를 보는 취향이 생겼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저 유명 작가들의 전시나 가는 많고 많은 갤러리 족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르세 미술관의 작품은 마치 미술 교과서를 옮겨 놓은 것처럼 매우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사실 루브르 박물관과 오르세 미술관을 간 건 전적으로 내 계획이었다. Y는 원래 박물관, 미술관 등에는 흥미가 없었다. 하지만 전시 관람을 좋아하는 나 때문에 Y는 영국에서도, 스페인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유명 미술관과 박물관에 끌려다녀야 했다. 하지만 다행히 무던한 성격의 Y는 미술관, 박물관 투어에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나름대로 전시를 즐기는 경지에 이르렀다. 시작이야 어쨌든 Y를 전시의 세계로 인도한 건 나에게 매우 뿌듯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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