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3.6
얼죽아가 있다면, 나는 쪄죽뜨이다. 한여름 쪄죽을 지언정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내가 아이스 커피,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마시는 일은 일 년 중 손에 꼽는데, 정말 더운 날 밖에 다녀야 하거나 남편과 둘이 함께 마시는 커피로 한 잔을 골라야할 때 만이다. 혼자 마시는 커피로 아이스 음료를 시키는 일은 거의 없다. 몸이 찬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커피는 뜨겁거나 적어도 따뜻해야 맛있다는 생각에서다.
뜨거운 커피의 문제점이 하나 있다. 연초에 치과에 가서 스케일링을 받고 결과(?)를 들으니, 관리는 잘되고 있으나 아랫니 치아가 제법 변색되었단다. 치아 변색의 큰 원인이 커피에 있으니 가능하면 커피를 자제하거나 빨대를 이용해 드시란다. 하얀 치아를 위해 커피를 포기할 것인가, 그냥 누렁니를 데리고 살 것인가. 뜨거운 커피를 좋아하니 빨대를 이용해 마시는 방법 또한 탈락이다. 어쩔 수 없이 누런 이를 데리고 커피를 즐기기로 했다.
오늘도 뜨겁게 커피를 내려마시다 내 치아가 생각이 났지만, 어쩔 수 없지. 이미 중년의 여성이니 치아 미백은 내려놓자. 그러다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10년 전 스페인 여행 때가 생각났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기 전, 친정 식구 여섯이 스페인 여행을 다녀왔다. 친정 부모님, 언니 내외와 우리 부부가 갔으니 성인만 여섯이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그때 그 스페인 여행은 “적절하고” “쾌적하고” “즐거운” 여행의 표본이 되어 있다. 학생이 아니니 너무 아껴야만 하는 여행도 아니고, 자유 여행으로 가고 싶은 곳을 골라 넣어 계획을 짠, 어른만 여섯이니 먹는 것도 다양하게 경험할 수 있었던 그런 여행.
그때 일정 중 톨레도에서 코르도바까지 차를 렌트해 이동하는 날이 있었다. 미니 밴을 빌려 어른 여섯이 타고 뜨거운 여름의 스페인을 가로질러 가는 여정이었다. 아무리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차라지만, 중간에 쉬기도 해야 해서 휴게소에 한 번 들렀다. 휴게소라고 해봤자 우리나라 휴게소처럼 커다란 건물이 있고 가게가 빽빽히 들어서있는 그런 곳이 아닌, 자그마한 주차장이 딸린 공중 화장실과 작은 가게가 하나 혹은 몇 개 있는 곳이었다. 잠깐 내렸을 때도 해가 어찌나 내리쬐던지 정말 뜨거운 여름날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는 커피를 마시자며 작은 가게에 들어갔는데, 그때만 해도 스페인어라고는 “올라”와 “그라시아스”밖에 모르던 시절이니 영어로 아이스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가게 안에 있던 여자 종업원 두 분이 아무리 얘기를 해도 아이스 커피를 알아듣지 못한다. 커피는 ”카페“니 비슷하게 전달이 되었는데 아이스 카페를 달라고 하니, 도저히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결국 그냥 카페를 하나 주문하고 따로 아이스를 달라고 하니 ‘영문은 모르겠지만 달라니 준다’하는 태도로 커피 한 잔과 따로 컵에 얼음을 담아주었다. (아마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휴대폰으로 “얼음”을 검색해서 스페인어 “hielo”를 찾아 말했던 것 같다.) 우리는 “아니 이걸 같이 달라는데 왜 모르는 거야?” 하고는 얼음이 든 컵에 커피를 따랐는데, 그때 가게의 종업원들 표정이 못볼 걸 봤다는 듯 경악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제서야 우리는 “아, 이 사람들은 아이스 커피를 안마시고 이렇게 먹는 사람 처음 보나 봐.” 하고 알아챘다. 아무리 유럽 사람들이 아이스 커피를 안 마시고 안 좋아한다지만 이렇게까지 모를 일이었나, 하고 우리도 놀랐다. 대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미국식” 프랜차이즈 커피숍도 있어서 아이스 커피가 아주 모를 일은 아니었을 텐데, 우리가 갔던 스페인 시골 한복판의 휴게소에서는 그게 놀랄만큼 희귀한 풍경이었나 보다.
그때 이 사람들은 정말 뜨거운 여름에도 뜨거운 커피만 마시는구나, 를 알았다. 차가운 커피는 듣고도 어떻게 마시는지 상상을 못할 정도로. “우리를 얼음에 커피 타마시는 미개한 동양인이라 생각하겠네.”라며 한참을 낄낄 웃었다.
나 역시 뜨거운 날에도 뜨거운 커피가 더 좋은 사람이지만, 가끔 그 종업원 언니들이 생각난다. 여전히 “그때 그” 신기하게 얼음에 커피 타 마시던 동양인을 말하며 기억할까, 이젠 아이스 커피 마시는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