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 배운 증명 방식
"강남에서 자랐어."
어른이 되어서 나는 이 말을 자주 하곤 했다.
특히 아이를 낳고 나서 더 그랬던 것 같다.
나의 존재를 증명하던 나의 일을 잃고 나서
나의 자존감을 지킬 수 있는 나만의 방법은
나 대학교 때까지 강남에 살았어.라는 말을 하는 것.
그러면 되돌아오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오~ 강남여자!!"
하지만 나는 단 한순간도 그들과 온전히 섞이지 못했던,
그렇지만 그들과 너무도 섞이고 싶었던 나는
강남에 사는 '이상한 아이'였다.
어릴 적 내가 이사 왔던 이곳은 나에게 낯선 동네였고,
내가 모르는 아니 나만 모르는 규칙들로 가득 찬 곳이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는 그 동네에서 노는 법을 몰랐다.'
그 방법을 물어보지도 딱히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룰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렸고,
나는 항상 조금 이상한, 그러니까 그들의 규칙을 모르는 아이였을 뿐이다.
친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늘 혼자는 아니었고 친한 단짝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아주 사소한 규칙들을 나는 끝내 알 수가 없었다.
언제 끼어들어야 하는지
언제 웃어야 하는지
언제 빠져야 하는지...
그 규칙들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나는 그 규칙이 만들어낸 동그라미 안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니 규칙을 모르고 게임판 위에 올라간 아이에 가까웠다. 그래서 자주 한 박자 늦었고, 가끔은 너무 빨랐다.
친한 친구들이 나 몰래 만나는 일이 생겼을 때도 나는 왜 그런지 알 수 없었고, 그 사실이 궁금해 미쳐버릴 것 같았지만, 알려주는 사람은 없었다. 사실 어른이 되어서도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왜 가끔 나를 뺀 나머지 아이들이 즐거웠는지, 나는 왜 그 놀이에 초대받지 못했는지..
아주 작은 예를 들자면, 짝꿍의 지우개를 빌려 쓰면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지우개 같은 건 딱히 말하지 않아도 나눠 쓰던 나의 예전 동네와는 다른 그들의 규칙을 나는 몰랐고, 친구들은 그런 내가 조금 불편했던 시절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지만 어린 나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엄청난 일이었다. 누가 맞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나는 그들이 가진 방식과는 다른 삶을 살아온 것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의 잘못은 아이였다.. 성격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냥 나와는 맞지 않는 놀이였을 뿐이다.
하지만 그때의 어린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의 생활이나 환경이 나와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들과는 어울리기 힘든 기질을 가지고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나를 의심했다.
내가 이상한가? 내가 뭘 잘못했나? 뭘 잘못했길래 이렇게 된 걸까? 왜 나만 어색할까?
나는 당시 우리 집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들 하는 걸 왜 안 해줄까
왜 우리 집은 조금 다를까.
어릴 때의 나는 불편하면 먼저 떠나도 된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몰랐다.
이 놀이가 힘들면 다른 놀이를 하면 된다는 걸 몰랐다.
나는 계속 그 자리에 남아있고 싶었고, 그들과 함께이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나를 계속 의심하고 자책하고 수정했다.
하지만, 나는 항상 원의 가운데에서 아이들과 어울리지는 못했다.
나는 이런 나를 지켜주지 않는 부모를 원망했고,
나를 원망했다. 나의 성격과 외모, 우리 집을 원망했다.
그런 생각들을 품고 대학에 갔을 때, 나는 새로운 나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지금까지의 나를 부정하고 버렸다.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과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들과 어울릴 만한 사람이 되자.
그렇게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맞지 않는 자리에서는 자리를 떠나는 대신 나를 먼저 바꾼다는 것.
이 감각은 어른이 된 뒤에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이후로도 여러 번 비슷한 놀이판에 들어가게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왜 늘 완전히 섞이지 못하는 걸까. 그리고 나를 바꾸려 노력했다. 그들에 맞는 나로.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놀이판에서 나름 잘하고 있다고 믿기도 했다. 드디어 내가 그들에 속했다고 믿을 때도 있었다. 좋은 친구들도 웃었던 기억도 있다. 그래서인지 이것이 정말 나를 힘들게 하는 삶인지 알지 못했다. 돌아보면 그때의 나는 힘들다는 감각 자체를 알지 못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잘하고 있다고 너무도 믿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알지 못했다.
나에게 맞지 않는 자리라는 걸 모른 채 자라는 아이도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