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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삼각자 Aug 23. 2023

드레스 셔츠를 입고 싶을 때가 있다

식자우환

건축가.

수트에 넥타이 차림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기 참 힘든 직군이다.


대형 사무소의 임원 또는 영업을 나가시는 분들이 아니라면 혼자 정장을 입고 나타났을 때 견뎌내야 하는 그 어색함을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00씨~ 오늘 미팅 있어?", "발주처 들어가나?" 그것도 아니라면 "오늘 소개팅 하나 보네?" 등등...

그러고 보니 나도 어김없이 그런 날 수트를 입고 출근했으므로, 결국 수트는 매일 입는 옷이 아니라는 생각이 거의 모든 건축가들의 머릿속에 들어있는 게 아닌가 싶다.


결혼을 하고 아이도 낳은 지금에 웬만해서는 누구에게 잘 보일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중요한 자리가 아니면 가급적 넥타이를 매는 일 까지는 하려고 하지 않다 보니 워드로브는 빈약해져만 가고, 결혼할 때 장모님으로부터 "황서방이 저렇게 까다로운 사람이었어?"라는 말씀까지 들어가며 지었던 수트를 마지막으로 옷 이야기 따위를 입 밖으로 꺼내는 건 사치스러운 일이 되어 버렸다.

지금은 소장이다 보니 누구 눈치 안 보고 오히려 출근할 때도 현장 가는 척하고 지금은 폐간된 free & easy에 나왔던 아빠들이 입었을 법한 러기드 한 아웃도어 웨어나 (강원도 산골짜기에서 지낸 육군이었으면서도) 샘당에 피코트 걸치는 게 더 좋은 터라 수트를 입으라고 하면 맘 속으로 좀 불편해지게 된다.

그러나 쓰리피스까진 아니어도 좋은 원단으로 지어진 탄탄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런 수트 안에 잘 어울리는 좋은 아틀리에에서 맞춘 드레스 셔츠를 입고 싶은 생각이 문득 들 때가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시키는 사람이 없어도 캐처 블록 씨처럼 무릎까지 올라오는 롱호스(40센티미터는 되어야지)에 차분한 광이 나는 플레인 토를 신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움직임은 무지 불편해질 것이라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면 그만두게 되기 마련이다.

"16 inches! How long does a man's hose have to be?"  영화 '다운 위드 러브' 중


그런데 이것은 마치 악순환과도 같아서 수트가 불편할 것 같으니 안 입게 되고, 그래서 편한 옷만 입다 보면 진짜 불편하게 되어 버려 결국에는 남자들의 옷장을 열면 가뜩이나 아빠 옷은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은갈치 양복과 큐빅이 박힌 넥타이 같은 해괴한 물건이 아직도 걸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롱호스까진 아니어도 정강이를 충분히 가려주는 양말도 없는 데다 덱슈즈 같이 생겼는데 뭔가 이상한 신발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옷과 신발을 몸에 걸치고 집밖으로 나오게 되면 지하철에서 가끔 만나게 되는 티켓포켓까지 달린 포멀한 수트를 입었는데 옷차림에 너무 안 어울리는 구두에 발목양말을 신고 카라가 너무 작은 셔츠에 광이 나는 타이를 억지로 맨 아저씨가 되는 것이다.

(이 아저씨들은 재킷의 벤트에 X자로 박음질되어 있는 실도 풀지 않고, 소매에 'Hand Made'라고 써져 있는 라벨도 안 떼고 다니는 경우도 있다. 정말 뜯어주고 싶다.)


옷을 신경 써서 입어서 멋쟁이로 불리는 남자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다만 '멋쟁이'라는 말에는 보통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끼는 약간 비꼬는 뉘앙스도 있어서 가뜩이나 경직된 분위기의 조직 안에서 튀고 싶지 않고, 찍히고 싶지 않은 마음과 장시간 노동을 해야 하니 출퇴근 시간이 아니면 누구에게 내 옷차림을 보여줄 일이 없었던 시절을 살았던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많은 남자들이 그런 아저씨가 되어간 것이 아닐까.


지금은 (비교적 젊은) 한국남자들이 옷을 못 입는 시절은 이미 지난 것 같은데 각종 sns의 영향으로 옷을 신경 써서 입는 사람들의 모습이 널리 퍼지다 보니 정장이든 캐주얼이든 참고를 할 만한 옷차림을 쉽게 볼 수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싶고 무엇보다 패션산업의 발전으로 다양한 아이템을 접할 수 있게 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변화가 오히려 뭘 입어야 될지 모르는 선택장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소위 ootd라고 인터넷에 올라오는 남들의 ‘오늘의 옷차림(outfit of the day)’은 이미 옷 입기에 익숙하고 자기 스타일을 만들어가는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 많고 다양한 스타일과 아이템을 보고 바지나 윗도리를 하나 장만했다가는 갖고 있는 다른 옷들과 매칭이 안 돼서 못 입고 방치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옷입기 #남자코디 등으로 검색을 하면 나오는 글들에서 기본템을 갖추라고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장 처음 갖춰야 할 아이템으로 감색 수트와 검정색 플레인토 구두, 그다음에 차콜그레이 수트 등등으로 조언해 주는 것과 같이 누구만의 특별한 스타일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이렇게 입었을 때 큰 무리 없이 좋은 스타일을 낼 수 있는 첫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이 사회인이 되었다면, 평일에 아메카지를 하고서 회사에 갈 수 없는 입장이 되었다면 기본적인 아이템으로 워드로브를 다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지난 학기에 진행했던 강의를 들었던 40명 남짓 되는 학생들 중에 수업시간에 칼라(Collar를 말함, Color는 컬러라고 쓰겠음)가 붙은 옷을 입고 있는 비율이 얼마 되지 않았던 걸 생각해 보면(몇 번씩 인디아나존스 박사의 강의실이 떠오르곤 했다.) 갑자기 셔츠를 입어야 되는 상황이 되면 어디에서 어떤 셔츠부터 찾게 되겠는가라는 생각이 든다.

무탠다드?


수트나 재킷 안에 입으면 좋은 셔츠는 가장 기본적인 스타일의 셔츠라고 생각한다.

넥타이까지 매야 하는 직장을 다닌다면 우선 눈에 가장 잘 띄는 부분인 칼라에 신경을 써야 한다. 옛날 아부지들 처럼 아래쪽으로 뾰족한 스탠더드 칼라보다는 약간 좌우로 벌어진 세미 와이드스프레드 칼라가 더 좋다. 하지만 완전히 벌어져 180도에 가까운 컷어웨이는 오히려 안 어울리는 사람이 우리나라에는 훨씬 더 많은 것 같다.

가슴의 주머니는 없으면 좀 더 젊어 보일까? 그건 취향이 정할 문제다. 다만 단추가 검은색이거나 눈에 띄는 색은 좋지 않다. 꼭 자개단추일 필요는 없고...


넥타이를 매지 않는 다면 나는 당연히 버튼다운 셔츠를 입으라고 할 것이다.

넥타이를 매지 않으니 수트를 입을 필요까지는 없을 것이고, 차분한 컬러와 무늬의 스포츠재킷에 치노바지 정도면 충분하지 않은가. 그리고 이 스타일은 쉽게 접할 수 있으니 말이다.

폴로, 토미 그리고 브룩스브라더스. 아니면 유니클로.

흰색, 하늘색, 노란색 그리고 분홍색 딱 이 네 가지를 가지고 있으면 된다.


이렇게 시작을 하는 게 정신건강에 이롭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나면 당신은 셔츠의 커프스와 거셋같은 데 신경을 쓰게 될 것이고 원하는 대로 만들어진 레디메이드가 거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 맞춤을 입으면 된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고 직장이란 전쟁터에서 또 몇 년을 구르고 나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드레스셔츠를 입고 싶을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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