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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지우개 May 13. 2023

삶, 사람, 사랑

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생각은 타인에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기에 사실 아무렇게나 해도 상관없다. 생각만으로는 죄가 될 수 없지만, 죄짓는 생각이라는 자책도 떨칠 수 없다.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생각마저 내 맘대로 하지 못한다면 너무 억울하다. 나는 종종 생각으로 죄를 짓는다.      


[자기 앞의 생]의 주인공 모모처럼 생각을 걸러야 한다는 생각조차 없던 시절이 나에게도 있었으리라. 일어난 생각 중 어느 것도 버릴 필요가 없던 그 나이에는 슬프거나 아픈 생각도 귀했다. 나는 내 안에 무엇이 들었길래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지 궁금했다. 나란 실체가 절대 껍데기, 몸뚱이로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판단은 진작 했기 때문에 내 안에 들어있는 뭔가가 어떤 방향성을 가진다는 생각은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문득 내 방향성이 옳은지 궁금해졌고, 옳고 그름은 어떤 기준으로 판단해야 하는지 궁금해졌으며,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살아갈 의지는 왜 가져야 하는지가 제일 궁금했다. 자연스럽게, 나는 살고 싶지 않은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모모가 가볍게 뱉어내는 생각이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는 방향성이나 타당성, 정체성, 달리 말하면 호불호, 시시비비가 없기 때문이리라.      


나는 내가 왜 태어났는지, 그리고 정확히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14p.


모모는 내던져진 자신의 생에 대해 방향성, 타당성, 정체성, 그로 인해 따라오는 호불호, 시시비비가 없다. 그저 로자아줌마는 엘리베이터가 갖추어진 아파트에 살만한 자격이 있다거나 인생에는 원래 두려움이 붙어 다니기 마련이라고 단언한다. 로자아줌마에게는 실컷 울 때가 가장 행복한 시간이라고 판단하고 세상에 있는 온갖 아름다운 것들과 견주어 볼 때 사람들이 목숨을 소중히 생각하는 것은 웃긴 일이라고 생각한다. 열넷 같은 열 살의 생각은 읽을수록 아플 만큼 묵직하다.     


모모는 사랑이 많다. 사랑을 받은 만큼 줄 수 있다는 말도 모모의 사랑을 보면 맞는 말 같지 않다. 모모의 눈에는 세상에 사랑해야 할 것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사랑하느라 자기 몸이 닳아 없어져도 모모는 오직 사랑한다. 심지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을 입힌 우산도 사랑하고 밤마다 불러들이는 상상 속 암사자도 사랑한다. 로자 아줌마를 고통만 주는 무능한 유태인 노인네라고 하면서도 로자 아줌마가 혼자서 조용히 죽기를 결코 바라지 않는다. 오히려 혼자 있어 무서워할 아줌마를 위해 열심히 달릴 뿐.     


이 나이를 먹어도 나는 생의 의미를 찾지 못했다. 사실 의미 따위 찾지 말라는 말도 들었다. 혹자는 그저 살아서 좋고 오늘 하루를 무사히 보내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토록 방향을 찾고 싶었지만 방향은커녕 한 치 앞도 모른 채 살고 있다. 생각 없이 대학을 갔고, 교사가 되었고,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고 키우고 있다. 내게 던져진 생은 문득 고단하거나 우울했고 가끔은 뭉클하고 행복했다. 무엇보다 모모보다 내가 유리한 점은 넉넉지 않아도 가정을 지키려는 부모가 있었다는 점이다. 불행으로 점철된 모모도 사랑이 충만하게 생을 살아내는데 내가 살아내지 못한다면 정말 신은 나를 지옥으로 보내버릴지도.      


초등학교 3학년 때였을까. 국어시간 선생님은 엄마를 주제로 글을 써보라고 하셨다. 친구들은 당연히 엄마의 생김새, 엄마의 좋은 점, 고마운 점을 떠올렸을 터. 내 머릿속은 감기몸살로 며칠째 몸져누운 엄마밖에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 시절 우리 엄마는 왜 그리 자주 몸살을 하셨는지. 아버지는 그런 엄마를 보며 허구한 날 아프다고 짜증을 냈고, 오빠와 나는 끼니가 부실해서 불편했다. 그날 아침 엄만 결국 울고 말았다. ‘미안하다. 도시락에 김치랑 김밖에 못쌌다’라고 말하며 엄마는 조금 눈물을 흘렸다. 지금 생각해 보니 엄마도 며칠째 낫질 않으니 우울한 상태였을까. 아니면 몸져누울 수밖에 없는 어떤 문제가 있었을지도. 그 시간 글을 쓰면서 나는 우는 엄마밖에 떠올릴 수가 없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날 선생님은 꼭 발표를 시키지.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는 ‘엄마가 아프다. 며칠째 누워있다. 그런 엄마가 오늘 아침에 울었다. 그래서 나도 슬프다’는 내용이었다. 글을 읽다가 당연히 나는 울고 말았고 울먹이다 끝까지 읽지도 못했다. 선생님은 당황하셨고 발표를 중단시켰다.     


며칠 전 어버이날이라 용돈을 보내드리며 엄마께 키워주셔서 감사하다는 아주 형식적인 톡을 보냈다. 엄마는 답장에 ‘딸아’라고 비장하게 시작하면서 잘 먹이지 못하고, 잘 입히지 못했는데도 잘 크고 잘 살아줘서 고맙다고 하셨다. 나는 엄마의 답장에서 그때, 등교하던 나에게 들키고 말았던 눈물이 떠올랐다. 엄마도 엄마의 고단한 생에서 살아낸 힘이 나였구나 싶었다. 사랑할 내가 없었다면 엄마의 삶도 방향성을 잃고 어떻게 흘렀을지 모른다. 나 역시 엄마의 사랑이 없었다면 되려 숨겨야 할, 하지 말아야 할 생각이 지금보다 훨씬 많았을지도.     


살 의지의 필요성을 아직 찾지 못했다고 하지만 사실 나는 동물의 본능에 충실하게 잘 살아내고 있다. 모모가 암사자를 불러들이듯 나도 사랑이 고플 때 나를 쓰다듬는 상상의 누군가를 불러들일 수 있다. 그래, 그토록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생각하고 판단할 새 없이 타인에게 사랑받고, 타인을 사랑하고 있다. 가끔은 왜 살아야 하는지, 이쯤이면 내 의지로 그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나니 나는 종종 집을 나왔다가 또 아무렇지 않게 사랑하러 달려갈 것이다.     


벌써 날이 저물었다. 로자 아줌마는 내가 없어서 무서워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집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14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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