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찰랑 Nov 23. 2019

독립 후 첫 겨울나기

새로운 세상으로 가는 나의 방법들


독립하고 첫겨울을 맞는다. 겨울이 지나면 모든 계절을 오롯이 혼자 살아낸 독립 1년 차가 된다.

가족들의 소리가 사라지고 적막을 마주한 독립 첫날 밤. 본능적으로 몸을 침대 끝 벽으로 붙였다. 아주 작은 소리도 경계하며 고양이처럼 옹송그리고 잠이 들었다.

내내 추웠다. 3월, 겨울과 봄의 경계선에 선 계절이었다. 벽에 붙은 난방 조절기를 한참 바라보았다. 분명 잠들기 전 켜 두었는데 온기가 돌지 않았다. 똑같이 생긴 흰 버튼 몇 개가 전부인 기계 앞에서 이 버튼 저 버튼을 짧게 한 번, 연달아 두 번 등 다양한 경우의 수로 눌러봤다. 이내 신경질이 나서 힘을 잔득 실어 마구잡이로 찔로 보기도했다.

방을 적절히 따스하게 만드는 온도는 얼마인지. 지금 이 상황이 정상인지 오류인지 가늠할 척도가 내겐 없었다. 모두 생에 처음인 영역의 일들이었다.

혼자 살며 누릴 수 있는 맛있는 맛만 골라먹을 순 없었다. 이 집에 들어선 순간부터 난방, 냉장고, 세탁기, 인덕션, 도어락, 비데, 전기밥솥과 오쿠 모두 내 관할이 되었다. 이제부터 이 도구들의 힘을 빌어 나를 먹이고, 입히고, 재워야 했다. 신경질은 한 번이면 충분했다.

바닥에 온갖 것의 매뉴얼을 펼쳤다. 작동 방법, 유지관리 팁 그리고 숨겨진 기능들을 읽어 내려갔다. 예를 들면, 도어락 비밀번호를 눌러야 하는데 타인이 인근에 있어 보안 유지가 필요할 때 실제 비밀번호와 다르게 눌러도 들어갈 수 있는 기능 같은 것 말이다.

유튜브 시대에 매뉴얼 읽기는 의외의 묘미가 있었다. 어떤 제품을 상품화하기까지 세상에서 가장 오랫동안 이 제품을 고민했을 사람들이 써내려 간 글이다. 그 속엔 한 제품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을 이들의 세계관이 녹아져 있었다. 특히 식품 건조기 매뉴얼의 첫 문장은 카뮈의 <이방인>급이었다. “건조식품 세계에 온 것을 환영한다. 건조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섭취법으로… “ 이 제품을 사용하는 자들만 알 수 있는 세계로 초대받은 것 같기도 했다.


내게 매뉴얼은 작은 글씨로 적힌 지름길이었다. 나름대로 새로운 세상으로 건너는 방법을 찾았다. 그리고 그 끝에 나를 발견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난방 온도는 28.5도, 내가 아끼는 원피스들은 30도의 물에서 세탁해 주어야 한다. 전자레인지는 한 달에 한 번 스팀세척을 눌러주고, 세탁기는 통건조를, 설거지처럼 싫어하는 일은 되도록 빨리하고 잊어버리는 걸 좋아한다 등등.


물리적으로 작아졌지만 역설적으로 더 넓어진 세상이다. 그렇게 한걸음씩 겨울로 향하고 있다.




지금 듣는 음악 Jakob Ogawa <Velvet Light>




매거진의 이전글 선배가 물들인 서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