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이제는 그 돈으로 옷 대신 다른 걸 사보려구요.
“이거 주세요! 아, 아니다 잠시만요...”
지독한 흰 남방성애자인 나는 같아 보이는 디자인과 색깔의 남방이 집에 서너 벌씩 있다. 한 화장품 마케터는 '하늘 아래 같은 색조는 없다'는 명언을 남겼고, 화장품에 큰 관심이 없는 나는 옷, 그중에서도 남방의 영역에서 그 진리를 증명해내고 있었다.
사실 흰 남방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얼굴의 채도를 3 정도 밝혀주는 화사함, 이지적이고 깔끔한 느낌. 그중에서도 내가 흰 남방을 좋아하는 이유는 '튀지 않아서'였다. 옷을 잘 입네, 못 입네 사람들 입방아에 오를 일이 없었다. 튀지 않는 범위 내에서 나만의 디테일(셔링 같은 것)을 추가해가며 내 딴엔 과감한 도전을 하기도 했다.
오늘도 길거리를 지나가다 '색소'라는 뜻을 지닌 브랜드 매장에서 마음을 훔치는 흰 남방을 발견했다. 아, 이건 입어 볼 필요도 없다. 무조건 내꺼다. 두어 번 거울에 대보고 가격도 제대로 보지 않고 매대로 가져가서 점원에게 말했다. “이거 주세요!”
나는 한 달에 몇 벌 쯤 필요 없는 옷을 샀을까
그러나 점원이 바코드를 찍으려는 그 짧은 찰나, 큰 느낌표가 내 후두부를 강타했다. 아아 과연 그랬다, 나는 지금 백수였다. “아, 아니다 잠시만요...” 뭔가 대단한 고민을 하는 척하다가 조용히 옷이 걸려있던 자리로 가서 옷을 다시 예쁘게 걸어놓았다. 3만 8천 원? 오오오, 안돼안돼 정신 차려.
그랬다. 내 직업은 2개월 차 초보 백수, 그러니까 고정적인 인컴이 사라지고 아웃컴만 남은 사람이었다. 월급날이 언제인지도 모르고 살던 게 불과 얼마 전인데 이제는 남방 하나를 선뜻 사지 못한다. 그런데 왜일까, 누가 봐도 내꺼인 흰 남방을 반납(?)하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생각만큼 서글프거나 속상하지 않았다. 왜냐면 생각해보니 나는 흰 남방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사람으로 살기 위해 보통 이상의 노력을 해야 한다.
그저 보통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 튀지 않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위해 나는 엇비슷한 흰 남방을 무수히 사들였다. 기안84처럼 매일 같은 옷을 입을 배짱도 없었고, 그렇다고 매일 박나래처럼 멋드러진 옷을 입을 센스는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고른 비겁하지만 안전한 선택지, 그것이 흰 남방이었다.
그러다 보니 옷장은 얼핏 보면 똑같이 생긴 옷들로 넘쳐났고, 나는 아주 보통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흰 남방을 사기만 하면 보통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처럼 인생도 심플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부터 보통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보통 이상의 노력을 해야 했다. 취직이 아닌 승진을 위해 토익 점수를 따야 하고, 야망 때문이 아니라 그저 잘리지 않기 위해 승진해야 했다.
애석하게도 보통 체중을 유지하는 것도 점점 어려워졌다. 하루정도 굶으면 살이 쭉쭉 빠지던 20대를 지나, 어제의 맥주는 실시간으로 오늘의 뱃살이 되어 까꿍 하고 인사한다. 30대는 그런 시기다.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보통 이상의 노력을 하다 탈이 났다. '존버호(呼)'의 선봉장에 있던 내가 휴직을 결정하고 갑판에서 내려오던 날, 아무 노력도 하지 말고 살아보자, 그렇게 생각했다. 낮에는 주로 책을 읽었고, 밤에는 주로 걸었다. 적당히 배부르게 먹고, 기분 좋을 때까지만 운동했다. 최소한의 인간 존엄성을 수호하기조차 힘든 출퇴근길의 꽉 찬 지하철, 유리창에 비친 내 부피까지 실시간으로 체크해야 하는 것이 '보통'이던 세상에서 잠깐 벗어나 보았다.
내 기준에 나에게 과했던 것들을 그렇게 하나씩 덜어내자 진정한 의미의 다이어트가 시작되었다. 버티기 위해 하루에 두 잔씩 마시던 커피를 한 잔으로 줄이고, 살까 말까 망설이던 것들을 대부분 사지 않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늘처럼 옛 버릇 못 버리고 아무 생각 없이 남방을 집어 드는 날도 있지만, 제 자리에 돌려놓으면서도 왜인지 마음이 홀가분했다.
내게 필요한 것은 3만 8천 원짜리 흰 남방이 아니라 하이힐 대신 하얀 운동화를 신고 거리를 걷는 편안함, 평일의 지하철에 앉아서 책을 읽는 자유 같은 것들이었다. 남방을 사는 것 말고 3만 8천 원으로 할 수 있는 다른 것들, 훨씬 더 작게 쪼개서 의미 있게 쓸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다이어트의 시작, 타인의 시선 걷어내기.
바쁜 세상으로 다시 돌아갈 생각을 하면 갑갑해진다. 길거리의 옷은 44사이즈에 최적화되어있고, 한 번도 실무에서 쓰인 적 없는 영어성적 승진기준은 점점 타이트해지니 말이다. 누구는 어디로 스카우트를 당했다더라, 해외 주재원을 간다더라, 시중금리가 어떻게 된다더라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불안함이 불쑥불쑥 고개를 쳐든다.
그래도 정체 모를 답답함에 속 끓였던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도태되지 않기 위해 꾸역꾸역 세상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과 조금 느리더라도 내 속도로 가는 것. 나는 적어도 이 두 가지의 선택지를 손에 넣었다. 감당 가능한 것을 내 몸에 얹고, 그렇지 못한 것을 걷어내는 것, 그렇게 내 몸 구석구석의 근육을 들여다보는 것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
남들이 정해놓은 '적정함', 그러니까 '보통'의 삶에 맞추기 위해 수없이 사들였던 흰 남방들이 다 똑같아 보인다. 분명 이 옷은 소매가, 이 옷은 어깨가, 이 옷은 밑단이 미묘하게 달랐는데, 사실은 아무도 내가 무엇을 입는지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이제야 든다. 소매 끝에 달린 셔링을 모른 척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모르는 거였다.
근육을 늘리는 것, 체지방을 줄이는 것, 내 몸이 나를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무게와 부피를 유지하는 것. 다 좋다. 그러나 내게 가장 필요했던 건 그런 종류의 다이어트가 아니었다. 아주 기본적인 다이어트, 그러니까 내 마음에서 다른 이들의 시선을 걷어내는 것이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