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래 Jul 15. 2020

나의 크로스핏 실패기

운동할 땐 역시 걸그룹 노래를 듣자

다이어트를 하는 사람들은 마음이 급하다. 먹기만 하면 한 달에 10kg 감량은 우습다는 보조제 광고, 원하는 만큼 살을 못 빼주면 등록비를 모두 환급해준다는 헬스장. 다이어터들의 간절하고 급한 마음을 이용한 상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럴 때마다 나는 두 발로 들어갔다가 네 발로 기어 나온 크로스핏 원데이 클래스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다스린다. 원래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건 없지만, 사장님이 하루만의 환불 요청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기에 내 맘대로 원데이 클래스라고 부른다.


퇴근길, 회사 근처 올리브영에 들러 폼클렌저를 사고 나오는데 건물 지하에서 청소년 드라마에 나올법한 대사들이 쏟아져 나왔다. “할 수 있다!!!!! 호오우!!!!! 파이팅!!!” 비현실적인 대사와 둥둥거리는 EDM 음악에 홀려 피리소리에 고개를 내미는 코브라처럼 지하로 향했다. 그곳은 크로스핏 센터였다. 벽과 바닥은 온통 까맸고, 정면에는 거울과 알 수 없는 숫자들이 잔뜩 적힌 칠판이 있었다. 가운데 모인 스무 명쯤 되는 사람들은 각자 역기를 들거나, 스쿼트를 하거나, 맨몸 운동을 하고 있었다. 생소한 풍경에 어리둥절하고 있는 내게 근육질의 사장님이 다가왔고, 나는 얼떨결에 한 달을 등록해버렸다. '내 몸의 지방을 한 달만에 싹 걷어낼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던 탓이다.


마침 오늘은 '커플운동 DAY', 남녀 10쌍이 랜덤으로 커플이 되어 4가지 종목의 운동을 하며 기록 경쟁을 하는 날이란다. 갑자기 건전한 청소년 드라마에서 미국 하이틴 드라마로 장르가 변경되는 건가? 서로 북돋아주며 운동하고, 슬쩍슬쩍 스치는 스킨십에 설레고, 실수하면 괜히 등 때리고 농담하는 그런 풍경? 갑자기 등록하길 엄청 잘했다는 생각을 하던 순간, 사람들이 어느새 다 모였고 내게도 파트너가 정해졌다. 오메, 키도 크고 훤칠하다. 오예. 괜히 있지도 않은 옆머리를 만들어 귀 뒤로 넘기며 수줍게 말했다. “아 제가 오늘 처음이라.. 잘 못해도 봐주세요!” 그는 훈훈하게 대답했다. “아 걱정 마세요! 제가 리드할게요, 꼴찌만 안 하면 되죠!”


그렇게 나는 죠스에 좇기는 선원처럼 로잉머신에서 노를 젓고, 공격을 중단하라는 장군의 전갈을 중령에게 전달해야 하는 병사처럼 러닝머신 위에서 뛰었다. (파트너가 '하나! 다섯! 열!' 이렇게 세어준 덕분에 윗몸일으키기는 세 개만 했다.) 영겁 같은 한 시간 가량이 흐르자 미션을 마친 커플들은 하나둘씩 칠판으로 달려가 종료시간을 기록했다. 그리고 우리 커플은 나의 피나는 노력 끝에 무려 꼴찌를 했다! 꼴찌만 안 하면 되다던 내 파트너는 불타는 고구마가 되어 널부러진 나를 뒤로하고 '꼭 그렇게 해야만 속이 시원했냐!'는 표정을 지으며 인사도 없이 수건으로 바닥을 탁탁 치며 그곳을 빠져나갔다. 나는 옷가게에서 한 번 옷을 입어보면 양말이라도 하나 집어 들고 나오는 태생적 소심함을 이겨내고, 그 날 바로 환불을 요청했다. 한 시간 동안 나를 충분히 지켜봤을 사장님은 '원래는 안되는데..'라고 말하면서도 이미 카드 포스기에서 매출 취소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알고 보니 크로스핏은 온몸의 근력과 지구력을 활용하여 최단시간에 최고출력을 기록하는 것이 목표인 단기간/고강도 운동이었다. 심지어 기록 단축과 경쟁을 위한 운동에서 꼴찌를 했다니, 나를 내팽개치고 수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그가 처음엔 야속하고 괘씸했다가, 시간이 지나니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매일 누적된 기록을 바탕으로 매달 수상자를 정하는 그곳만의 룰이 있었는데, 상당히 순위권이었던 그는 나로 인해 순식간에 중하위권으로 순위가 떨어진 듯했다. '어쩌라고! 내 탓이냐! (내 탓 맞지만)'라고 생각하는 한편으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거기가 어디라고 들어가서 야무지게 결제까지 하고 수업까지 듣고 온 내가 웃겨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길에 혼자 한참을 웃었다.


근육은커녕 알통도 없는 팔뚝, 헬스장에서 속도 6km/h 이상으로는 뛰어본 적도 없는 다리, 빨래판보단 빨랫비누에 가까운 배. 내가 먼저 나에 대해 충분히 설명했더라면 근육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나를 돌려보냈을까? 아마 내가 그 크로스핏 센터를 한 달 정도 다녔으면 근육 사장님 말대로 지방이 모두 걷힐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달 내내 크롭탑 사이로 드러나는 언니들의 11자 복근에 괜히 기가 죽었을 것이고, 매일 기록 칠판의 맨 끝에 이름을 올렸을 것이고, 커플운동을 할 때에는 깍두기가 되어 아무도 안 껴줬을 것이다. 나는 그런 것들이 모두 괜찮은 '마이웨이'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하루 만에 그만두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그 날의 경험을 교훈 삼아 나는 이제 아무 운동에나 아무렇게나 도전하지 않게 되었다. 가능하면 원데이 클래스를 꼭 듣는 편이고, 사전에 정보를 충분히 파악하고 덤벼든다. 다른 건 몰라도, 운동에 있어서만큼은 늘 초심자의 마음으로 겸허하려 애쓴다. 다음 날, 나는 집 앞 동네 헬스장을 등록했다. 몸매가 다 드러나는 크롭탑과 레깅스 대신 아빠 잠옷만 한 반팔티, 거의 정강이까지 오는 까만 바지를 주섬주섬 입고 러닝머신 위에 올랐다. '이용해 보셨죠? 하시다가 궁금하신 거 있으면 말씀해주세요~' 무관심하지만 거슬리지 않는 말투의 트레이너가 사무치게 고마웠다. 이름도 모를 해외 DJ들이 믹싱 한 것 같은 음악 대신, 티아라의 뽀삐뽀삐가 흘러나왔다. 크으 역시 운동할 땐 걸그룹이지! 양손으로 고양이 댄스를 추는 상상을 하며 러닝머신의 빨간 'Start' 버튼을 눌렀다. FIN.

이전 03화 와 나 이 때 진짜 날씬했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