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meta)’라는 표현이 있다.
고대 그리스어로, ‘~와 함께’, ‘~을 넘어’의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 단어의 의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잘못을 뉘우치고 고친다는 의미의 ‘회개’에도 이 단어가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회개는 고대 그리스어로, ‘메타노에오’라고 한다. ‘노에오’는 ‘생각하다, 인지하다’ 등의 의미인데, 종합해 보면 ‘~을 넘어 인지하는 것’이 회개라는 말이다. ‘~’에 해당하는 말이, 나 자신이 아닐지 싶다. 나 자신의 현재 상태를 넘어, 인지하는 것이 회개라는 거다. 지금 하는 잘못된 생각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넘어, 돌아서라는 말이다.
자기 생각에 갇혀 있으면, 제대로 보지 못한다.
갇혀 있다는 말은 함몰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내 안에서 벗어나지 않은 상태로, 나를 바라보는 거다.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여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평소에 내 목소리를 들으면 어떤가? 아무렇지 않다. 평소 듣던 목소리기 때문이다. 이와는 달리, 내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면 어떤가? ‘내 목소리가 이렇다고?’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말하면서 들을 때와 녹음해서 들을 때의 진동 차이 때문에 그렇다는데, 아무튼 이상하다. 평소 목소리와 녹음 목소리가 같다고 한 사람은 아직 본 적이 없다.
녹화된 영상을 볼 때도 이런 느낌을 받는다.
함께 어울릴 때는 알아차리지 못했던 모습인데, 영상을 통해 새롭게 볼 때가 있다. 그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서 보니, 보이지 않던 게 보이는 거다. 당시에는 내 시선이 향하는 것만 바라보게 되는데, 영상은 전체적인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현재의 상태에서 보는 모습과 벗어난 상태에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갇혀 있는 자기 생각에서 벗어나, 자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 이유다. 좀 떨어져서 자기를 바라볼 필요가 있는 거다.
경험을 통해 깨달은 것이 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였다. 내가 주도해서 진행했고 선임이었던 분이, 함께 했다. 선임이라고는 하지만, 실무 경험은 거의 없던 분이었다. 다른 영역에서 일하다 온 분이었는데, 나이가 많았다. 실무 역량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거래처 담당자와 1차 미팅을 마치고 나왔다. 복귀하는데, 논의한 내용을 슬라이드에 정리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하셨다. 매우 번거로운 일이었다. 나는 할 수 없는 몇 가지 이유를 댔다. 그분은 별말 없이 알았다고 했다. 실무를 거들어주지도 못하면서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
사무실에 복귀하고 정리하는데, 그 말이 계속 거슬렸다.
그때는 거슬렸다는 표현이 맞다. 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마음이 불편했으니. 잠시 생각하다가, 그분 말대로 논의한 내용을 슬라이드에 정리하기로 했다. 그분 자리에 가서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니, 매우 밝은 표정을 지었다. 2차 미팅에서 정리한 슬라이드를 보면서 진행했는데, 미팅이 순조롭게 잘 진행됐다. 이후 미팅도 계속 슬라이드를 업데이트하면서 하기로 했고, 프로젝트도 잘 마무리되었다. 생각이 바뀌었던 이유가 뭘까? 갇혀 있는 나 자신의 상태에서 거리를 두고, 전체적으로 바라봤기 때문이 아닐까?
지금 무언가 불편한 마음이 드는 것이 있는가?
그렇다면 조금 떨어져서 나 자신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 영상을 찍어서 보는 느낌으로, 시간을 두고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지금 기분을 느끼게 된 이유를 살피고, 그 이유가 왜 내 기분을 건드렸는지 생각하는 거다. 불편한 마음을 걷어낼 방법은 무엇인지도 찾아보는 거다. 불편한 마음을 걷어 내야 하는 이유는, 그 자체로 좋지 않고, 그 마음으로 타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의 아니게’라는 표현으로 사과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불편한 마음이 가득할 때 나오는 말과 행동으로 저지른 실수 때문이 아닌가? 불편한 마음을 걷어내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실수라고 말할 순 없다. 실수로 포장했을 뿐이다. 그러니 마음에 불편함이 담겨 있다면, 걷어내는 노력을 해야 한다. 언제? 수시로. 명상이든 산책이든 글이든 무엇으로라도 덜어내야 한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의 하나가, 불편한 마음을 잘 덜어내는 나만의 방법을 찾는 게 아닐지 싶다. 자! 당신은 무엇을 해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