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해버린 관계의 안전거리

by 해루아 healua

"이제 그만 나와도 괜찮다."


어두운 방 안에서 수천 번은 더 되뇌었을 그 말을, 마침내 세상 밖으로 꺼내 놓았다. 20여 년 동안 나를 가두었던 '닫힌 방'의 문을 열고 나오니, 딱딱하게 굳어 있던 굳은살 사이로 여린 새살이 돋아나는 기분이다. 과거의 나보다 훨씬 단단해졌고,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으로부터 꽤 많이 자유로워졌다. 하지만, 그 문을 처음 열고 발을 내디뎠을 때의 그 서늘한 감각만큼은 여전히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가끔은 무의식 속에서 과거의 똑같은 장면이 꿈으로 다시 연출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눈가에 맺힌 흔적을 조용히 훔쳤다. 그리고 이 방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문을 열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될 줄 알았다. 나도 세상과 많이 부딪히며 나이를 먹었고, 시간도 내 편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문 밖의 세상은, 내가 숨어있던 방보다 훨씬 복잡하고 정교한 '관계의 그물망'이었다. 그것은 친구, 연인, 동료, 그리고 가족의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관계는 언제나 가장 가까운 모습으로 나를 시험했다. 새로운 관계의 문턱 앞에서 나는 발을 들였다가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한 걸음 내딛으려 하면 과거의 기억이 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지금은 웃으며 복기할 수 있는 그 시절의 모습들, 그 지독했던 관계의 결핍을 이제 하나씩 꺼내어 보려 한다.




사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사람을 경계하던 아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넌 참 사람을 좋아해."


사교성이 넘치고 붙임성 있는 나를 보며 친할머니는 '돌연변이'라고 부르셨다. 무뚝뚝한 집안 내력과는 다르게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 웃음을 준 아이였으니까. 엄마는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사탕 하나, 장난감 하나를 친구들에게 아낌없이 퍼주는 순수한 아이였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내가 순수하니 사람들도 당연히 순수할 줄 알았고, 세상은 눈에 보이는 선의가 전부인 줄로만 알았다.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은 활짝 열린 창문과 같았다.


하지만 중학교 2학년, 그 잔인한 사건은 나의 데이터베이스를 완전히 파괴하고 재편했다. 믿었던 친구의 배신보다 더 아팠던 것은 어른들의 외면이었다. 나의 진실보다는 다수의 목소리를 믿고 나를 몰아세우던 담임 선생님. 그녀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판단한 엄마는 나를 다른 학교로 전학시켰다. 그것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깨진 자아를 들고 도망친 '피난'이었다.


다시 리셋을 해야만 했다. 전학 간 학교에는 다행히 옛 친구들이 많았다. 전학생이 왔다는 소식에 교실 문 앞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원래의 나라면 그 관심이 반가워 먼저 손을 흔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빛들이 반가운 것은 찰나였다. 나는 웃지 않았고 속으로 나에게 말했다.


"저 웃음 뒤엔 어떤 의도가 숨어 있을까?"


그때부터 나는 다짐했다. 타인에게 내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던 손은 나를 지키기 위해 온몸에 힘이 들어갔다. 입술을 깨물고 눈에 힘을 주며 주먹을 꽉 쥐는 법을 배웠다. 사람을 향해 반짝이던 눈망울에는 묘한 경계의 안개가 서렸다. 사람을 마냥 좋아하던 아이는 거기까지였다. 그 이후의 나는, 다치지 않는 법부터 배웠다.




그때 터득한 '경계하는 습관'은 나를 지키는 무의식적인 방어막이 되어 성인이 된 후에도 오랫동안 나를 지배했다. 열네 살의 나에게 소속이란 '언제든 조작될 수 있는 군중놀이'일뿐이었다. 본능적으로 편안하게 집단에 녹아들어 안정을 느끼고 싶었지만, 이성적으로는 다수가 나를 다시 파괴할까 봐 끝내 밀어내야만 했다.


이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은 '가면'이었다. 무리 안에서 가장 먼저 배려하는 척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은 꽁꽁 닫아걸었다. '친절하지만 거리가 있는 사람'. 그냥 그렇게 보이고 싶었다. 그것이 내가 정한 '관계의 안전거리'였다.


하지만 너무 멀어지면 소외될까 두려웠고, 아이러니하게도 누군가 그 선을 넘어 가까워지면 내 안의 '깨진 자아'를 들킬까 봐 더 큰 불안에 휩싸였다. 사랑을 받아도 그것이 언제 증발할지 몰라 불안해하며 전전긍긍했던 시절. 상처받지 않기 위해 지켜온 그 안전거리가 결국 나를 서서히 외롭게 만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잘 알지 못했다.



누구보다 사랑받고 싶었지만, 누구보다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지독한 모순. 그 방어기제가 가장 아프게 작동했던 곳이 있다. 나의 서툰 사랑이 부메랑이 되어 상대를 찌르고, 끝내 나 자신까지 깊숙이 찔러버렸던 곳. 바로 나의 '연애'와 '결혼'에 관한 이야기다. 그 이야기를, 이제 꺼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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