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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aneFly Aug 11. 2020


33.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

- 치매의 서막인가

몇 년 전부터 해야 할 일을 잊어버리거나 대화 도중에 갑자기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지라고 묻게 되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잠자기 전 쓰고 싶은 소재가 떠올라 '옳지, 이건 꼭 기억해서 내일 쓰자!' 해놓고 다음 날에 그 생각 자체까지 까먹어버렸다가 며칠 후에 겨우 떠오를 때도 있다. 


원래에도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메모를 하거나 핸드폰에 알람을 설정하기도 하는데, 이제는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아예 기억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할 때 무척 서글프다. 아직 나의 나이를 인정하기 싫음에서 오는 감정일 것이다. 자신의 나이를, 노화를 인정하면 마음이 편해질까 싶지만 그것도 아니란다. 정말, 인간은 왜 이리 복잡할까. 


오늘 아침, 식사를 마치고 커피를 마실까 말까 고민하다가 속이 쓰릴 거 같아 마시지 않기로 했다. 점심식사는 누룽지를 먹기로 하고 전기포트에 전원을 켰는데, 같은 공간에 드리퍼가 머그잔 위에 놓여있었다. 더욱 이상한 건 젖은 원두커피가 필터 안에 있었다. 뭐지, 이건? 드리퍼를 들어 올리니 원두커피가 3분의 2쯤 머그잔을 채우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도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야? 5초쯤 흘렀을까. 내 입에서 '하아'라는 탄식이 짧게 나왔다. 그리고 이내 웃음이 나왔다. 


이 사건의 시작은 어제 점심식사 후로 거슬로 올라간다.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시고 싶어 커피를 내렸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러고 나서 인터넷을 잠깐 하다가 졸린 것 같아 한 시간만 자야지 하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 시간 후에 깨어 수업 준비를 하고 아이가 와서 수업을 했다. 그 후에는 TV를 켜서 요새 제일 재밌게 보는 CSI:NY 시리즈 3편을 스크린 채널에서 연속 본 것이다. 그리고 노트북 작업을 하고 다시 11시쯤에 최애 수사물 NCIS 시리즈 한 편을 Fox 채널에서 봤다. 두 개 모두 재방송인데 왜 나는 또 보는걸까. 자세한 내용이 기억이 안 나 보는 거라고 변명을 해본다.


이후, 노트북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 혼자 산다'의 김민경 편을 보면서  국물떡볶이를 시킬까, 로제 떡볶이를 시킬까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둘 다 시킨다는 말에 빵빵 터져서 깔깔대다가...... 잠이 들어버린 것이다. 커피는 나의 뇌에서 아예 사라져 버렸다. 바리스타 2급까지 갖고 있는데, 진정 나는 커피 마니아가 아니었던 것인가. 



이런 웃지 못할 일이 처음 생겼을 때는 내 머리를 얼마나 쥐어박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냥 웃어버리게 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긍정적인 면을 생각해보자면 나의 추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고, 또 이렇게 글로 쓰게 되었다. 


동거하는 열두 살짜리 고양이도 치매 기미가 가끔 보여 불안하다. 한밤중에 갑자기 미친 듯이 울 때가 있는데 방향이 잡히지 않아 불안해서라고 한다. 옛날 어른들은 귀신이 보여서 우는 거라고 하던데, 현대 과학에서는 치매 증상의 증거란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나는 울지 않으니 아직 치매는 아니다. 동물에 인간을 비유해서 웃기긴 하지만, 결국 다 포유류니까 못할 것도 없지. 


갑자기 샾의 "내 입술 따뜻한 커피처럼"의 첫 소절이 생각났다. 예전에는 떠나간 연인을 붙잡으려는 애절한 노랫말로 들렸는데, 오늘따라 나의 상황을 위로해주는 것 같다.


울지 마 이미 지난 일이야


삶의 반칙 선위에 점일 뿐이야


살아가면서 누구나 겪는 일이야


어른이 되는 단지 과정일 뿐 야


Yo 단지 과정일 뿐 야


맞다. 단지 과정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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